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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5]
2003-08-14

영화 속 자살, 영화밖 자살

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5]

몸 날리는 사람들, 한국 근대성의 그늘

남재일/ 고려대 강사>

“더이상 할말 없다 똑바로 쳐다봐라”

<전설의 고향>에 나오는 여자귀신은 주로 목을 매단다. 시체를 훼손할 의사가 없는 것은 귀신으로 귀환해서 원한을 풀어야 하기 때문이다. 제도에 의한 매개 과정이 복잡하지 않았던 전근대 사회에서 원한은 그 원인 제공자를 안다. 그에 대해 지독한 살의를 느끼지만 본인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죽어 귀신이라는 권능을 가진 존재가 되어 보복하거나, 사또라는 권력자를 겁줘서 대리인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 그러나 원한의 원인 제공자가 누군지 모를 때, 귀신으로 귀환해서도 살의의 대상을 찾을 가망이 없을 때 그 분노는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살해 욕구로 쉬이 전이된다. 피떡이 된 시체의 전시는 그 상황에서 원한의 원인 제공자가 된 익명의 다수를 향한 발언이다. 빌딩투신의 퍼포먼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이런 점에서 현대적이다. 복잡한 매개 과정 속에서 야금야금 자살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 그들은 자신이 죽이고 싶은 대상을 찾아내지 못한다. 카드빚에 몰려 아이들과 동반 투신한 주부를 자살로 몰아간 상황에는 수많은 사람이 연루돼 있다. 카드빚 독촉하는 대행업체의 깡패부터 가난하다고 멸시했던 주변 사람들까지 많은 사람이 직간접적으로 연루돼 있다. 하지만 그들은 어떤 제도와 관계된 부분으로 연루돼 있어서 그중 누구도 한 인간을 자살로 몰고 갈 만큼의 악행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 경우 원한의 대상은 콘크리트 벽과 같은 요지부동의 제도, 혹은 제도라는 트릭을 이용한 익명의 다수이다. 이처럼, 빌딩투신의 퍼포먼스는 극도의 분노와 극도의 절망이 공존한다. 무력한 개인이 익명의 다수에 대해 퍼붓는 분노의 메시지를 자신의 몸으로 삼켜 내파시키는 사도마조히즘으로 살의가 가장 강한 자살의 유형이다. 그럼에도 무구한 자살로 보이는 것은 자살자들의 무력함 때문이다. 별다른 자살의 방법을 선택할 수 없는 청소년들은 투신을 선택한다. 그 과정에 아무런 기술도 심리적 긴장도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복잡한 과정이 필요한 세네카 스타일은 언감생심이다. 로마 철학자 세네카가 처음 개발했다고 해서 세네카 스타일이란 이름이 붙은 이 자살법은 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서 손목의 정맥을 자르고 목욕하는 자세로 누워서 과다출혈로 사망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손목을 자를 때 외에는 고통없이 환각상태에서 사망한다고 해서 죽는 순간까지 고통을 피하려는 쾌락주의자의 자살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자살 과정이 길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정신력으로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정말 어려운 자살법이어서, 욕조에 핏물이 번지는 광경을 눈으로 보면 실패한다고 한다. 이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 욕조에 장미꽃잎을 가득 띄워놓으면 된다는 설도 있다. 죽는 마당에 이런 배려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은 참 징한 인간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죽이고 싶은 욕구’가 거의 없기 때문에 자살행위를 통해서 하고 싶은 말도 별로 없다. 있다면 이런 것일 게다. “너희는 너희대로 살아라 나는 나대로 간다.” 이런 태도는 자살의 동기가 적의나 분노가 아니라 권태일 때나 가능하다. 캐릭터의 창조에 일가견이 있었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악령>에서 스타브로긴이란 인물을 통해 에누리 없이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인간의 불모성을 권태로 인한 자살로 귀결한다. 스타브로긴은 나일론 끈으로 목을 매다는데, 목에 흉터가 가지 않도록 올가미에 정성껏 비누칠을 한다. 그러나, 이 합리적인 인간은 모든 감각이 시각에 집중돼서 목이 졸렸을 때 이완된 괄약근의 틈새로 흘러나오는 배설물의 악취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는 목을 매달기 전에 오이로 항문을 막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시체를 수거하는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기 위한 배려가 칭찬받을 만하지 않는가. 그런데도 이 광경이 엽기적으로 보이는 것은 사소한 미적 취향과 목숨을 등가로 놓는 논리가 지독히 공포스럽기 때문일 게다. 목숨을 재료로 취향을 표현하는 것은 파시즘적 미학이고, 연쇄살인범에서나 볼 수 있는 지독한 편집증적 광기이다. 이런 인물들을 우리는 ‘변태’라고 호칭한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라는 거다.

