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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칸 리포트,두 보고서 [1]
2003-05-30

우정과 반미 사이, 미국은 광분, 프랑스는 으쓱

칸을 뜨겁게 달군 사건과 사람들, 칸의 명불허전 4장면+α

칸=글 박은영·사진 정진환·취재지원 성지혜

밤마다 레드 카펫 세리머니가 펼쳐지는 뤼미에르 극장 앞에는 이른 저녁부터 스타들을 보기 위해 몰려든 인파로 북적댄다. 귀족처럼 차려입은 선남선녀들이 반짝거리는 초대장을 들고 극장 속으로 사라질 무렵, 크로와제트 거리엔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프레스센터가 들어선 팔레 드 페스티벌 앞에는 오가는 기자들을 붙잡고 초대장을 간청하는 순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분주해진다. 영화제에서 ‘버린 자식’ 취급하는 감독 주간의 메인 상영관 노가 힐튼엔 객석은 물론 무대에도 드레스나 턱시도가 없다. 반바지와 슬리퍼 차림의 감독은 스탭과 배우들을 불러올려 함께 인사하고, 관객은 요란한 박수와 환호로 화답한다. B급호러로 유명한 프로덕션 트로마는 올해도 그 유명한, 음란하고 무례한 게릴라식 홍보전을 감행하고 있다. 늘 존재해왔던 칸의 변두리를 올해 갑자기 두리번거리게 된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먹음직스럽지 않은 메인 디시를 그냥 물려버리고 싶은 충동, 반발심, 그런 거였던 것 같다.

그래도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 보람이 있었다. 영화제 중반을 넘기면서, 흥미롭고 신선한 작품들이 속속 눈에 띄기 시작했다. 현재까지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마>와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가 기대를 뛰어넘는 수작으로 판명됐고, ‘의외의 복병’ 드니 아르캉의 <야만족의 침략>은 일반 시사에서 10여분의 기립박수를 이끌어내며, “상을 받아야 할 작품”이라는 여론을 조성하고 있다. 관심을 모았던 구로사와 기요시의 <밝은 미래>와 로우예의 <자주빛 나비> 등의 아시아영화들은 그다지 큰 임팩트를 남기지 못하고 있다. 그동안 크로와제트 거리에선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브리핑을 이제 시작한다.

우리는 미국이 싫다 - 반미영화, 반미 발언

올해 칸영화제의 비공식적인 슬로건이 혹시 ‘안티-아메리카’는 아닐까. 당초 특별한 경향이 없는 듯 보였던 올 상영작들 사이에서 심심찮게 반미 소재와 반미 발언을 접하게 된다. 집행위원장까지 나서서 “우리와 할리우드의 우정은 변함없다”는 등의 발언까지 했기 때문에 한풀 의심을 죽였던 미국 기자들의 당황스런 항의와 불만이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다.

문제는 그런 작품들이 상당한 수준의 걸작이며 화제작이란 사실이다. <미제국의 몰락>이라는 영화에서 이미 신랄하게 미국을 비판한 바 있는 캐나다 감독 드니 아르캉은 보란 듯이 그때의 출연진을 그대로 불러모아 속편격인 <야만족의 침략>을 선보였다. 불치병에 걸린 좌파 교수가 옛 친구들과 애인들, 아내, 아들과 생의 마지막을 함께한다는 내용의 이 영화는 지적인 유머와 감동적인 결말로 평단은 물론 관객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제목인 ‘야만족의 침략’은 9·11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뭐니뭐니해도, 반미영화의 백미는 라스 폰 트리에의 <도그빌>이다. 이 영화를 ‘미국’ 3부작의 1부로 소개한 그는 자신이 영화 속에서 그린 이야기가 미국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지만, 자신의 지식과 직관이 알려준 미국의 이미지라고 말해, 미국 기자들의 공격을 받았다.

칸영화제가 키운 스타감독 사미라 마흐말바프는 탈레반 이후의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한 <오후 5시>를 내놓았다. 영화에선 직접적으로 미국을 걸고 넘어지지 않지만, 기자회견장에서 이라크전에 대한 견해를 묻는 질문이 쏟아져나오자, 격앙된 목소리로 “부시가 곧 탈레반이다”라는 과감한 발언을 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반면 구스 반 산트의 <엘리펀트>는 주관과 해석을 배제한 콜럼바인 총격사건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미국인들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그는 마이클 무어가 그랬듯이 그 모든 책임을 미국사회와 정부에 돌리지 않고, 다만 슬프도록 아름다운 이미지로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공론화시키고 싶지 않은 미국인들은 프랑스 평단만큼 <엘리펀트>에 열광하지 않는다. 어떤 관점도 해석도 없다는 것이 비난의 요지다.

