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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입맞춤
2001-05-16

융의 분석심리학으로 본 <프린스 앤 프린세스>

● “아주 뚱뚱한 여자예요.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있고요. 커다란 옷을 입었어요. 옷이

헐렁거리는데 양끝 손은 손이 아니라 불이 막 타올라요. 응… 손으로 자기 배를 막 밀고 있어요, 얍 하면서. 막 화내요….” 이제 막 8살이

된 꼬마환자는 대체 이 흐리멍덩한 잉크반점에서 어떤 세상을 보고 있는 것일까. 핑클과 이소라의 목소리를 자유자재로 흉내내고, 연극을 하는

듯 “엄마, 죄송해요. 절 용서해주세요”라며 셰익스피어의 여주인공보다 더 구슬피 흐느끼는 이 조그만 성격배우의 세상은…. 그녀의 반응에

그림자를 덧씌우고 가위로 오려내본다고 치자. 혹 그녀가 꿈속에서라도 프랑스의 애니메이터인 미셸 오슬로 감독을 만났던 것은 아닐까? 그도

아니라면 그녀가 말한 무의미한 잉크반점 속에 커다란 옷을 입은 여자와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나오는 기모노를 입고 도둑의 배를

발로 조이는 노파는 왜 그리도 비슷한 그림자로 내 머릿속 명암의 경계를 지워내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그 기모노를 입은 노파를 살짝 지워내고

검은 옷의 망토를 입은 노인을 만들어내니,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제7의 봉인> 속 죽음의 사자마저 보이는 것 같다.

1907년,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 칼 구스타프 융은 40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노환자를 맡게 되었다. 76살의 이 노파는 50여년 전에

입원했는데, 오직 35년 전부터 이 병원에서 일해온 고참 간호사만이 이 환자의 역사를 좀 알고 있을 뿐이었다. 한컵의 우유를 마시는 데

거의 두 시간이 걸리는 그녀는 그 와중에도 손과 팔로 이상한 움직임을 했는데, 융은 이것이 무슨 의미라도 있는지를 궁금히 여겼다. 그는

어느 날 병동을 지나다 수수께끼 같은 동작을 하는 그녀를 보고 고참 간호사에게 그녀가 이전에도 같은 동작을 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내 선임자 말로는 환자가 이전에 구두를 만들었답니다”라고 대답해주었다. 융은 다시 한번 차트를 검토했다. 거기에는 그녀가 마치 구두를

깁는 것과 같은 동작을 한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그 동작은 당시로서는 시골 구둣방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어서 융은 다시 한번 궁금해졌다.

환자가 사망하자 얼마 뒤 융은 비로소 그녀의 오빠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융은 그에게 물었다. “어쩌다가 당신의 여동생이 병들게 되었나요?”

그러자 오빠는 머뭇거리며 이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내 동생은 구두장이를 사랑했어요. 그런데 어쩐지 그는 그녀와 결혼하려고 하지 않았죠.

그 바람에 동생은 실성을 한 거예요.” 그 구두동작은 그녀가 자신의 애인과 같아지려고 일생동안 지속해온 단 하나의 움직임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일들을 통해 융은 하나의 인격 뒤에는 하나의 생활사, 하나의 희망과 욕구가 있음을, 정신병에는 하나의 보편적인 인격심리학이 숨어

있고 여기서 오랜 인류의 갈등이 재발견된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아니엘라 야훼 지음·<융의 회상, 꿈 그리고 사상> 중에서).

그림자가 일깨우는 인간의 양성성

모든 사람들 마음속에는 왕자와 공주가 있다. 흔히 신화나 동화는 정신작용이 빚어내는 가장 심오한 형태의 언어로 우리 내면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준다. 즉 개인의 꿈이란 특정화된 신화이며, 반대로 신화는 보편화된 꿈인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이번에 개봉한 미셸

오슬로의 실루엣 애니메이션인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융의 분석심리학에 대한 완벽한 구현이자 어떤 경배 같아보인다. 일단 <프린스

앤 프린세스>가 형식적인 측면에서 이 차원의 평면 그림자를 택했다는 것, 삼차원의 입체를 포기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흔히 그림자는

생명력의 일부로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말라’는 속담처럼 그림자를 밟는다는 것은 그 사람의 영혼을 침해하는 행위로 여겨진다. 중국이나 타이에서

발달한 그림자극을 한번 떠올려보자. 원숭이, 개구리, 여우 등등, 얇은 천 뒤의 가녀린 빛이 우리의 조야한 의식을 포장하는 동안 너울거리는

그림자들은 가장 간단한 방식으로 천 뒤에서 불현듯 나타난다. 이제까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무형의 실체가 실재하는 그 순간.

