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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담스럽다,그래도 달려들었다,<4인용 식탁> 전지현&박신양

TV드라마 <내 마음을 뺏어봐>와 영화 <화이트 발렌타인> 때의 박신양전지현에게 부담스러운 상대였다. 그때 그는 워낙 대선배인데다 이미 입지를 다진 배우였고, 전지현은 초짜에 불과했으니까 당연했을 것이다. 그러나 을 계기로 5년 만에 다시 만나서도 전지현은 부담이 완전히 사그라들지 않았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박신양이 “애써서 거북하게 대하거나 그러진 않았는데…”라며 웃는다. “사실 무대에 올라가는 순간엔 모든 게 공평해져요. 나이도 필요없고 경력도 필요없고….”

진짜 부담스러운 건 다른 데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행한 영혼을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기억 속에 새겨진 치유되기 힘든 상처에 관한 이 영화 자체가 버거웠을 것이다. 부담은 박신양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자극에조차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면증 환자 ‘연’과, 문득 닥친 비일상적 경험으로 인해 잊고 싶은 과거를 대면하는 ‘정원’. 이 둘은 불안과 긴장의 심리를 극의 끝까지 몰아가되 행동보다 내면이 요동쳐야 할 인물들이다.

이번 영화가 두 주연배우에게 어떤 의미일지는 꽤 명백해 보인다. 이 까다로운 심리스릴러는, <달마야 놀자>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박신양이 일견 쉽고 좋은 궁합의 멜로드라마 대신 택한 도전이다. 그리고 자신을 “이제 시작하는, 아직 할 것이 더 많은 배우”라고 규정한 전지현이 앞으로 겪어야 할 많은 과정 중 하나로, 그렇지만 “연기에 관한 어떤 얘기도 들을 각오”로 택한 관문이다. 우리가 을 주목하게 되는 몇 가지 이유 중 한 가지도 여기에 있었다.

전지현‥ 외로움, 그리고 성숙에 관하여

그가 무슨 ‘투항’을 요구한 건 아니지만 때론 솔직한 게 미덕이다, 라고 자위하기로 했다. 삽시간에 대학노트 5장을 가득 메운 그의 말들은 적당한 재배치가 손끝에 익은 (기자라는) 직업적 습관을 집요하게 거부했다. “촬영장에 갈 때면 항상 어떤 가느다란 선이 보이지 않게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어요. 뭔지도 모르는 그걸 굉장히 의지하며 살아가는데, 누군가 그걸 봐버리거나 끊어버리면 나도 모르게 알 수 없는 세계로 빠져들 것 같았어요. 그 선의 끝이 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전 그걸 의지하며 살아가는 여자였어요.”

소설의 한 대목을 읽는 듯한 문장을 줄줄이 읊어대는 이런 말에 뭔가를 빼거나 보탤 수 있을까? 의 ‘연’은 타인의 숨어버린 먼 과거나 비가시적인 영혼을 보고 살아야 하는 여인이다. 외롭고 슬픈 이 여인의 이미지를 어떻게 찾아갔는지 묻지 않을 수 없었는데, “나에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것이라 너무 힘들었다”며 ‘가느다란 선’ 이야기를 꺼냈다.

전지현은 식상한 인상평이 필요없는 스타다, 라고 작심했으나 이 순간 이것도 쓸데없는 짓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그와 얼굴을 마주 대하기 전까지 ‘성숙’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될 줄은 상상조차 못했으니. 초롱초롱한 눈빛과 달리 약간 나른한 피로감을 풍기는 표정이나 질문을 곱씹으며 자기 생각을 비교적 길게 말하는 그는 <엽기적인 그녀>의 전지현이 아니었다.

앞에 앉다

시나리오를 처음 읽고나서 어떤 장르라고 딱히 말하기 힘들었어요. 호러로 많이 각인이 돼 있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건 싫어요. 식탁이란 단어는 따뜻한 일차적 분위기를 느끼게 해주고 가족을 상징하는데, 가장 친근한 이들끼리 배신하고 불신하게 되는 데서 오는 두려움을 보여주죠.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존재의 외로움이에요.

마주 앉은 ‘연’

부자연스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느낌이라서 다른 영화보다 서너배는 더 힘들었어요. 막상 끝나고 나니까 이 홀가분한 느낌이 뭔가 싶더라고요. 촬영 끝나고 나니 2∼3kg이 빠져 있었어요. ‘연’에게서 벗어난 게 너무 좋았고 다시는 이런 영화하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는데, 결과적으로 그와의 만남은 현명한 선택이었어요. 저에게 자신감을 준 캐릭터예요. <엽기적인 그녀>의 잔류 이미지가 너무 강했어요. <엽기…>의 전지현에서 멈출 수는 없고, <엽기…>의 전지현에서 어떤 산업적인 걸 끌어내는 걸 보고 있으니 내 자신이 갇혀 있는 듯 느껴졌거든요.

믿음, 그리고 외로움

요즘 믿음에 대해 많이 생각해요. 내가 믿고 있는 사람들이 뭘까. 믿는 사람 한명조차 챙기기 힘들다는 생각…. 그렇다고 뭘 잃었다거나 나 자신을 불쌍하게 생각한 적은 없어요. 주변 사람보다 저한테 문제가 있겠지만, 꽉 찬 만족감은 없고, 다 떠나보내고 나 혼자 서고 싶고, 남들이 생각하는 전지현에 맞추고 싶지도 않고….