프랑스 체면 살린 젊은 인재들- 실벵 쇼메, 베르트랑 보넬로, 알랭 기로디

개막 이전부터 칸영화제는 구설수에 올랐다. 경쟁부문에 6편의 프랑스영화를 진출시킨 것을 비롯, 자국영화에 대한 편애와 배려가 너무 지나치다는 얘기였다. 영화의 면면만이 진실을 가려줄 것인데, 유감스럽게도 영화제가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돌아보면, 그간의 의혹은 사실로 판명되고 있다. 다만 (적어도 프랑스 밖에선) 기대하지 않았던 몇몇 젊은 감독들이 놀라운 재능을 선보여 홈그라운드의 체면을 살려주고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 같다.

장편 데뷔작으로, 그리고 애니메이션으로 비경쟁 부문에서 상영돼 화제를 모은 실벵 쇼메의 <벨빌의 삼총사>는 매우 독창적이고 프랑스적인 작품이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경륜 선수가 ‘할리푸드’의 악당들에게 납치돼 도박장에서 착취당하자, 할머니와 애완견 브루노, 그리고 왕년의 보드빌 스타인 ‘할머니 삼총사’가 구출 작전에 나선다는 이야기. 그림책 삽화처럼 평면적이고 생략과 과장이 심한 비주얼은 하이퍼리얼리즘을 표방하는 3D CG애니메이션에 경도된 관객에게 따뜻한 향수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뮤지컬, 코미디, 액션,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를 독특한 상상력과 몽환적 영상으로 아우르고 있는 실벵 쇼메는 애니메이션계의 장 피에르 주네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 번째 장편 <티레시아>로 경쟁부문에 진출한 베르트랑 보넬로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지만, 전작 <포르노그라피>가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소개돼, 현지에선 크게 주목받은 인물이다. <티레시아>는 남자에서 여자로, 다시 남자로 변해갔다는 티레시아의 신화를, 프랑스에 불법 이민온 브라질 국적의 트랜스젠더의 사랑과 배신, 삶과 죽음의 이야기 속에 녹여내고 있다. 강렬하고 충격적인, 무엇보다 창의적인 작품. 취재단 사이에서도, 평자들 사이에서도 호오가 크게 엇갈리는 이 작품을 <르몽드>는 “경쟁부문에 오른 프랑스영화 중에서 가장 신선하고 가장 독창적인 선택”이라고 지지하고 나섰다.

감독주간에 장편 데뷔작 <휴식 없는 용감한 사람들>을 선보인 알랭 기로디는 이미 두편의 중편으로 ‘21세기 프랑스에 등장한 가장 독특한 감독’으로 기대를 모았던 인물이다. 그의 두 번째 중편 <떠도는 옛 꿈>은 당시 장 뤽 고다르가 “그해 칸영화제 초대작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특별 언급했던 작품. 그 덕에 알랭 기로디는 장편 데뷔의 기회를 잡았고, <휴식 없는 용감한 사람들>을 내놓게 됐다. 프랑스 시골 백수건달의 꿈과 현실을 코믹하게 뒤섞어 보인 이 작품은 현지 평단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진 못했지만, 특유의 유머와 리듬이 돋보여, 상영 당시 좋은 반응을 얻어 냈고, <리베라시옹>의 ‘칸의 발견’ 리스트에 올랐다.

걸어다니는 스캔들 - 문제작 <브라운 바니>의 문제 감독 빈센트 갈로

애정결핍으로 자기혐오에 빠진 남자의 쓸쓸하고 귀여운 고백 <버팔로 66>으로 감독으로서의 재능을 인정받은 빈센트 갈로는 두 번째 영화 <브라운 바니>로 막바로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뚜껑을 열기 전부터 퍼져 있던 소문은 오럴 섹스신이 ‘매우 야하다’는 것과 지난해 <돌이킬 수 없는>에 이은 스캔들이 될 거라는 내용이었다.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는 듯 많은 이들이 시사장에 몰려들었다. 결과는? 사건다운 사건을 만나기 위해 무려 1시간 반 동안 빈센트 갈로(감독이자 주연배우)의 운전석에서 하품을 하고 있던 관객은 엔딩 크레딧이 오르자 야유를 보냈다. 경쟁작의 평점을 매기는 <스크린 인터내셔널>은 “조니 뎁의 <브레이브>와 마티외 카소비츠의 <암살자(들)>에 이은 최악의 성적”인 0.6점(4점 만점)을 그야말로 ‘적선’했다. <브라운 바니>는 그러나, 최악 운운할 만큼 형편없는 영화는 아니다. 빈센트 갈로의 자아도취적인 여행길과 대단히 전형적인 엔딩신을 견딘다면, 이 영화는 처절하고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로 다가갈 수 것이다.

