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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알면서 뭘 그래?
2001-05-17

성적 연상에 호소하는 독일 청과물점 광고

제작연도 2000년, 광고주 Obst & Gemuse Schafer

제작사 Scholz & Friends, Berlin

아티스트 Bjorn Ruhmann

카피라이터 Schumann, Joerg Jahn

한-일관계가 껄끄럽다. 그래도 예술은 시류에 아랑곳없는 모양이다. 때마침 예술의전당에서는 양국 대표작가 2인전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조형주의로 유명한 한국의 김흥수 화백과 일본화의 대가인 히라야마 이쿠오 화백의 작품이 완상의 즐거움을 지긋한 경지로 이끈다. 표현기법과

모티브도 전혀 다른 두 작가지만 인류평화와 조화로운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사가 같다.

2차세계대전에서 원폭의 피해를 입고 간신히 생명을 건진 히라야마 화백은 평화에 대한 염원과 문명에 대한 통찰을 화폭에 빚고 있다. 김 화백의

작품은 동양의 음양철학을 바탕으로 한 화면에 인간의 희로애락을 구상과 추상으로 그려내고 있다. 짐작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그 표현의 깊은

뜻에 이르러서 나 같은 문외한은 어떤 벽을 느낀다. 특히 김 화백의 <모린의 나상>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같은 작품은 거의 비주얼로만 보일 뿐 의미로는 도저히 와닿지 않는다. 작품의 한켠에 느닷없이 자리한 여인의 벗은 몸이 전체 대목에서 어떤

맥락으로 해독돼야 하는 기호인지 아리송하다.

그림을 보고 굳이 뜻풀이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것은 일종의 강박관념일지 모른다. 광고 텍스트를 접하면서 의미를 분석하고 해석하는

버릇이 몸에 밴 탓에 생긴 갑갑함일 수도 있다. 스스로 위안도 해본다. 예술작품에서 작가의 의도는 반드시 수용자에게 이해돼야 하는 것은 아닐지

몰라. 이른바 작가주의는 창작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용납되고 오히려 장려되기까지 하는 거 아닌가?

광고의 영역에서도 작가주의는 허용될까? 제작자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든 나름대로 재해석해보는 재미는 어떨까? 돌아보면 우리 광고에도 그런

사례가 없지 않다. SK텔레콤의 TTL 캠페인에서도 그런 전략의 일단이 내비쳤다. 명확한 답을 주지 않고 생각의 틈을 만들어줌으로써 광고에

대한 관여도를 높여가는 마케팅 전략. 그래서 일각에서는 신비주의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광고와 예술작품은 본질이 다르다. 광고에서 지나친 작가주의는 오만이다. 소비자는 예술을 감상하듯 광고를 여유와 안목으로 음미하지

않는다. “나는 광고를 만들 때 수용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태도는 광고를 지적 유희로 보는 엘리트주의에 지나지 않는다. 광고는 마케팅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사회적 소통행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독일의 한 청과물 유통점이 벌인 광고캠페인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일이나 야채 따위의 먹을거리와 남녀의 ‘야시꾸리’한 신체부위는

어떤 함수관계를 갖는다는 말인가? 도대체 제작자는 무엇을 표현하려 했을까? 무슨 의도로 오래 눈길을 두기 민망한 그림들을 만들었을까?

풍만한 여자의 젖가슴을 감싸는 브래지어에다 ‘멜론, 개당 2.99마르크’. 근육이 우람한 남자의 팬티의 돌출한 부분에다 ‘바나나, kg당

1.98마르크’. 사우나를 즐기는 살집 좋은 아저씨의 아랫배에 두른 타올에다 ‘배, kg당 1.99마르크’ 따위의 글자를 낙서하듯 갈겨놓고

있다. 그러고선 ‘알아보려면 알아봐!’ 하는 식으로 버티고 있다. 이것도 작가주의로 봐야 할 것인가?

그렇지 않아보인다. 굳이 게슈탈트 심리학을 적용하지 않더라도 하나하나의 표현 오브제들은 시각적으로 통합되어 의미있는 메시지로

해석돼 소통되고 있다. 제작자는 이 정도쯤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은 상식으로 되는 일일 거라고 강변하고 있는 듯하다. 다 아는 얘기면서 뭘 그렇게

내숭을 떠느냐는 핀잔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뻔한 얘기 가지고 의뭉스럽게 구는 당신하고는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는 배짱까지 느껴진다.

‘바나나, 오이, 가지, 고추 따위를 남자의 심벌에 견주어 싱싱한 기운을 느끼게 하는 게 뭐 잘못됐어? 멜론, 복숭아, 사과, 레몬, 포도

따위를 여자의 가슴에 빗대어 싱그러운 향기를 연상시키는 것이 어디 어제오늘 일이야?’라는 주장일 것이다. 그렇다면 투실투실한 뱃살과 서양배(pears)는

바로 매치가 되는 물건들인가? 어디 배를 모양으로 먹느냐는 얘기임직도 하다. ‘이렇게 크고 싱싱한 과일들이 엄청 싼값에 당신 눈앞에 있는데

어찌 군침 삼키지 않으리요’라는 꼬드김이다.

이 광고의 주된 커뮤니케이션 타깃은 주부이다. 야채와 과일 등을 구매하는 주소비자는 여성이 아닌가? 그런 맥락에서 이 광고들은 성과 관련해서

집요하게 이어지던 오해에도 반박자료가 된다. 여자의 신체가 더 자주 상품화되고 더 큰 성적 연상을 일으킨다고 믿는 통설을 공격하듯이 말이다.

더욱이 근래 들어 여자의 경제력과 구매력이 높아져가고 있는 즈음에 ‘성의 상품화’는 더이상 여성만을 피해자로 만들지 않는다. 부와 정력을

암시하는 육감적 자세, 잘 다져진 근육질의 몸매, 혈색 좋은 얼굴을 장식하는 구레나룻…. 남성도 보여지는 대상으로서 충분히 성의 심벌이

되고 있다. 적어도 광고의 세계에서 이제 여성은 오히려 성적 유희의 객체가 아니라 주체가 되고 있다.

광고는 소비사회의 문화형식이다. 광고는 사회에 내재하는 신념체계를 그것의 이미지를 통해 전파한다. 이때 성적 요소들은 그 자체로 선택되는 게

아니라 상품을 팔기 위한 언어형식 안에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현우 | 프리랜서 카피라이터·광고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