우리나라에는 아직 이런 변태들이 거의 없다. 나는 이게 다행인지 불행인지 잘 모르겠다. 권태로 자살을 기도한다는 것은 적어도 먹고살 만해서 잡생각이 많다는 거다. 한국의 자살은 잡생각할 여유가 너무 없어서 생긴다. 부도난 가장이나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식과 투신한 주부는 물론이고, 성적을 비관한 여고생까지 돈으로 환산되는 어떤 지점을 향해 달리다 낙오된 사람들이다. 이들이 선택하는 자살의 유형이 투신이다. 근대의 상징인 빌딩이라는 공간에서 퇴출된 사람들, 나는 이들이 한국 근대성의 환부를 나타내주는 더디고 더딘 징후로 보인다.

의 혹독한 탄식

언제부턴가 한국영화는 호러와 미스터리의 장르 틀을 빌려 자살을 한국 근대성의 그늘로 들이밀기 시작했다. 전면적으로 잘 짜인 논리적 틀은 아닐지라도 장르의 외곽에 하나둘 점으로 들어서던 그 그늘은 에 이르러 형상을 알아볼 수 있는 점묘화로 완성된 느낌이다. 외견상 호러의 의상을 걸치고 있지만, 나는 이 영화처럼 전면적이고 혹독하게 한국의 근대성을 비판한 영화를 보지 못했다. 사실 이 영화가 공포를 유발하는 대목은 언제나 한국 근대성의 폭력성과 연결돼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부터 필름을 거꾸로 감아보자. ‘4인용 식탁’은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표어를 동사무소에서 나누어주며 미래를 외쳐대던 70년대가 약속한 단란한 가족의 상징이다. ‘선 성장, 후 분배’의 약속이 지켜졌다면 “밥을 먹고 얘기하기에는 좀 차가운” 그 식탁에는 조명을 받으며 대화하는 단란한 가족이 자리를 채워야 한다. 하지만 식탁의 자리가 다 채워지는 유일한 장면은 죽은 두 아이의 유령과 전지현이 앉아 있는 환각밖에 없다. 마지막 장면에서 그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사람은 ‘아버지’ 혼자다. 나머지는 다 어디로 갔는가? 4인용 식탁이 놓일 법한 고층아파트에서 아이들은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에 의해 창 밖으로 던져지거나 독살된 채 지하철에 버려진다. 이 근대적 상징공간에서 이유없이 살해극을 벌인 어머니는 법정에서도 아무런 자기 변론을 하지 못하고 법원 난간에서 투신한다. 증인의 자리에 앉았던 또 다른 어머니도 결국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한다. ‘아버지’에게 아파트 안에서 밖을 응시하면 추락하는 순간에 눈을 맞출 수 있다고 말하지만 ‘아버지’는 믿지 않는다. 결국 죽어가는 것은 아이들과 ‘어머니’이고 ‘아버지’는 그 죽음의 이유에 귀기울이지 않고 믿지 않는다. 나는 이 은유가 근대화의 폭력에 희생된 아이들과 여자들의 아우성처럼 들렸다. 그것도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상대에게 결국 소리가 되어 전달되지 않고 입 안에서 맴도는 기면증 환자의 아우성 같았다. 그런데, 이 아우성을 외면한 ‘아버지’도 따지고 보면 희생자다. 그는 청소차가 길가에 노는 아이를 깔고 시체를 하수도에 처박아버리는 광경이 벌어지는 달동네에서 자랐다. 알코올중독자 아버지를 연탄불로 살해하고 개척교회 목사의 양자로 자란 인물이니 근대화의 그늘에서 양지로 신분이동을 한 셈이다. 태생적으로 보면 빈자로, 여성이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근대화의 타자에 속한다. 그래서 한때 ‘어머니’(전지현)에게 연대감을 표시하며 “당신 말을 믿겠어요”라고 약속하지만 결국은 배신한다.

이 대목에는 여성의 깊은 탄식이 배어 있다. <질투는 나의 힘>에서 ‘음성적 마초’ 박해일을 분석했던 날카로운 칼날이 계급보다 더 강한 성계급의 연대를 도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김여진-전지현-박신양-전지현 남편의 성계급적 지위를 분명히 하고, 피고-증인-방청객(혹은 법정) 사이의 구분도 성계급적 지위와 밀접하게 맞물려 있다. 김여진은 투신으로밖에는 말 못하는 좌절한 여성성이며 전지현이 가까스로 여성이 왜 투신할 수밖에 없는가를 얘기하고 박신양이 그 얘기를 세상의 ‘아버지’ 귀에 해석해주는 위치에 있다. 말하자면 근대성의 희생자를 여성과 아이들, 그리고 빈자의 순으로 배치하면서 남녀 구분을 하는 페미니즘적 정치성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여기에서 투신은 발언권을 잃어버린 여성이 몸을 찌그러트려서 내는 소리없는 육성이다. 그 육성을 들을 수 있는 육감적인 귀가 관객의 가슴 한 귀퉁이에 달려 있을 거라고 나는 믿는다.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1]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세상의 창에 찔린 영혼들 여기 떠돌다 [2]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새로운 가족윤리를 꿈꾼다 [3]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4]

▶ 영화 속 자살, 영화 밖 자살-투신의 행렬은 무엇을 말하는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