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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멋대로해라>부터 <다모>까지,MBC드라마의 대반란 [5]

개인주의, TV에 뿌리내리다

<앞집 여자>의 경쾌한 여성, 연약한 남성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 거야. 길가다 교통사고처럼 아무랑이나 부딪칠 수 있는 게 사랑이야. 사고나는 데 유부남이, 할아버지가, 홀아비가 무슨 상관이 돼, 나면 나는 거지….”(노희경의 <거짓말>, 1998)

하지만 가볍게 훈방조처되는 처녀·총각과 달리 유부남·유부녀의 교통사고는 공권력의 개입과 상관없이 어떻게든 처벌됐다. 드라마 안이든 밖이든 그게 현실이었다. 그 강팍한 조건을 에둘러가기 위해서 불륜이나 동성애 같은 ‘비정상적’ 사랑은 온 존재를 내던진, 심각한 그 무엇이어야 했다.

“난 당신을 만지고 싶었던 게 아니야! 잠자리를 하자고 한 게 아니야! 사랑하자고 한 거야! 외로우니까, 위로하자고 한 것뿐이야! 사람이 사람을 위로할 수 없다면 이 힘든 세상 어떻게 살아.”(노희경의 <슬픈 유혹>, 1999)

“10년만 지나면 우리 지금처럼 젊지 않어. 그때 누가 우리 곁을 지켜줄까? 남편일까, 애인일까…? 그 남자도 별 수 없어. 영원히 멋질 거 같애? 배나오고 술먹고 나선 냄새 죽죽 풍기면서 씻지도 않고 쓰러져 자고.”

애경에게 애인은 일회용 건전지, 남편은 충전 건전지쯤의 의미다. 가히 진정한 개인주의자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

불순물이 조금이라도 끼어서는 안 되는 수정 같은 사랑이어야 했고, 그래서 새로운 당신이 아닌 남편(혹은 아내)과의 애정은 부정돼야 했다. ‘All or Nothing’의 게임. 그런데 <앞집 여자>(극본 박은령, 연출 권석장)의 애경(변정수)은 그 유창하고 쿨한 논리로 가볍기만한 불륜이 가능하다고 설파하고 나섰다. 조약돌 20개를 모으면(만날 때마다 하나씩 모았다가) 미련없이 버리고 가는 놀이가 됐다. 불시에 찾아오는 메마른 결핍감을 채우려는 욕망도 아니다. “이건 삶의 활력소일 뿐”이니까. 여기에 운명 같은 사랑 따위는 없다. 남편이라고 다를까.

“10년만 지나면 우리 지금처럼 젊지 않어. 그때 누가 우리 곁을 지켜줄까? 남편일까, 애인일까…? 그 남자도 별 수 없어. 영원히 멋질 거 같애? 배나오고 술먹고 나선 냄새 죽죽 풍기면서 씻지도 않고 쓰러져 자고.”

애경에게 애인은 일회용 건전지, 남편은 충전 건전지쯤의 의미다. 가히 진정한 개인주의자의 탄생이라 할 만하다. 어디서 찾았고 어떻게 온몸에 새겨넣었는지 알 수 없는 애경의 자존감과 독립심은 <바람난 가족>의 호정(문소리)과 비슷하다. 그닥 결핍감이 없어 보이는 호정이 바람 피우는 남편에게 “너나 잘살아”라고 진정으로 말하는데, 애경도 남편에게 진심으로 그렇게 충고할 만한 위인이다(애경 남편의 성기능이 살짝 맛이 간 것으로 설정한 건 그래서 여러모로 유감이다). 아내의 불륜이든 가장의 부도이든 밝혀진 ‘사고’를 가장 빨리 수습하는 게 애경 부부라는 점은 당연해 보인다.

TV에 가부장은 없다?

거꾸로 <앞집 여자>의 남자들은 마초와는 거리가 멀지만, 위로받거나 의존하는 사랑을 나누기에는 여자들보다 덜 성숙하다. 오히려 돌봐줌이나 치료가 필요한 연민 어린 존재다. 상태(손현주)는 아내 미연(유호정)이 접촉사고를 낸 날 ‘중고 마누라’보다 새 차의 안위를 걱정하더니 “놀란 데는 침이 최고야. 침 한대 맞자”며 몸을 더듬어 경멸의 대상이 된다. 또 유정(허영란)과의 사이가 들통나자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보려고 아내에게 참회의 편지를 쓴다. 그런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사랑하는 나영 엄마. 내 미안한 맘 말로는…”까지 간신히 써놓고는 쿨쿨 낮잠에 빠져든다. 그렇다고 그가 미운 건 아니다. 삶이 그를 속이는 것뿐이니. 상태는 자기 아내와 연결된 정우(김성택)의 휴대폰을 들고 “아줌마, 가정을 버리세요! 아줌마, 줌마, 줌마∼”라고 격려의 추임새를 넣는 기구한 짓을 선의로 하지 않던가. 유정(허영란)과 육체 관계를 갖지 않는 게 플라토닉 러브라기보다 동화 같은 판타지를 꿈꾸는 퇴행으로 보이는 건 그래서다.

상태와 반대 지점에 선 정우는 치료가 필요해 보인다. 12년을 오로지 미연만 가슴에 품고 살았다는 점도 놀랍기는 하지만, 이보다는 그런 사랑의 대상이 처한 조건을 전혀 가늠해보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역시 어떤 환상에 빠져 있다(정우는 미연에게 미국에 가서 살며 세계 곳곳으로 놀러다니자고 말하는데, 미연이 내 딸은 어쩌고 하자 화들짝 놀란다).

