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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의 <와일드카드> 제작일기 [2]
권은주 2003-05-16

한 겨울은 어찌 날꼬

2002년 11월3일_북창동 유흥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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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크랭크인. 11월 초답지 않게 매우 쌀쌀하다. 첫신은 노래방에서 주봉이 형(김 반장)의 생일잔치 뒤풀이를 하는 장면. 나는 노래 한곡 부르고, 형사들 바스트 이동숏으로 첫신은 OK. 밤신은 북창동 유흥가 골목. 유흥가 촬영은 현지 세력가(무척 순화된 표현임)의 도움없이는 불가능하다. 알고보니, 그곳의 세력가가 신근호 PD의 고향후배란다. 아무런 문제없이, 너무나 많은 도움과 협조 속에 촬영을 순조롭게 진행. 그 세력가도 영화에 한컷 출연. 날씨가 매섭다. 감독님, 여름에 찍을 영화 한겨울에 찍게 되었다고, 투덜투덜. 아! 이제 추위와의 싸움은 시작되었다. 11월 초도 이러니, 한겨울은 어찌 날 것인가. 그렇게 영화는 시작되었다.

베테랑 감독의 카리스마

2002년 11월12일_메리어트호텔 주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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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막 4회차를 나왔지만, 현장의 손발이 착착 맞는다. 무엇보다 그것은 감독님의 카리스마에서 비롯된다. 감독의 카리스마는 위압적인 언행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스탭과 배우가 감독을 신뢰하는 것은 감독이 그 영화에 대해서 제일 잘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다. 스탭들에게 마냥 부드럽고 편한 김유진 감독. 특별히 소리지르거나 고집을 피우지 않아도, 우리 모두는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이 영화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니 극단적으로 말해서 그밖에는 아무도 이 영화에 대해서 모르므로. 촬영이 거듭되면서 우리 사이에는 뭔가 어렵고 곤란한 상황이 닥칠 때마다 주고받는 말이 생겼다. ‘감독님이 어련히 알아서 하시겠어!’

베테랑 감독의 현장은 아름답다. 그런데 누구보다 현장을 잘 리드하고, 또 영화를 잘 만들 줄 아는 베테랑 중견감독들에게 연출의 기회가 점점 적어지고 있다. 새로운 경향도 중요하고, 새로운 스타일도 중요하다. 하지만 연출력이 무르익어 꽃을 피울 수 있는 중견감독들의 힘있는 영화도 소중한 영화적 자산이다. 어느 사회 어느 조직이나, 새것와 오래된 것이 함께 있어야 서로 성장한다. 우리 사회는 너무 빠르다. 그리고 새것을 너무나 좋아한다. 영화계도 심한 새것 콤플렉스에 시달리는 지도 모른다.

동근아, 형님 나이 좀 생각해다오

2002년 12월1일_압구정동 스포츠센터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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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근은 괴물이다.’

양동근이 한채영을 만나는 장면. 불심검문을 빙자해 계속 구애를 한다. 동근이의 표현은 상상을 초월한다. 가히 동물적이라고나 할까. 어떻게 저런 표현이 가능할까라고 감탄할 정도이다. 많은 배우들이 방제수 역의 물망에 올랐지만, 역시 배역에는 타고난 임자가 있는 것이다. 방제수는 양동근의 역이었고, 동근이가 방제수를 함으로써, <와일드카드>는 펄펄 살아 숨쉬고 있다.

감독님은 동근이 연기를 보면서 입을 다물지 못한다. 나도 마찬가지 감탄, 그리고 또 감탄. 동근이는 귀엽다. 우리 둘은 영화 속 파트너이기 때문에 늘 붙어 있고, 자동차신이 제법 많아서, 차 속에 둘이 들어앉아 있는 경우가 많다. 동시녹음을 위한 마이크가 설치되기 전까지 그 공간은 은밀하다. 그 속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나눈다. 사람들은 우리 둘이 술을 자주, 그리고 많이 마셔서 친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아니다. 술을 자주 같이 마신다고 해서 친해지지는 않는다. 다만 술과 친해질 뿐이다. 나나 동근이나 낯가림이 심한 사람이어서, 처음에는 내가 일부러 술자리를 만들곤 했다. 개인적으로 그런 작위적인 친교를 싫어하는 편이지만, 나이 먹은 놈이 그런 요살이라도 부려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이제는 그런 술자리가 따로이 필요치 않다. 영화 속 우리 둘의 모습처럼, 고민을 털어놓고, 골려먹고, 함께 논다. 내가 이 영화에서 한 것은 그게 전부다. 동근이랑 같이 잘 놀았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근이가 자꾸 술먹자고 하는 통에 고생했다. 아, 나이는 못 속인다. 젊은 놈 술 못 당한다.

아가씨들, 죽느라 애썼어

2003년 1월31일_양수리 종합촬영소 세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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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오스룸을 사흘째 찍고 있다. 우리 영화의 악당 노재봉 일당이 처참한 살인극을 펼친 곳. 감독님은 원래 테이크를 많이 가는 편이 아니다. 이 장면도 테이크를 적게 가지만 워낙 찍어야 할 분량이 많다. 죽음을 당하는 두 아가씨. 사흘 동안 죽으려니 정말 죽을 노릇이었을 것이다. 이틀 걸려 죽었고, 오늘은 죽은 뒤의 장면. 이게 더 고역이다. 바닥에 피를 흘리고 그 위에 머리가 놓여졌으니, 그 장면을 그대로 고정시키려면, 하루종일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야 한다. 얇은 원피스 차림으로 찬바닥에 누워 바들바들 떤다. 그러다가도 슛이 들어가면 가만히 있다. 용하다. <와일드카드>에는 낯선 배우들이 많이 나온다. 형사들, 도상춘 일당들, 노재봉 일당들, 그리고 많은 단역배우들. 모두들 연극계에서 잘 훈련된 ‘한 칼 배우’들이다. 한두 마디의 대사, 잠깐 나오는 한두컷도 그들은 소홀히 하지 않는다. 그 치열한 프로정신 덕에 우리 영화가 더욱 풍성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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