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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칸 리포트,두 보고서 [4]
이다혜 2003-05-30

칸을 습격한 꼬리 아홉달린 영화들에 관한 보고

정성일, 칸으로부터의 편지2 - <도그빌> <오후5시> 등 칸 화제작 오디세이

칸 = 정성일/ 영화평론가

…(그리고 이야기는 계속된다) 칸에서 보내는 두 번째 이야기의 시작은 전 지구적인 화제이다. 어쩌면 서울에서 당신은 이미 <매트릭스2 리로디드>를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칸영화제에서 신분을 표시하는 4개 등급 중에서 세 번째에 해당하는) 블루카드인 나는 칸에서 이 영화의 초대를 받지 못했다(당연하지 않는가? 나는 워쇼스키 형제나 키아누 리브스를 ‘개인적으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미리 칸에 도착한 기자들은 뒤이어 속속들이 도착하는 기자들만 만나면 이구동성으로 <매트릭스2>가 어떠냐고 물어본다. 신기한 것은 서로 입을 맞추기라도 한 듯이 시시하다, 고 대답한다. 그런데 오늘 아침에 사서 읽은 <리베라시옹>은 “죽인다!!”는 게 결론이다. 워쇼스키 형제는 ‘영화의 새로운 영토’에 뛰어들어 이 삼부작을 점입가경으로 만들었다고 감탄한다.

어느 쪽이 진짜일까? 이렇게 질문하면 틀린 것이다. 그 대신 당신은 <매트릭스2>에서 무엇을 보았습니까, 라고 물어보아야 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이유가 있다. 매년 칸에서는 영화 ‘선수’들이 모인다. 말하자면 여기는 비평담론의 경기장이다. 하루에 매일 4편 이상의 영화를 보고(좀 부지런을 떨고 밥을 굶으면 6편까지도 본다), 그리고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오직 영화에 대한 자기의 직관과 취향을 믿고 판단을 해야 한다. 나는 너무나도 좋다고 말하는데, 잘 알고 있는 동료는, 혹은 영화 기자분께서는 정말 못 참겠다고 30분 만에 뛰쳐나가기도 한다. 여기서 누가 맞냐고 물어보면 그건 틀린 질문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한편의 영화 안에서 서로 다른 것을 본 것이기 때문이다. 정말 여기서는 자기를 믿을 수밖에 없다. 지구상에서 처음 상영되는 영화들. 선택은 자기의 의지이고, 보고 난 다음의 판단은 전적으로 그 영화를 본 사람의 미적 경험에서 오는 것이다. 자기 눈으로 보고 난 다음에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달려와서 지금 본 영화 어떻게 보셨어요, 라는 모순된 질문을 받는 것은 칸에서 매일 벌어지는 일이다.

영화는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해서, 또는 함께 보았다고 해서, 정말 보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그건 다른 예술에서도 마차가지일 것이다. 영화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 대한 스크린이다. 그것이 예술인 것은 그 안에서 좀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는 사람도 최선을 다해서 보아야 한다. 최선의 의지. 그 안에서 세상으로부터 이탈하여 관념에 빠지지 않는 것. 그 최선의 의지를 갖고 영화를 사랑하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영화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최선의 세상에 대한 실천이 되는 것이다. 칸의 매일 아침은 나를 일깨우고, 그것은 그 안에서 영화를 통해 세상과 만나는 새로운 방법을 일깨우는 실천의 각성과의 만남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 부디 당신께서도 이 글에서 새로운 영화제목을 외우는 대신 새롭게 세상을 보는 방법을 함께 배우시기를! 그럴 때 비로소 우리는 함께 칸에 있는 것이다.

괴물 같은 영화로다

<도그빌>(Dogville) | 감독 라스 폰 트리에 | 경쟁부문

처음에는 다들 쉬어가는 소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어둠 속의 댄서>로 황금 종려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스 폰 트리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더 밀고 나아갔다. <도그빌>은 정말 끔직하고 잔인한 영화이다. 그래서 그 이야기만으로는 차마 볼 수가 없는 영화이다. 만일 이 이야기를 영화로 찍었다면, 나는 그냥 영화를 보다가 나왔을 것이다.