재미난 건 시사회장의 분위기와는 정반대로 기자회견장이 붐볐고 화기애애했다는 사실이다. 빈센트 갈로는 말조심이라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세상에서 가장 솔직한 기자회견’으로 이끌어갔다. 누군가 오럴섹스신에 노출된 성기가 진짜냐고 묻자 그는 “깊은 인상을 받은 모양인데, 고맙다”며 장난스럽게 눙쳤다. <버팔로 66>의 성공 이후에 그보다 덜 대중적인 영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서는 “어렸을 때부터 잘 드러나지 않는 아이였고, 그런 무명성이 편하다”면서, “나는 대런 애로노프스키나 웨스 앤더슨 같지 않다”고 쏘아붙였다. 그는 미국 인디영화계에 대한 깊은 실망과 경멸을 숨기지 않았다. 어려서 학교를 그만두고 바스키아 등과 어울리며 그림과 음악에 심취했던 그는 “내 평생 책을 읽어본 적이 없다. 부분적으로는 읽어 봤지만. 나는 시나리오도 읽지 않는다”고 고백했다. 또한 주연 여배우인 클로에 셰비니에게 오래 연정을 품었다면서 그녀의 연기와 태도를 칭찬한 반면, 이 작품에 합류할 뻔했던 위노나 라이더와 커스틴 던스트를 비난했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는 배우나 스탭들과는 작업하지 않겠다는 것. 방어적이고 냉소적인 수다쟁이 빈센트 갈로는 회견이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사인 공세에 시달렸다.

이창동 장관이 신상옥 감독을 만났을 때영화사도 복원할 수 있기를

“저는 이 분과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이 분이 한국 최초의 종합 스튜디오를 만드셨는데, 제가 그 앞 군부대에서 복무했습니다.” 비평가주간에 특별 초청된 감독으로서, 문화부 장관으로서 칸을 찾은 이창동 감독/장관(이곳에서 그의 별명은 ‘무슈 쿼터’다)이 <상록수>의 복원판 상영에 앞서 신상옥 감독을 소개하면서 한 말이다. 그는 “찰리 채플린도 정치적으로 많은 박해를 받은 영화인이지만, 이 분들처럼 적극적으로 사선을 넘으면서 저항하진 않았다”며, 신상옥-최은희 부부의 영화 인생에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 복원 상영이 그간 끊어지거나 상실된 영화의 역사까지 이어주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소망했다. 기대하지 않았던 이창동 장관의 참석, 따뜻한 소개에 신상옥 감독은 흐뭇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영화제 회고전의 일환이었던 복원판 상영에서 신상옥 감독은 루이스 브뉘엘 등과 더불어 대표작 1편을 선택하게 됐는데, 그 작품이 바로 1961년작 <상록수>다. 회고전 초대가 결정된 2년 전 당시에는 <연산군>을 5시간에서 3시간으로 재편집해 상영하기로 했었지만,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로 올 초 <상록수>로 바꾸게 됐다. 심훈의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상록수>는 남녀주인공의 잔잔한 로맨스를 따라가면서, 사회 계몽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데, “오락성도 있고 사회성도 있기 때문에 반응이 좋았다”는 것이 신상옥 감독의 회고. 이날 <상록수> 상영에는 신상옥 감독의 마니아를 자처하는 현지 관객이 참석해, 진지한 분위기에서 관람했다.

신상옥 감독은 칸영화제와 인연이 깊은 편이다. 집행위원장 질 자콥이나 영화제 어드바이저 피에르 리시앙이 신 감독의 대표적인 지지자들이다. 신상옥 감독은 지난 94년엔 심사위원으로 칸에 초대됐고, <증발>을 ‘깜짝상영’한 바 있다. 그는 다시 찾은 칸영화제에 대한 인상을 “지나치게 예술적인 작품들을 선택하고 또 소개하는 것 같다”면서, “유럽 예술영화들을 제치는 건 별로 어려울 것 같지 않다”고 자신감을 드러냈다. 신상옥 감독은 더 늦기 전에 칸영화제에 다시 작품을 들고와야겠다고 했는데, 특별히 “칭기즈칸 얘기를 한번 찍어보고 싶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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