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영화평론가이자, 재작년까지 도쿄대 총장을 지낸 하스미 시게히코(67)가 광주국제영화제의 게스트로 한국에 왔다. 이 영화제가 마련한 존 포드 특별전의 부대행사로 열린 세미나에 하스미가 발표자로 참석한 다음날인 지난 25일 광주에서 그를 만났다. 불문학을 전공해 프랑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찌감치 일본에 푸코와 들뢰즈를 소개한 선구적 지식인인 하스미는, 도쿄대 불문학과 교수로 있으면서 70년대 도쿄대와 릿쿄대에서 영화 강의도 시작했다.
<쉘 위 댄스>의 수오 마사유키, <링>의 나카다 히데오, <큐어>의 구로사와 기요시, <유레카>의 아오야마 신지 감독 등이 그의 강의를 들은 제자들이다. 영화뿐 아니라 문학비평도 꾸준히 쓰고, 2001년 도쿄대 총장 시절 도쿄대 졸업식장에 당시 서울대 이기준 총장을 초청해 함께 일본 역사왜곡을 비판하는 등 정치적 발언도 삼가지 않는 하스미는 일본을 대표하는 지식인 중 한명이다. 하스미는 올해 일본 감독 오즈 야스지로 탄생 100주년을 맞아, 자신의 저서 <감독 오즈 야스지로>(한나래출판사에서 번역 출간)에 80페이지 정도를 새로 써 증보판을 내고, 도쿄대가 주최하는 기념행사의 기획위원장을 맡는 등 오즈로 바쁜 해가 될 것이라는 근황을 전했다.
-한국의 영화제에 처음 오면서, 존 포드 감독 세미나 참석차 왔다. 존 포드를 그렇게 중시하는 까닭은?
=우선 존 포드는 무성영화의 끝자락에 걸쳐 있는 감독이다. 무성영화는 언어가 안 되니까 시각적 소스, 이미지로 전달한다. 존 포드는 시각으로 전달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다. 일본의 구로사와 아키라만 해도 무성영화의 경험이 없다. 그래서 본질적으로 다르다. 두번째로 존 포드를 옛날사람으로 취급하려고들 한다. 모차르트는 그렇게 취급하지 않으면서 죽은 지 30년밖에 되지 않는 존 포드를 옛날 사람 취급하는 경향과 싸우고 싶다. 그는 20세기의 모차르트다. 일본 고이즈미 총리가 오페라를 좋아한다며 독일에서 5시간짜리 바그너의 오페라를 봤다. 그런데 그는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를 세편밖에 안 봤다고 했다.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 시간이면 미조구치 영화 3편, 임권택 영화 2편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20세기 예술을 무시하는데 그럴 게 아니다.
-광주영화제의 인상은?
=세계 영화계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영화 애호가들에게는 매우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모리스 피알라나, 조앙 세자르 몬테이로의 작품을 영화제에서 즐길 수 있다는 건 대단한 혜택이다. 대단히 좋은 프로그램의 영화제다. 초청해준 데 대해, 또 일본 감독에 대해서가 아니라 존 포드라는 세계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작가를 주제로 불러준 데 대해 매우 감사한다. 오는 8월31일은 존 포드가 작고한 지 정확히 30년 되는 날이다. 그 날 막을 내리는 이번 영화제는 정말 의미가 깊다. 영화 하면 곧바로 관객의 수로, 양으로 평가하는데 영화제만큼은 질을 중시해야 한다. 질에 충실하다면 관객이 적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성공 아닌가. 이 영화제의 영화를 보고 영향을 받아 그 소수 가운데서 10년 뒤에 작가가 나올 거다. 그게 얼마나 큰 수확인가.
-영화평론이 영화라는 시각매체의 풍성함을 단순화시키는 게 아니라, 그걸 열어주는 글쓰기여야 한다는 지론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신문에도 영화평을 많이 써왔다. 그 지론을 살려서 신문에 짧은 글쓰기를 하는 게 쉽지 않을 것 같다.
=두가지 글쓰기를 한다. 신문에 쓸 때는 영화의 좋은 면을 부각시켜서 독자들이 바로 극장으로 올 수 있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둔다. 긴 글을 쓸 때는 영화의 풍성함을 손상하지 않고, 더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도록 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를 관심 있게 봐 온 것으로 안다.
=임권택 영화는 순수 예술은 분명히 아니고, 넓은 의미에서 할리우드 스타일인데, 그 안에서 가치를 살리고 자기 의미를 드러낸다. 또 제재 자체는 센티멘탈하다. 그런데 거기서 그냥 흘러버리지 않고 절제하는 연출 기법이 빼어나다. 존 포드와 닮았다고 할까. 지금 그런 식으로 영화 하는 감독이 없다.
-2년 전 <씨네21>과 인터뷰했을 때, “<쉬리>는 추상적이고 <거짓말>은 구체적”이라고 말한 표현이 인상깊었다. 임권택 외에 주목하는 한국 감독이나 영화를 꼽는다면?
=나는 국적을 따져가면서 영화를 보지 않는다. 그런데 국가의 상황에 따라서 뛰어난 작가가 나오는 경우가 있다. 배창호 감독도 좋았지만, 70년대에 이장호 감독의 영화가 매우 좋았다. 10년 뒤에는 대단한 작가가 될 것으로 봤는데 지금 영화를 안 하고 있다. 근래에는 홍상수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과 <강원도의 힘>이 탁월한 영화였다. 그의 다음 영화들은 아직 못 봤고. 정재은 감독의 <고양이를 부탁해>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특히 뛰어난 게 대상들을 생생하게 포착하고 있었다. 16㎜ 영화 중에서 가끔씩 대상을 빼어나게 포착하는 게 나오는데, 이 영화에 그런 느낌이 있다. <거짓말>은 남녀관계라는 소재를 아주 재미있게 풀어내고 있었다.