유정과 수미(진희경)·봉섭(이두일) 부부는 특이한 캐릭터로서 유쾌한 감초 구실을 충분히 해냈지만 그 이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유정은 이제껏 볼 수 없었던 위풍당당 정부(情婦)다. 기세좋게 카페로 들어선 미연에게 머리채를 잡히기는커녕 “이혼해주세요, 제발”이라고 무릎 꿇고 호소해 상대방을 화들짝 놀라게 하는 동시에 창피하게 만들어 쫓아버린다. 또 “한 커플 헤어져 두 커플이 행복해지면 좋은 것 아니냐”며 입바른 소리를 해 미연과 상태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데, 이런 ‘엽기적인 그녀’가 도저히 불행에 빠질 것 같지는 않다. 수미·봉섭 부부에게 남편과 아내의 위치는 경제적 능력이나 침대 역학에서 여느 부부와 정반대다. 그래서 이들의 일상은 소박하며 코믹하지만 가장이란 권력의 모습은 설사 남성에서 여성으로 바뀌어도 달라질 게 없다고 웅변하는 듯하다.

<앞집 여자>는 초·중반의 휘몰이에 비해 그 도가 끝으로 갈수록 잦아들더니 안전한 마무리로 끝났다. 혹자는 그걸 타협이나 드라마의 한계라고 비판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앞집 여자>는 여성끼리의 연대를 명시적으로 외치지 않고, 또 남성을 배제의 대상으로 삼지도 않고, 쿨한 개인주의자가 되는 게 현명하지 않으냐고 나직히 역설하는 희귀한 TV드라마다. 눈높이와 호흡을 정확히 생활드라마에 맞춰놓고서 말이다. 이성욱 lewook@hani.co.kr

<앞집 여자> 박은령 작가 인터뷰

미연과 애경, 내 안에 부글거리는 마그마의 두 얼굴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박은령(37) 작가는 지난해 MBC 베스트극본 공모에 당선되기까지 “부글부글 끓는 인고의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이얼이 룸살롱에서 옷벗고 기타를 칠 수밖에 없는 장면을 보는 순간, 가슴이 미어졌다고 한다. “이상은 저만큼에 있는데 한 발자국도 다가갈 수 없는 그 심정이 나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10년 동안 ‘아줌마’로 지내면서 드라마를 너무 쓰고 싶었으나 재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자신도 없었던 시절을 딛고 쓴 첫 시리즈 <앞집 여자>를 보고 스승인 이금림 작가는 “은령의 나이와 고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발로 끝날 작가가 아니란 걸 보여줬다”는 메일을 보내왔다.

드라마 작가로 데뷔하기까지 어떻게 지냈는지. 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하다 4학년 때 방송사에서 구성작가로 잠시 일하면서 재미를 붙였다. 그런데 대학을 졸업하면서 얼결에 결혼을 했고 허니문 베이비까지 갖게 됐다. 당연히 일을 할 수 없었고, 그 때문에 늘 마음속에 마그마 같은 게 끓었다.

<앞집 여자> 캐릭터 중에 자신과 동일시한 인물이 있다면. 미연과 애경이 모두 나의 페르소나다. 미연은 새침데기 같은 소녀이면서 동시에 아줌마다. 바람 피운 남편 때문에 가슴이 미어져 길을 가다가도 트럭에서 “무 천원에 3개” 하면 ‘싸다’고 생각해 다 잊고 달려가는 인물이다. 애경은 말을 세게 하는 편인데, 내가 그렇다. 조용히 있다가도 입을 열면 깨는 말을 하고는 한다. 단막극 쓸 때도 싸한 여자 캐릭터가 많았다. 겉은 얼음인데 속은 따뜻한 덩어리가 있는 여자. 그런 인간이 좋다.

애경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이 드라마가 애경이란 캐릭터에서 출발했다. 그다지 예쁠 것도 없는 전형적인 아줌마 선배가 있는데, 어느 날 보니까 용됐더라. 세련되고 멋도 있고 자신감도 넘치고. 살살 캐봤더니 애인이 생겼고, 연애를 하면서 사람이 달라진 것이었다. 요것봐라 하는 생각이 들면서 애경을 만들었다. 애경이 가장 쿨한 캐릭터라고들 하는데, 능력있는 남편이 바깥에서 바람 피우면서 집에서는 다정하고 훌륭한 아빠로 지내기도 하지 않나? 애경도 그런 셈이다.

극본을 쓰면서 타협을 하진 않았나. 내 생각을 98%까지 지켰다고 본다. 나머지 2%를 다 채울 수도 있었겠지만 그건 나 혼자 만족하는 100%가 될 것 같았다.

절묘한 느낌이 드는 캐스팅이다. 의견을 보탰나. 인물을 만들어갈 때, 이 사람은 누구다 하고 정해놓고 쓰는 경우가 많다. 원하는 대로 다 되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만족스러웠다. 예전부터 손현주씨를 아주 좋아했는데, 머릿속에 그렸던 그 남자를 딱 보여주더라. 그리고 허영란씨. 미연에게 무릎 끓고 비는 장면 때문에 꼭 그가 해야 한다고 했다. <순풍 산부인과>에서 멍하게 빵 뜯어먹는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무모한 이미지라고 할까. 아주 잘해주었다.

여성과 남성을 바라보는 시각은. 기본적으로 다른 차이가 있다고 볼 뿐이다. 수십년을 함께 살아도 절대로 다가서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내가 페미니스트는 아니다. 난 남자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다. 허술하나 끌어안을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남성들 말이다.

▶ <네 멋대로해라>부터 <다모>까지,MBC드라마의 대반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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