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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포럼(indie forum) 2003 [3]
문석 2003-05-30

‘선전’에서 ‘소통’으로, 코드를 변경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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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연해진 매체, 다큐멘터리 5편

다큐멘터리는 그동안 ‘강박증’을 앓아왔다. 90년대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극영화와 짐을 나눠가졌지만, 그 이후에는 ‘역사와 사회’라는 장벽을 혼자 짊어져야 했기 때문에 더욱 그랬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올해 인디포럼에서 상영되는 다큐멘터리 13편은 일종의 전회(轉回)처럼 보인다. 소재나 주제가 다양해졌을 뿐 아니라 접근방식의 스펙트럼 또한 매우 넓어졌다. 일방적인 프로파간다 대신 쌍방향의 소통방식을 구하려는 노력이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 김기진, 정찬철/ 16mm/ 컬러/ 45분/ 2003년

일류대에 다니는 아들을 둔 모범 가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버스기사, 카메라를 흘깃거리며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거냐”고 묻는 심드렁한 대학교수, 실연이라도 당한 것인지 담배연기만 날려대는 군인, 카메라를 등지고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생선가게 아주머니 등이 연이어 등장한다. 100피트의 필름 15롤을 사용하여 다양한 직업을 가진 15인에게 “당신은 누구십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다음, 낚아올려진 반응들을 줄줄이 담은 독특한 주제와 형식의 다큐멘터리. “말할 수 없다”는 침묵과 “나는 나다”라는 동어반복의 답변이 번갈아 계속되는 동안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라는 반문이 떠오른다. 언어로의 편입을 거부하는 존재의 몸짓이 느껴지는 작품. 인디포럼 2003 폐막작이기도 하다.

<나와 부엉이> | 박경태/ DV6mm/ 컬러/ 84분/ 2003년

전쟁 고아로 태어나 배고픔 때문에 1만5천원을 받고 기지촌에 자신의 몸을 묻어버린 여인.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서 미국 땅을 밟았지만 이내 미군이었던 남편의 폭력과 외도에 질려 귀향을 택한 여인, 오십이 넘었지만 알코올에 절어 비가 오는 날에도 문 밖에서 달러를 기다리는 여인. 이들을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두레방에서 미술작업을 하며 재활의지를 다지지만, 신경증처럼 도지는 유혹의 손길에 괴로워하는 기지촌 여인들의 ‘낮은 목소리’를 담았다. 카메라가 클로즈업한 이들의 그림에서 악몽 같은 50년 세월의 흔적이 스치고, 그럼에도 아직 생기를 잃지 않은 희망들이 반짝일 때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기지촌에 흘러든 필리핀, 러시아 여인들과 그림을 ‘나누는’ 후반부의 장면도 가슴 훈훈해지는 대목.

<당신은 누구십니까?>

<각하의 만수무강>

<각하의 만수무강> | 김경만/ DV6mm/ 흑백/ 13분/ 2002년

이 남자, 이상하다. 매일 생일잔치를 벌이는 이 남자, 뭔가 수상하지 않은가. 공보처에서 제작된 정부선전영화 대한뉴스를 편집해 만든 이 다큐멘터리는 ‘한방’을 지니고 있다. ‘탄신기념일’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붙여 연일 음악회, 백일장, 의장대 사열 등의 행사를 치르는 이승만 정권의 행적을 통해 1인독재하에서만 벌어지는 해프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 “오늘도 강아지 해피를 애무하시며 일정을 시작하신” 남한의 영도자 이승만 대통령의 만수무강이 국가 안녕의 근간이라는 발언이 나올 때쯤이면 폭소를 참기 어렵다.

<침묵의 외침> | 안해룡, 박영임, 김정민우/ DV6mm/ 컬러/ 15분/ 2003년

2차 세계대전 중 종군위안부로 끌려갔던 여성들의 술회가 고정된 흑백사진 위로 흘러나오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터뷰어들의 답변은 종종 침묵에 의해 중지되곤 하는데, 오히려 흑백사진 위에 침묵이 드리워진 그 순간에 보는 이는 역사에 질문을 던지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침묵은 곧 은폐된 역사의 상흔을 캐달라는 무언의 요구인 셈이다.