디즈니의 셀 애니메이션이 삼차원적인 세밀한 방식으로 현실을 창조하려 할수록 우리는 보이는 것만을 믿게 되는 심리적 빈곤에 빠지는 반면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빛과 그림자의 향연은 평면을 선택함으로써 최대한 우리의 시적 상상력과 심리적인 틈을 자극하는 것이다. 동시에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빛과 그림자는 영화의 본질적인 속성이기도 하다. 나비의 영혼처럼 흔들리는 종이 몇개가 어둠의 세례를 받아 펼쳐지는

이집트나 중세의 세상.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바로 우리 무의식에서 끌어올려지는 우리 내면의 고갱이들로서, 영화를 보는 즉시

어린 시절 잠들면서 꿈꿨던 벽장 너머의 세상으로 우리를 데려다준다.

융은 모든 문화권과 동화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엇비슷한 주제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개인들도 어떤 무의식이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인간에게는

공통된 집단 무의식도 있는데, 이 집단 무의식이 만들어내는 원시적 이미지를 ‘원형’(archetype)이라 하였다. 심리적 원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라는 것이다. 분석학적인 눈으로 보자면 인간은 남성적인 잠재력과 여성적인 잠재력을 모두

지닌 양성적인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융이 개념화한 아니마와 아니무스는 사람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상징한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등장하는 공주는 바로 사람들 마음속에 깃들어 있는 여성성 즉 아니마로서, 막연한 느낌과 기분, 육감,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감수성, 개인적인 사랑의 능력, 자연에 대한 느낌 등의 능력을 관장한다. 흔히 비너스나 헬레네, 이브, 성모 마리아 그리고 현대의

마릴린 먼로나 마돈나, 조디 포스터 같은 여성들은 다른 수준의 의미를 지닌 아니마로 작용한다고 보겠다. 반대로 왕자로 상징되는 아니무스는

사람들 마음속에 깃든 남성성이다. 남성적인 책임과 믿음, 잔인함과 광폭성을 아우르는 이 심리적 원형은 흔히 아폴로나 헤라클레스, 타잔 혹은

간디나 낭만적인 브래드 피트의 모습 등에서도 찾을 수 있다.

따뜻함이 고정관념을 벗긴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중세의 연금술이 그러하듯 공주와 왕자, 즉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통합에 대한 간명한

은유를 보여주며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특히 첫 삽화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아야 하는 왕자의 이야기는 서구의 영웅 신화 대한 짧은

소묘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박진감이 넘친다. 많은 동화에서 청년 영웅들은 흔히 자신의 진정한 인성이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먼곳으로 여행을

떠나고 마침내 용을 죽이고 공주와 결혼하게 된다.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서의 다이아몬드는 상징체계에서 보자면 불멸성을 지닌

진정한 자아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이때 다이아몬드는 여타 동화에서는 황금양털일 수도, 금은보화일 수도 혹은 성배나 신발 한짝일 수도

있다. 왕자가 다이아몬드를 찾아 헤맨다는 것은 자신의 진정한 인성이나 자아를 발견하기 위해 진지한 내면 여행을 떠나야 한다는 뜻이 된다.

흔히 왕자는 가는 도중 여러 어려움을 겪지만 결국 자신을 도와주는 조력자들을 만나게 된다. 조력자는 까마귀일 수도 있고, 늙은 노파일 수도,

혹은 두꺼비나 개구리, 혹은 새일 수도 있다. 왕자는 이들 조력자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연민으로 잘 대해주지만 결국 조력자들의

도움은 다이아몬드를 얻는 데 결정적인 열쇠가 된다. 그렇다면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나오는 조력자는 무엇이었을까? 콩쥐에게

물을 긷게 하는 두꺼비, 낟알을 모아주는 새들이었을까? 이들은 사람들이 자신 안에 있지만 잘 모르는 어떤 잠재능력과 원초적인 본능을 나타낸다.

흔히 사람들은 항상 자신이 잘 이용하고 겉으로 보여지는 능력만으로 보물을 얻으려 하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능력의 대극에 있는 숨겨진 능력을

깨닫는 것이 자아의 완성에 핵심이 된다고 동화들은 가르쳐준다. 조력자는 이렇게 우리가 좀더 신경써야 하고 혹은 그 존재 자체가 있다는 것을

겸허히 인정해야만 하는 우리의 열등기능들이다. 왕자는 자신이 간과했지만 자신 안에 있었던 어떤 능력- 개미, 즉 질서, 바름, 덕, 혹은

복종을 배움으로써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무사히 찾게 된다. 결국 주인공 왕자는 다른 왕자들과 달리 내부의 본성을 이용해 111개의 다이아몬드를

