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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풍‥>에서 <똑바로‥>까지,`작가` PD 김병욱 론 [4]

"내가 형으로 보이니" 하고 놀다가 동생이 정서불안이 됐어요김병욱 PD와의 사소한 12문 12답

월요일 오후 4시. 김병욱 PD는 언제나처럼 수줍은 자세로 등장했다. 하지만 주말 내내 <똑바로 살아라> 녹화테이프를 복습하며 감동과 폭소로 고양된 기자의 눈에는 그의 머리 뒤로 위인의 후광이 보이는 것 같았다. 자신감 같은 것은 웬만해서 키우지 않는 김병욱 PD는 영화를 고급 요리에, 자기가 만드는 시트콤을 패스트푸드에 비유하는 버릇이 있다. 이날도 다르지 않았다. “호텔 요리를 감식하던 미식가들이 우연히 길에서 떡볶이를 한번 먹어보고 맛있어서 진지하게 조리법을 캐묻는데 해줄 말이 없어서 더듬는 포장마차 할머니의 심정”이라고 난처해하는 김병욱 PD에게 우리는 한사코 시시콜콜한 질문을 던졌다. 그의 답변 중 다수가 “그래서 이젠 정말 그만 만들려고요” 하는 한탄으로 끝나긴 했지만, 우리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린 시절이 궁금합니다. 가족끼리 모여서 게임하면서 놀았어요. 그것도 1부터 20까지 왼 다음에 맞힌다거나 그냥 우리끼리 규칙을 만들어서 하는 특이한 게임이오. 3남1녀 중에 내가 셋째인데, 누나와 형이 자라 서울로 유학간 뒤로는 동생이 많이 불행해졌죠. 집에 아무도 없으면 “내가 형으로 보이니?” 하면서 너무 괴롭혀 갖고 아주 심약한 아이가 됐어요. 지금은 미국 가서 정상적 생활을 하고 있지만. 누나와 형이 없어지니까 동생과도 7살이나 터울이 져서 혼자 하는 게임을 계발해서 놀았어요. 예전에 노주현씨가 벽에다 공차면서 혼자서 조 짜서 하는 월드컵 토너먼트도 제가 하던 놀이예요.

식구나 친구들을 겁주거나 웃기는 일을 좋아했나요? 친구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내가 다니던 경주고 교사였는데 그래선지 애들도 선생님들도 나를 건드리지 않았죠. 묘하게 사람들과 섞이지 않고 살아왔어요. 고향인 경주만 해도 경상도의 일반적 공기와 달리 거친 데가 없는 고장이라 신고식 같은 걸 해도 “전 술 잘 못 마셔요” 하면 “아, 그래? 얘는 술 못 마신단다” 하고 넘어가고, 사람들이 참 양순해요. 바깥 생활 별로 안 하고 살아온 제게 시트콤은 공간적으로 딱 좋았어요. 집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자신있었거든요. 혼자 노는 사람은 과대망상이 있게 마련이니 심리를 다루는 것도 좋았고. 난 미국 로케가는 <올인> 같은 프로는 시켜도 못해요. 입도 짧아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직업 묘사도 그래서 절름발이죠. 잘 모르니까. 며칠 전에도 게임방 주인이 전화했어요. 10시 이후에는 미성년자 안 받는데 잘못 나왔다고.

김 병 욱 P D 약 력

1961년 경주 출생

1986년 MBC 라디오국 입사

1991년 SBS 예능국 입사

1993년 <젊은 인생>

1995년 <LA아리랑>

1997년 SBS 퇴사, 독립

1998년 <순풍 산부인과>

2000년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

2002년 <똑바로 살아라>

“농담도 잘하셔!”라는 소리를 듣는 편이었나요? 아뇨. <순풍 산부인과>에서 반장이 된 영규가 동네를 굽어보며 독백하는 장면처럼, 난 심각한데 남들 보기엔 코미디가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순풍 산부인과>도 사실 냉소의 코미디예요. 파티가 열릴 때 잘 노는 사람 뒤에 서서 어색해하는 사람의 코미디. 그걸 서민적이라고 받아들이는데 실제로는 아웃사이더의 코미디죠. 송창의 선배(<세 친구> <연인들> 연출)의 작품처럼 주류에서 잘 노는 폭발력 있는 코미디가 아니라 잘 노는 사람 곁에 뻘쭘하게 앉아 있는 애가 생각할 만한. 제목에도 냉소가 있어요. 보통은 <아무도 못말려> <절대로 못말려>처럼 강렬한 제목을 권하는데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하면, 웬만하지 않으면 막을 수 있다는 얘기잖아요? 도무지 힘이 없어요.