<My Sweet Record> | 박효진/ DV6mm/ 컬러/ 7분26초/ 2002년

혹시 그 사람의 안경테가 어른거리나요? 잊어야 하는데, 그 사람의 까칠한 수염이 아직도 뇌리에서 삐죽삐죽 솟아난다고요? 그럼, 카메라를 드십시오! 단번에 해결됩니다. 자신이 한때 좋아했던 선배를 인터뷰하면서 느끼는 자신의 감정변화를 솔직하게 영상에 옮겼다. 인터뷰가 진행되는 동안 “보고 싶었다” 등의 마음속 독백이 자막으로 삽입되는데 그 횟수와 속도가 카메라를 든 사람의 맥박처럼 느껴질 정도다. 이영진 anti@hani.co.kr

야마가타 다큐일본, 새로운 기록선언!

야마가타플러스영화제에서 상영된 4편의 작품이 초청 형식으로 선보인다. 오정훈 프로그래머는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틀 안에 사회적인 이슈들을 끌어들여 결합한 작품들을 중심으로 프로그램을 구성했다”고 말한다. <Diologue 1999>(이노우에 아키코/ 16mm/ 38분/ 2000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과 릴레이 인터뷰를 통해 오해가 발생하는 지점은 어디고, 소통의 조건은 또한 무엇인지를 고찰한다. <이제, 어디로, 가지?>(시라가와 도시히로/ 베타/ 43분/ 2001년)는 부모님의 기억에만 남아 있는 과거의 흔적들을 찾아나서는 다큐멘터리. 흔히 쓰이는 연대기적 구성 대신 과거와 현재를 자유롭게 오가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시미즈 히로유키/ DV6mm/ 22분/ 2001년)는 역사교과서을 둘러싸고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이견을 보이는 상황을 만화적인 형식을 빌려 위트있게 그려낸 작품. (쓰치야 유타카/ DV6mm/ 3분/ 2002년)는 9·11 사태 이후 미디어와 수용자와의 관계를 그래픽을 이용해 짧은 시간 안에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다큐멘터리다.

악몽을 유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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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한 단편 애니메이션의 상상력 놀이 4편

‘디즈니’로 기호화된 애니메이션의 세계는 안전하게 즐길 수 있는 모험의 영역이다. 현실과 부딪혀서 만들어내는 모험이 아니기 때문에 안전한 세계다. 지난해보다 3편이 줄어든 9편의 애니메이션 상영작이 보여주는 주된 경향은 불안 혹은 공포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세상이 안전할 리 없겠으나 이들은 왜 이다지도 현기증을 느끼는가. 그것도 상상력으로 맘껏 놀아볼 수 있는 애니메이션 장르에서. 이들의 시선은 여전히 알 수 없는 자신이란 존재, 그리고 늘 위협적인 외부를 동시에 응시하고 있다. 공포스런 대상을 놀잇감으로 만들어 또 다른 공포로 주조해내는 과정에서 어떤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듯 보인다. 완성도가 유난히 돋보이는 두편의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이나 2D애니메이션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지옥>은 공히 악몽의 판타지다. 그런데 그 악몽이 생생한 현실감으로 다가온다.

<지옥> | 연상호 / DV6mm/ 컬러/ 11분/ 2002년/ 2D애니메이션

첫 장면부터 심상치않다. 커다란 하수구에 쥐 한 마리가 서성인다. 갑자기 그 쥐를 낚아챈 안경 쓴 사내. 산 채로 씹어먹기 시작한다. 그의 입가에 시뻘건 피가 번져간다. 회사와 집을 오가며 단조롭게 살던 그는 지금 도망 중이다. 자신의 운명으로부터. 천사가 불쑥 나타나 예언을 했다. 넌 곧 지옥에 가게 된다고. 저승사자들을 피해 달아나던 그는 자신을 괴롭히던 직장 상사와 마주쳤다. 그 역시 천사의 예언을 받았다. 순식간에 저승사자들에게 붙잡힌 그의 눈앞에서 상사의 몸 거죽이 산 채로 뜯겨진다. 몸서리쳐지도록 공포스런 순간, 다시 천사가 나타났다. 도망가다 붙잡히면 더 끔찍한 고통을 받게될 텐데 그래도 도망가겠느냐고. 그는 정말로 탈출할 수 있을까?