잠깐. <도그빌>이 영화가 아니라고? 그렇다.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은 연극 무대를 찍은 영화이다. 비유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연극이다. 영화는 모두 스튜디오를 빌린 텅 빈 무대에서 전개되며, 연극무대처럼 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어서 산과 계곡과 마을과 집을 표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 집에는 주인의 이름을 써놓았으며, 그 집안으로 들어갈 때에는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대고 문을 여는 시늉을 한다. 심지어 등장하는 개도 그냥 분필로 그려져서 그 위에 이름을 써놓았다. 모든 조명은 연극 무대조명을 사용하였으며, 모든 장면은 핸드헬드 카메라로 인물을 따라다닌다. 라스 폰 트리에는 <도그빌>이 “문학과 연극과 영화의 퓨전”이라고 불렀다. 신기하고 기괴한 영화, 잔인하고 슬픈 무대, 웅변적이고 서사적인 이야기. 라스 폰 트리에는 이 간단명료한 무대 위에서 배우들을 불러서 6주 만에 리허설을 거치듯이 영화를 완성했으며, 그들은 공연을 하듯이 연기를 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도그빌>은 라스 폰 트리에의 ‘USA 3부작’의 첫 번째 U에 해당하는 영화이다. 그가 <어둠 속의 댄서>를 만들었을 때 이 영화가 “미국에 가보지도 않고 만든 상상 속의 영화”라는 비판에 대해서 라스 폰 트리에는 진지하게 받아들였으며, 그의 대답은 단순했다. “아무도 카사블랑카에 가본 적이 없는데 <카사블랑카>를 만든 것은 문제가 되지 않으면서, 내 영화가 문제되는 것은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는 여전히 미국에 가본 적 없이 미국에 관한 3부작을 만들 것이라고 한다. 이미 두 번째 영화 <만달레이>의 시나리오가 끝났으며, 세 번째는 <워싱턴>이라는 제목만 결정되어 있다. 세편 모두 여자주인공은 그레이스가 될 것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니콜 키드먼이 모두 주인공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만달레이>는 라스 폰 트리에가 만들 것이지만, 세 번째 이야기는 (<셀레브레이션>을 만든) 토마스 빈터베르그가 연출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도그빌>은 그러한 라스 폰 트리에의 야심적인 첫 번째 이야기이다. 모두 9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매번 장이 시작하기 전에 벌어질 사건을 예고한다. 무대는 1930년대 로키 마운틴에 자리한 작은 마을 도그빌. 그 마을 사람들은 화목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그 마을에 한 여자가 찾아온다. 이름은 그레이스(니콜 키드먼). 아름답지만 수심에 가득 차 있고, 무언가 비밀이 있는 여자. 마음씨 착한 톰은 그녀를 도와주려고 마음먹는다. 이 낯선 여자에게 마을 사람들은 경계심을 품지만, 그녀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그 대신 그녀는 도그빌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 갱스터들에게 쫓기는 그녀에게 도그빌은 유일하게 행복한 마을이다. 그런데 그녀에게 일은 점점 더 많아지고, 그녀는 점점 더 노예로 전락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이 마을에도 경찰이 찾아와 그녀의 현상포스터가 붙고, 마을 사람들은 전전긍긍하기 시작한다. 그녀가 이 마을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된다고 마을 회의에서 결정한다. 그레이스는 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노예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 그래서 도망칠 결심을 하지만, 그녀의 계획은 그만 발각 당하고 만다. 붙들려온 그녀는 온 마을 사람들의 감시 속에서 목에 쇠로 된 개 목걸이를 하고, 어디로 가도 소리가 나는 방울을 달고, 질질 끌어야 하는 무거운 마차바퀴를 개 목걸이 끝에 매달아야만 한다. 낮에는 종일 여자들의 일을 해야 하고, 밤이면 남자들이 찾아와서 번갈아 그녀를 범한다. 아이들은 그녀를 개처럼 취급하고, 그녀는 개 목걸이를 하고 동네를 돌아다녀야 한다. 도그빌은 그녀의 지옥이 된다.

