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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타협을 모른다,<R.Type 파이널>
권은주 2003-07-10

‘혁명이 예고되던’ 1980년대 후반, 어두운 오락실 한편에 지금까지의 슈팅 게임과 비슷하면서도 어딘지 다른 게임 하나가 자리잡았다. 그 게임의 이름은 <R TYPE>다. 흔하디 흔한 종스크롤 슈팅 게임이지만 게이머의 접근을 쉽게 허용하지 않는 난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낯섦을 일단 극복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오히려 미친 듯 불타오른다.

<R TYPE>의 적은 남달랐다. 다른 슈팅 게임에서는 적이 미친 듯이 총알을 난사해 도망갈 길을 봉쇄하거나 아니면 화면을 반 이상 가리는 덩치로 게이머를 위압한다. 이 게임은 압도적인 무력을 내세워 정면 승부를 걸어오지 않는다. ‘다관절 보스’라고 불리던 보스는 유연함으로 게이머를 위협했다. 적의 관절은 계속 조금씩 늘어난다. 그리고 언제 어디서 꺾여 들어와 앞에서, 혹은 뒤에서, 때로는 옆에서 치고 들어올지 모른다. 한 방향에서, 한 가지 작전으로 공격해서는 이길 수 없다. 적의 유연함에 맞서 이쪽도 수시로 공략 방법을 바꿔야 한다. 슈팅 게임의 보스라면 흔히 그렇듯, 이 게임에도 ‘약한 고리’라는 게 있다. 하지만 끊임없이 변하고 이동한다. 이를 계속 찾아내서 매번 새롭게 대처하지 못한다면 결코 ‘R 타이퍼’가 될 수 없다.

유연함이 적의 특기라면 게이머쪽에는 ‘모아쏘기’가 있다. 이 또한 <R TYPE>의 매력이다. 다른 게임에는 전멸 폭탄이 있다. 제한된 숫자긴 하지만 사용했다 하면 화면의 적들을 모두 쓸어버릴 수 있다. <R TYPE>에는 임의로 쏘는 폭탄이 없다. 대신 공격을 멈추고 기다린다.

적은 봐주지 않는다. 기다리면 기다릴수록 더 위험하다. 하지만 그 보답 또한 크다. 오래 기다릴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모을 수 있고, 더 치명적 공격을 날릴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모아야 할지, 또 어느 순간에 쏘아야 할지 잘 따져봐야 한다. 자칫했다가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은 에너지를 조무래기들 상대하는 데 다 써버리고는 보스와는 그냥 총알만 쏴대며 맞서야할 수도 있다. 힘을 비축해야 할 때와 그것을 터트릴 때를 결정하는 순간은 온전히 게이머의 몫이다. 교과서는 없다. ‘푸르른 생명의 나무’인 현실에서 배우고 판단해야 한다.

그래도 역시 <R TYPE>의 가장 큰 특징은, 이어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다른 게임에서는 얼마든지 컨티뉴가 가능하다. 돈만 있다면 실수한 그 자리에서 그대로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반면 <R TYPE>에서는 한번 죽으면 무조건 스테이지 맨 앞으로 돌아간다. 산처럼 동전을 쌓아놓더라도 한 스테이지도 넘기지 못할 수도 있다. ‘R 타이퍼’가 되는데 다관절 보스보다 훨씬 큰 장애물이 된 게 이 시스템이다. 그 어떤 장애물도 기꺼이 이겨내던 사람이라도 기가 꺾여 떨어져나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더 불타오르기도 한다. 어려운 만큼 그 성취가 더욱 달콤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 제작사 ‘아이렘’과 동반해 사라졌던 <R TYPE>이 10년이 지난 지금 플레이스테이션2 <R. Type 파이널>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왔다. ‘파이널’이란 비장한 수식어에 부끄럽지 않게 다양한 기체와 환상적인 맵 디자인을 가지고 있다. 이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새로운 모습을 완성도 있게 펼친다. 하드 유저는 이미 사라졌지만, 시장이 라이트 유저 중심으로 재편된 지 오래지만 타협 없는 난이도는 여전하다. <R TYPE>이 마지막 인사를 보낸다. 더이상 대문자 R이 존재할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마지막까지 과거의 모습을 지키면서 우아하게 끝을 맞는 것이다. 박상우/ 게임평론가 www.MadOrDead.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