광고 이미지와 실제의 나

광고란 매체는 짧은 시간 안에 내가 가진 걸 빠르게 전달하게 해줘요. 그게 장점도 되고 단점도 되지만. 저를 생각할 때, 저를 둘러싼 많은 것들에 의한, 빛나게끔 하기 위한 장치들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내가 있어서 빛나는 게 아니라. 어쨌든 내가 그 속에 있어서 빛나는 게 좋긴 해요. 실제의 나는 오히려 그 반대를 걸어갈 수도 있지만 말이죠.

국제적 브랜드

하하, 그런 수식어는 처음 듣네요. 누가 자신을 상품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내 자신이 가장 소중한데. 작은 소재의 한국영화(<엽기적인 그녀>)가 누구에게나 공감을 주고 웃음을 주었다는 것에 자신감이 생겼고,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다고 할리우드 같은 허망한 꿈을 꾸는 건 아니고요. 좋은 한국영화를 여러 나라에 알리고 싶다는 새로운 목표가 생겼지만 이것 때문에 또 다른 트레이너를 두거나 하진 않았어요.

박신양‥ 집요함을 품고, 오해를 넘어

배우에겐 어쩔 수 없는 자기 스타일이 있다. 이른바 연기 잘하는 배우가 생소한 캐릭터를 꼭꼭 씹어넘겨 완벽히 소화했어도 뒤로 나온 결과물은 자기화해 있게 마련이다. ‘천의 얼굴’이란 말은, 그렇게 믿고 싶은 우리의 바람이 만들어낸 표현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연기 자체에 품은 욕심의 냄새가 지독할수록 배우는 자기가 이해 못하는 캐릭터를 연기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래도 포기하기보다 집요하게 물고늘어져 결국 자기만의 논리를 갖추고 카메라 앞에 선다.

박신양에게는 이것이 일부분 맞아떨어지고 일부분 어긋난다. <편지> <약속> <화이트 발렌타인> <인디안 썸머> 등의 영화와 TV드라마 <사랑한다면> <내 마음을 뺏어봐> 등 유사한 멜로 이야기 속에서 유사한 캐릭터로 반복 등장해왔다는 사실은 여전히 그에 대한 중요한 설명이다. 직업과 배경에 상관없이 자상하고 섬세하며, 감성적인 동시에 감정적인 남자 환유, 종두, 준하. ‘박신양 스타일의 연기’를 뚜렷이 보여준 이런 선택들은 데뷔 이후 무섭게 상승세를 타오던 배우에게 효율적인 선택이었을 망정 효과적인 활용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메소드 연기’의 원산지 러시아에서 정식으로 연기를 배운 배우로서 연기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이 넘쳐났지만 한가닥 아쉬움이 영화 끝에 묻어나곤 했다. 그런 시간도, 그로부터 꽤 흐른 것 같다.

앞에 앉다

시나리오를 읽고 무서운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사실 난 공포영화에 출연할 생각이 전혀 없던 사람인데. 무서운 영화를 보면서 내가 저런 영화, 저런 연기를 하게 될까, 하고 생각했었는데…. 근데 이 영화는 좀 달랐어요. 공허하지 않더라는 것, 그게 매력이었던 거 같아요. 굉장히 섬뜩하고, 그 섬뜩함의 원인을 파헤치는데 그게 집요하더라구요. 보통 공포영화들처럼 대충 넘어가는 게 아니라.

마주 앉은 ‘정원’

굉장히 어려웠죠. 아주 불분명하고 불투명해서 형상화가 고민되는 그런 역할이었어요. 심리상태 하나로 영화 전편을 끌고가는 인물인데, 그 긴장감을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가 문제였어요. 몸으로 하는 큰 연기가 없어도 에너지 소모는 다른 영화보다 서너배 더 들었던 거 같아요. 3∼4개월 동안 계속 불안하고 예민한 상태로 있으려니까 아주 힘들더라구요. 예전에 했던 역할들과 많이 달라서 과연 이 인물을 흥미롭게 바라볼 수 있을 것인가도 걱정됐지만, 지금은 별로 신경 안 쓰고 있어요.

만족

이번 영화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매우 다른 역할이고 다른 모습인데, 잘했는지 못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어요. 예전에 해왔던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한 영화들이, 역할들이 그렇게 매력적이었나, 그건 아닌 거 같아요. 남들한테 매력적이었다고 한다면 나한테도 그랬나, 그것도 아니고요. 10년이나 20년쯤 지나서 내 영화들을 돌아보면 그땐 만족할 수도 있겠죠.

멜로영화가 대변하는 이미지

내가 그런 캐릭터를 고집했다기보다는 내가 출연했던 영화들 중에 그런 영화들이 흥행을 했다는 게 맞는 거죠. 그래서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걸 거예요. 그 당시에 멜로가 주류를 이루던 상황인 것도 있겠구요. 그리고 그런 영화에서 보는 모습(예컨대 ‘진지맨’이라는 이미지)이 실제의 나와 가까울 거라고 생각하는 건 영화가 사람에게 혼돈을 가져다줄 수 있는 매체라서 그런 거 같아요. 그런 면에서 나는 프로페셔널이에요. 무대와 실생활을 혼동하지 않고 분리하는 법을 훈련했거든요.

오해

사실 코미디영화를 무지 좋아하는데 할 기회가 많지 않았어요. 남자들이 우르르 등장하는 영화요? 그것도 좋아해요. 할 기회가 적었던 거죠. <달마야 놀자>를 하자 사람들이 뜻밖의 출연으로 여기던데 내가 정말 많은 오해에 휩싸인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것도, 내가 어쩌지 못하는 오해들뿐이더라구요. 그럼 난 어떡하나? 할 수 없지, 뭐. (웃음) 내가 앞으로 할 영화들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시간이 흐르고 돌이켜보면 다양한 작품들이 있을 거고, 지금 말하는 그런 이미지들도 많이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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