무려 2시간57분에 이르는 <도그빌>은 아주 완만하게 진행된다(칸에서 보여진 <도그빌>은 감독판이다. 당신이 이 영화를 볼 때에는 2시간20분으로 편집되어 있을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거의 멈춘 것처럼 이야기가 진행된다. 라스 폰 트리에는 등장인물들을 한명씩 차례로 소개하고 있으며, 첫 20분은 견디기 힘들다(그래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이야기. 이 영화의 시작 20분이 쥐약이다!). 하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영화-무대라고 부를 만한 이 낯선 미학의 세상 안으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장으로 나누어서 매번 줄거리를 내레이터가 소개하는 것은 브레히트의 서사극을 빌려온 것이며, 부분적으로는 유진 오닐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또는 라스 폰 트리에는 대사를 쓰면서 윌리엄 포크너를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게다가 이 동네의 거리 이름은 엘름 스트리트이다. 그건 웨스 크레이븐의 <(엘름 스트리트의) 나이트메어> 연작에 대한 오마주에 다름 아닐 것이다). 내레이션을 읽는 존 허트의 목소리는 마법을 거는 것 같으며, 니콜 키드먼, 벤 가자라, 로렌 바콜, 폴 베타니. 제임스 칸, 하리엣 앤더슨, 장 마르크-바, 우도 기어, 클로에 세비뉴의 연기 앙상블은 말 그대로 슈퍼 세션이다.

라스 폰 트리에는 영화적인 기교를 모두 포기하였으며, 말 그대로 모든 것을 연기에 집중시킨다. 그래서 와이드 스크린 사이즈는 영화적이라기보다는 연극무대적이며, 두 인물의 두 가지 상황, 혹은 두 가지 상황의 대비와 같은 두개의 무대를 보여주기 위해서 활용되고, 조명은 그때마다 연극무대라는 것을 드러내듯이 두개의 상황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연극적인 영화-무대 양식을 통해서 우리를 영화로부터 한 걸음 떼어놓지 않으면 정말 이 영화는 소름끼쳐서 볼 수 없을 것이다. 특히 도망치려다 붙들려온 그레이스에게 온 마을 사람들이 친절한 목소리로 걱정스럽다는 듯이 말하면서 차례로 윤간하는 대목에 이르면 정말 영화는 목불인견의 지경에 이르고야 만다. 오히려 이 영화는 브레히트적이라기보다는 잔혹극에 가까우며, 라스 폰 트리에는 제발 멈춰주었으면 하는 데서 시작해서 점점 더 지옥으로 끌고 가고야 만다.

어쩌면 <도그빌>은 라스 폰 트리에의 (가장 훌륭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장 잔인한 영화이다(<브레이킹 더 웨이브>보다 더!). 그래서 보는 사람을 녹다운시킨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심을 거두지 못하게 만든다(혹시 격앙된 감정이 가져온 흥분은 아니었을까? 정말 영화-무대라는 라스 폰 트리에의 새로운 미학은 성립되는가? 또는 라스 폰 트리에가 미국의 역사를 다루는 방법은 하나의 태도가 될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도그빌>은 라스 폰 트리에가 칼 드레이어의 나라에서 온 시네아스트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상하게도 이 잔인한 영화에 종교적인 그림자가 떠돌고 있으며, 동시에 잔인함 속에서 인간성의 문제에 대해서 성찰하게 만든다.

정말로 <도그빌>은 휴머니즘에 대한 의문의 제기이다. 결국 라스 폰 트리에는 모든 인간에게 실망한다. 학대한 자들의 인간성에 대해서 분노하면서, 동시에 학대당한 자의 증오에 대해서도, 그 인간성에 대해서 포기한다. 여기에는 그 어떤 용서도 없다. <도그빌>의 마지막 장면은 그레이스의 복수이다. 그런데 그녀의 복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절멸로 끝장을 낸다. 애인도 죽이고, 어른들도 죽이고, 어른들이 없으면 아이들이 불쌍하게 될 것이라면서 아이들도 죽이고, 아이들이 없으면 저 불쌍한 개는 누가 밥을 주냐면서 개도 죽인다. 여기에는 이상하게도 홀로코스트의 그림자가 있다(그레이스는 중얼거린다. “도그빌 마을 사람들은 세상에 없는 편이 훨씬 좋은 일이에요”). 또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종교적인 가르침이 드리워진다. 이중 삼중으로 역사의 그림자가 역사없는 땅 USA 3부작의 첫 번째 영화에 내려앉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이상한 아이러니의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라스 폰 트리에는 점점 더 위험해진다. 미학적으로 위험하지만(어디까지가 영화인가? 혹은 영화적인 표현을 스스로 할 수 없도록 제한을 걸면서 할 수 있는 영화는 어디까지인가?), 동시에 그가 다루는 세상의 형상도 온통 자기파괴적인 모습에 매달리면서 점점 부서져간다. 라스 폰 트리에의 영화는 점점 더 괴물이 되어간다. 그의 다음 영화를 보는 것이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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