커서 무엇이 되겠다는 목표가 있었나요? 지금도 병인데, 오로지 빨리 은둔하고 싶다는 욕망뿐인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는 왜 그리 장래가 불안했는지 인생 자체가 흔들렸어요. 지금까지 우울했으니 미래도 별로 안 좋을 것 같고, 집이 잘사는 게 아니니 이른바 출세를 해야 하는데 그런 데 매달리려는 자신이 한심하기도 하고. 야간 자율학습 3시간 중 1시간 반 동안 뭘 하냐면 “그래 병욱아, 지금은 공부만 열심히 하자. 대학을 일단 가서 나머지는 생각하자”라고 다짐을 해요. 그런데 다짐 끝나고 공부 시작하려고 하면 10분 쉬는 시간이 돼요. 쉬고 나면 또 새로 다짐을 해야 하는데. 학창 시절 참 어두웠는데 어디 줄지어 앉는 게 싫어서였어요. 지금도 민방위 훈련 가면 싫어요. 혼자 놓아두거나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두면 일을 잘하는데. 학교도 독학 검정고시 출신이나 마찬가지예요. 수업시간에는 낙서만 하다가 집에 와서 혼자 하면 잘돼요. 낙서하면서 들은 몇 마디는 기억나니까 아아 이런 말을 한 거구나 하면서 공부했죠.

방송사 생활은 라디오 PD로 시작했지요? 성격이 소극적이다 보니까. 선배들은 라디오에서 오디오를 익히고 TV로 옮긴 다음 독립해서 영화로 진출할 거라고 인생 설계 치밀하다고 말하는데, 사실은 모든 걸 피하려다 이렇게 된 거예요. 날 괴롭히는 선배를 피하고 좀더 자유롭게 근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TV로 옮겼더니 시청률이 압박하고, 승진하고 부장 되고 하는 일이 겁나서 독립했더니 더 심한 경쟁의 첨단이고.

그럼, 예능 PD는 스스로 선택했나요? 교양이나 드라마는 장기 출장이 많은데, 아마존 가서 한달 지내거나 하는 일은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당시 지식의 척도는 일본 프로그램을 얼마나 아느냐였고 PD들의 회의도 일본 프로 테이프를 30개쯤 쌓아놓고 이번에 비트 다케시 나온 거 봤냐 하면서 이야기하는 거였는데 난 대안도 없으면서 그런 게 그저 불만스러웠어요. 결국 주류 프로그램에서 안 받아주는 아웃사이더들, 장진, 장항준 같은 친구들과 어울려서 우리끼리 즐거워하며 <좋은 친구들>을 만들었어요. 반응이 좋으니까 회사에서 일요일 7시대로 보냈는데 아이디어만 좋고 스타 섭외가 안 되어서 두달 만에 망했죠.

시트콤이라는 장르에 대해 언제부터 고민하게 됐나요? <LA아리랑> 중간에 주병대 선배가 그만두고 혼자 연출을 맡게 됐는데 어떻게 다르게 해야 할까 고민이 됐어요. 당시 아이템은 주로 소동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거였어요. 집안에서 물건이 바뀌고, 식구 욕을 하는데 뒤에서 나타나고, 이불 덮고 있으면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식이었죠. 그런데 200회가 넘어가니까 소동에 한계가 생겨요. 그맘때 미국에 연수를 가서 시트콤 녹화장면, 제작회의를 보고 TV에서 방영되는 시트콤도 많이 봤는데,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캐릭터였어요. 이 사람이 몇살 때 뭘 했다는 식으로 자세한 개인사 연표까지 있더라고요. 우리는 캐릭터를 너무 이상하게 만들어서 탈인데- 화가 나면 창을 한다든지- 말을 보통처럼 하더라도 세상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의 캐릭터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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