-일본의 젊은 감독 중에서 기대주를 꼽아본다면?
=압도적으로 구로사와 기요시다. 아오야마 신지도 좋은 영화가 몇 편 있지만. 가와세 나오미도 완전히 승복하긴 어렵지만 주목하고 있다. 구로사와 기요시는 학생 때 16㎜로 찍던 정신과 기법이랄까, 그게 35㎜에서도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개성적이고 자기 세계를 꾸준히 판다. 매우 비타협적이다. 이제서 관객들이 그의 영화를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그는 심리상태를 이야기를 통해서가 아니라 화면으로 먼저 제시해버린다. 그렇게 묘사해가는 게 아주 뛰어나다.
-대만의 허우샤오시엔 감독이, 오즈 야스지로에 대한 ‘오마주’로 만드는 신작에 출연했다고 하는데.
=허우샤오시엔이 <밀레니엄 맘보> 찍을 때 온천장 손님으로 출연해달라고 해서 거절했다. 그래서 이번엔 출연했는데 헌책방 손님으로 30~35초 정도 나온다. 대사는 “이것 주십시오, 감사합니다”가 다고. 편집 때 잘릴지도 모르겠다. 영화제목은 <커피 시광(時光)>인데, ‘시광’이라는 말이 따뜻한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따뜻한 시간을 가진다는 뜻이다. 완전히 픽션이고, 오즈가 나오지도 않는다. 오즈 영화의 분위기나 정신 같은 걸 담는 거다. 촬영 때 헌책방이나 다방에 카메라를 숨겨놓고 찍어서, 일반 손님들이 영화 찍는 줄 모르고 들어와 커피마시고 나간다. 바로 옆에 주연인 아사노 타(#다#)나노부가 앉아 있고. 그렇게 자연스런 스타일로 찍고 있다.
-허우샤오시엔이나 에드워드 양과 개인적으로 친한 것으로 알고 있다. 허우샤오시엔은 <밀레니엄 맘보>에서 스타일이 크게 바뀌었는데 어떻게 보나?
=그 전 영화 <해상화>는 연출, 카메라 움직임, 내용, 모든 게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영화였다. <밀레니엄 맘보> 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는가 놀랐다. 자기가 갖고 있던 예술세계를 일거에 버리고. 큰 모험인데 나는 그 모험을 지지하고 싶다. <커피 시광>은 오즈에 대한 오마주여서 대단히 차분하기는 하지만 그 양반 행보로 봐서 어쩔지 모르겠다.
-베니스, 로카르노 등 국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았는데, 서구의 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를 대하는 태도에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이 사라지지 않는 건 왜라고 보는지?
=동양 전체의 심각한 문제라고 볼 수 있다. 현대의 한국, 현대의 일본을 밀도있게 다룬 영화들은 절대 수상 못한다. 임권택 감독도 결국 옛날얘기로 상을 받았다. 문제는 심사위원들에게 있다. 그 질이 형편없다. 텔레비전을 의식해서 여배우들을 심사위원으로 앉히는 것도 말이 되는가. 유럽영화제는 심사위원의 질을 높이지 않으면 대단히 위험해질 수 있다.
-도쿄대 총장 할 때 서울대발전연구회 회원으로 몇차례 한국에 오기도 했다. 그때 느낀 한국 교육의 문제점 같은 게 있는지?
=지금은 서울대 총장이 바뀌어서 어떻게 되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한번은 회의할 때 참석자들이 ‘한국 사람들은 독창성이 없다’고 말했을 때 반발심이 생기더라. 일본에서도 회의하면 ‘일본 사람들 독창성 없다’는 말 많이 한다. 그때 그랬다. 임권택 감독이 칸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사실을 들어, 독창성 없는 나라의 감독이 왜 상을 받았겠냐고. 지금 상황이 나쁘니까 바꾸는 게 아니다. 지금 상황에 더 나아지도록 하는 것일 뿐이다. 대학이 마비됐다, 이렇게 말하면 좋은 대안이 안 나온다. 지금 잘 하는데 좀더 나은 쪽으로 가자, 이래야 한다.
-영화비평의 임무가 뭐라고 생각하는지?
=현재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의 어떤 면을 옹호, 지지할 것이냐는 문제다. 미래가 있는 영화를 지지해야 한다. 이전 영화보다 좋아졌다, 이런 게 아니라 언젠가 폭발할 수 있는 여백을 가진 영화가 있다. 그게 미래가 있는 영화다. 영화는 달리 비유하자면 시한폭탄이다.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 대해 30년대 이전의 평들을 보면 나루세 미키오가 언젠가 터질 거라는 예감을 전혀 못하고 있다. 그래선 안 된다. <고양이를 부탁해> <거짓말> 이런 영화는 미래가 있는 영화다. 또 영화비평이 좋다고 했다가, 나쁘다고 했다가 이런 식으로 왔다갔다 하면 안 된다. 미국의 <뉴욕타임스> 같은 신문도 존 포드 당시에 그의 영화가 형편없다고 했다. 지금 쓴 평이 30~40년 지나도 일정한 가치와 설득력이 있는, 그런 글을 지향해야 한다.
광주/임범 기자 isman@hani.co.kr,사진 광주영화제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