찾고 자신의 여성성을 통합하는 데 성공한다. 왕자는 마침내 공주와 결혼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미셸 오슬로 감독은 <프린스 앤 프린세스>에 고답적인 동화의 숨결만을 불어넣지 않았다. 매우 정치 적이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교정된 감독의 안목은 ‘마녀의 성’이나 ‘왕자와 공주의 키스’ 같은, 감독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에서 더욱더 그 묘미를 발휘한다. 어린 시절,

흑인만 다니던 공립학교의 유일한 학생이었던 감독답게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이야기는 매혹적이면서 동시에 세상의 편견을 깨부수는

묘한 쾌감이 공존하고 있다. 예를 들면 마녀의 성에 들어가려던 청년은 대포를 동원하고 높은 벽을 타고 오르던 이들과 달리 결국 마녀의 성에

들어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을 알게 된다. 그것은 바로 마녀의 성문을 살짝 노크하는 것. 사람들이 마녀라 불렀던 그녀는 실은 예술과 문학을

사랑하는 지혜로운 여자였다. 마치 누가누가 먼저 지나가는 이의 외투를 벗기나 내기한 ‘바람과 태양의 동화’처럼 ‘마녀의 성’은 결국 편견을

허무는 따뜻한 마음의 손길, 사람들의 정신적 방어물을 허무는 중용과 겸허함의 미덕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론을 앞서는 오랜 지혜

특히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백미는 황당한 마법의 키스로 인해 개구리, 나비, 코뿔소, 코끼리, 애벌레, 벼룩, 기린, 고래,

황소로 변하는 왕자와 공주의 키스 행진곡이다. 융에 따르면 흔히 여성들은 자신이 억압시켰던 내면의 남성성인 아니무스를 다른 남성에게서 보게

되면, 그 남성에게 자신의 아니무스를 투사함으로써 사랑에 빠지게 된다고 한다. 이 점은 남성 역시 마찬가지이다. 융식으로 말한다면 남성들은

사랑하는 여성에게서 자신이 억압했던 자신의 여성성을 보게 된다. 여기서 투사라는 말이 어렵다면 흔히 말하는 ‘눈에 콩꺼풀이 씌운다’, 이런

말로 대치해보자. 왕자와 공주는 서로의 눈에서 서로의 아니마와 아니무스를 발견하고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곧 벼룩과 기린으로 변한 두 사람은

1분 전에 한 사랑의 맹세를 어기고 뜻밖에 이기심어린 비난을 서로에게 퍼붓는다. 사람들이 하마나 코끼리로 변하는 까닭은 무얼까? 그것은

두 사람이 상대편을 그렇게 지각했다는 말에 다름 아닐 것이다. 사랑의 변덕스러움과 서로의 투사를 떨쳐버리고 있는 그대로의 상대편을 보는

방법을 가장 간명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공주와 왕자. 이 에피소드의 마지막 반전은 스크린에 뽀뽀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귀엽고 장난스럽다.

물론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분석학을 동원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충분히 사랑스럽고 재미있다. 감독 미셸 오슬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스 애니메이션의 거장으로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음을, 삶의 지혜는 가장 간명한 방식으로 찾아내는 것임을 한칼에 보여준다. 그런데 여기에

마음만 먹는다면 단아한 그림자를 사모했던 종이 한장에 융의 통찰력을 겹침으로써 가장 저렴하고 즉각적인 방법으로 삶에 대해 많은 것을 깨닫게

되는 신기한 내면여행의 보너스도 가능한 것이다.

그건 위의 꼬마환자나 노파를 등에 업고 후지산에 올라갔던 <프린스 앤 프린세스>의 도둑도 마찬가지였다. 어머니에 대한 심한 분노와

자신의 정서를 잘 통제하지 못하는 꼬마소녀는 자신의 손이 불이 되어 스스로를 옥죄고 있다고 느낀다. 또한 도둑이 얻기를 바랐던 기모노나

큰 옷 등은, 안으로 감싸안는 이미지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가 외부세계에 자신을 드러내는 가면으로써의 자아, 바로 페르소나만을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껍질인 페르소나는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없다. 여기에 신성한 노인이 나타난다. 노파나 게이샤 혹은 할아버지나 도사가

될 그 또는 그녀는 우리의 마음 안에 초자연적인 개성, 즉 우리를 한 단계 이끌어올릴 현명한 노인 필레몬이다. 마치 헤라 여신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면서도 그녀를 평범한 노파로 착각했던 그리스신화의 영웅 이아손처럼 우리는 일종의 도둑이며 노파인 동시에 하마가 될지도 모르는 왕자이자

공주는 아니였던가.

<프린스 앤 프린세스>는 향기는 없는 평면의 실루엣이지만 깊이있는 애니메이션의 전형으로 오래된 지혜의 향내를 화면 가득히 품어내고

있었다.

심영섭 |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