누구도 죽음을 피해갈 수 없다.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전율감을 일으키는 작품이다(사실 이 작품에서 딱히 죽음이 공포의 원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단촐한 2D애니메이션 기술을 쓰고 있지만 플래시백, 점프컷 등을 효과적으로 쓰는 연출이나 압축적이면서도 효과적인 이야기 구성이 뛰어나다.

<지옥>

<Touch me not>

<Touch me not> | 임의균/ BETA/ 컬러/ 8분/ 2003년/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염상섭의 소설 <표본실의 청개구리>에서 몸을 난도질당하는 청개구리는 인간의 처지와 다를 게 없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해부대 위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개구리는 인간보다 차라리 나아 보인다. 하체도 내장도 없는 인간 형상의 인형이 개구리의 배를 갈라 내장을 집어들더니 자신이 필요로 하는 기관들로 취해버린다. 정작 인형은 생명을 얻기는커녕 거미줄만 뒤집어쓴다. 더욱 으스스해지는 공간. 갑자기 얼기설기 꿰매놓은 개구리의 뱃속에서 백합 한 송이가 곱게 솟아난다. 이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에서 확정적인 해석을 해내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풍부하고도 깊은 이미지 하나만으로 오감을 옥죄고 들어온다. 해석은 그 다음이다.

<The Newspaper> | 방의석, 권택화/ 35mm/ 컬러/ 10분/ 2003년/ 스톱모션애니메이션

스톱모션애니메이션의 걸작 <월레스와 그로밋>은 박장대소할 유머감각에다 음험한 스릴러적 전개, 그리고 속도감 넘치는 액션으로 실사영화를 빰쳤다. 그 특징들이 잘 살아난 작품이다. 마감 25분 전의 <시티 타임스> 편집장실. ‘우리의 영웅’이란 1면톱 사진 위로 바퀴벌레 한 마리가 기어오른다. ‘살인자’를 다룬 하단기사의 사진 밑에서 기어나온 놈이다. 신문에서 걸어나온 ‘영웅’이 얼굴에 붙어 있는 바퀴벌레 때문에 기겁을 하는데 다른 놈들이 우르르 덤벼든다. 잠시 쫓고 쫓기는 추격전. 언뜻 영웅이 승리한 듯 보인다. 그런데 다음날 곳곳에 배달된 신문에는…. 비유컨대 편집장은 바퀴벌레다. 진실을 멋대로 뒤바꿔 조작을 일삼는 언론의 한 단면이다. 유쾌한 상상력이나 섬뜩한 현실과 무관한 건 아니다.

<The Newspaper>

<이상한 나라>

<이상한 나라> | 한병아/ 베타/ 컬러/ 8분/ 2002년/ 2D애니메이션

동양적으로 생긴 아담과 이브가 재밌게 살고 있다. 이브가 갑자기 한마디 한다. “개미가 네 고추 속으로 들어간다.” 고추를 놓고 장난치듯 놀고 있던 그들에게 뱀이 나타난다. “알몸은 부끄러운 거야.” 그뒤 아담과 이브는 권력화되고 화석화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됐다. 시간이 흘러 아이는 옷입는 걸 거부한다. 옷을 벗고 있으면 좋은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뱀과 아버지가 위협하거나 타일러도 소용없다.

직유법처럼 주제의식을 드러내고 있지만 지루할 틈이 없다. 유머도 유머지만 컷마다 질감 풍부하게 그려진 배경이 한폭의 그림 같다. 화려한 이미지와 단조롭게 느껴질 만큼 억눌린 기색이 없는 밝은 의식이 오히려 돋보인다.이성욱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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