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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1]
이다혜 2003-08-29

규모의 팽창보다 균형있는 수상을

로카르노만의 특색 잃고 사회성 짙은 작품에 편중, 대상작은 논란 여지 남겨

로카르노=글 임안자/ 해외특별기고가·사진 정한석

1920년대 유럽 예술인들은 로카르노를 유토피아의 도시로 불렀다. 그리고 1947년 이곳에 영화제가 들어서면서부터 유토피아의 꿈은 영화예술과 조우하고는 오늘의 이름난 국제적 영화제로 성장해왔다. 이런 오랜 문화의 전통을 배경으로 한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가 8월6일 저녁 대형 야외상영장인 피아차 그란데에서 빈센트 미넬리 감독의 1953년작 뮤지컬코미디 <더 밴드 웨건>(The Band Wagon)으로 차분히 막을 올렸다. 이날은 38도를 오르내리는 폭염에도 불구하고 7500석의 광장이 관객으로 꽉 찼고, 이곳에서 열흘 동안 매일밤 새벽 두세시까지 영화축제가 계속됐다.

56회 행사의 특징을 말하자면 전에 비해 눈에 띄게 커진 프로그램과 혼란스럽도록 여러 갈래로 갈라진 부문이었다. 듣자니 2003년 영화제에 참가신청을 요구한 영화는 모두 1440편. 그 가운데서 뽑힌 장·단편 440편이 15개 부문을 통해 7개 상영관에서 상영됐는데, 440편은 20∼30년 전만 해도 상상키 어려운 많은 숫자이고 지난해에 비해서도 100편이 더 많다. 지난해에 비해 관객 수가 20% 늘어나기는 했지만, 무엇보다 상영관이 모자라 숱한 영화들이 한번 상영으로 그쳐 아쉬움을 낳았다. 브에나 비스타 스위스 대표 크로티는 8월13일치의 <바즐러 자이퉁>과의 인터뷰에서 “로카르노영화제는 소규모 영화제 중에서 큰 영화제로 남는 게 큰 영화제 중의 작은 영화제가 되는 것보다 낫다고” 충고를 보냈다.

급성장의 후유증

그럼 급성장의 배경은 무엇인가? 여기에선 두개의 설명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나는 로카르노영화제가 2002년부터 A급 영화제로 급상했다는 점과 또 하나는 현 집행위원장 이렌 비냘디의 야심과도 관계되는 문제인데, 한마디로 기존의 조그만 영화제의 틀에서 벗어날려는 집행위원장의 영화제 정책이 낳은 결과라고 말할 수 있겠다. 2001년, 말썽 많던 마르코 뮬러가 물러나고 같은 이탈리아 출신인 비냘디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을 때 스위스 영화계는 두손 들어 환영하면서 ‘로마의 여사자’라는 애칭을 달아주었다. 커뮤니케이션을 전공한 새 집행위원장은 조직위와의 고질적인 불협화음을 협조적 분위기로 바꿔놓는 데 성공했고 그의 특유의 열린 대화 스타일 덕분에 대중매체와도 쉽게 가까워졌다. 그 결과 짧은 시간에 비냘디의 인기는 높게 치솟았고 이 여인이 오르는 무대마다 청중은 뜨거운 박수로 환영했다. 그런데 올해에는 좀 달랐다. 먼저 박수가 뜸해졌고 그걸 반영이라도 하듯 비냘디의 얼굴이 시종 그리 밝지 않았다. 혹시 자신이 불러일으킨 급성장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건 아닌지.

로카르노영화제가 과연 A급으로 탈바꿈할 수 있느냐에 대한 논쟁은 비냘디 부임 훨씬 이전부터 진행됐었다. 그러나 약한 영화산업과 영화시장의 한계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고, 그래서 신인 감독의 초기 작품에 초점을 둔 중형 영화제를 택하여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영화제로 발전했다. 하지만 비냘디의 영화제 철학은 실용주의보다는 팽창주의쪽으로 기우는 듯하며 그 결과로 이젠 칸, 베를린, 베니스, 산 세바스찬 같은 유럽의 덩치 큰 영화제와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하고 특히 불과 2주를 사이에 두고 치러지는 같은 언어권의 베니스와는 비냘디 스스로의 말마따나 피나는 경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2002년부터 대상영화의 수상금을 평소의 곱절인 9만프랑으로 올린 것도 베니스를 의식해서 결정된 것이다.

아무튼 A급 영화제의 위상을 지키기 위해선 좋든 싫든 할리우드를 피할 수 없는데, 문제는 로카르노영화제가 고질적으로 예산부족에 시달려왔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국제적 경쟁력에서 떨어질 게 뻔하다. 올해 책정된 예산은 900만스위스프랑을 조금 넘은 것이었는데, 그나마도 정부나 시의 지원은 반절도 못돼 대부분을 후원금으로 충당해야 할 지경이다. 그래서 그런지 올해 로카르노까지 온 할리우드 제작은 영국 감독 나이젤 콜의 영화 <칼랜더 걸즈>뿐이었고, 그렇다고 호기심을 일으킬 만한 유럽의 이름난 감독의 영화가 들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산 세바스찬 영화제와 ‘싸워서’ 이긴 영화는 올 경쟁부문에 올랐던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었고, 그것도 실은 감독이 로카르노를 선택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런저런 2003년 행사는 A급 영화제로서의 가능성과 한계를 점쳐보고 특히 집행위원장의 영화선정 방향과 성향을 좀더 정확히 알아볼 수 있는 기회였다. 올해의 프로그램을 바탕으로 선정 방향을 짚어본다면, 한마디로 사회성 짙은 영화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예를 들면 종교적 대립과 분열, 전쟁과 그 후유증, 소수민족과 여성에 대한 차별대우, 청소년 문제를 사회·정치적, 또는 가족관계의 차원에서 다룬 영화들이 부문에 상관없이 올해 많았던 것도 그 때문일 것이고, 모두 인간의 존엄과 인권의 존중을 설파하고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공통점을 보였다. 특히 경쟁영화 부문은 동남아시아, 동유럽 그리고 중동지역의 영화가 다수였는데, 그게 영화제 사이의 경쟁이나 돈문제 때문만은 아닌 것 같고 집행위원장의 영화제 철학으로 보는 게 더 정확한 듯하다. 비냘디는 기자회견을 통해, “올해 새로운 경향은 없다. 영화제의 각 부문은 경쟁영화 성격과 공통점을 갖고 있다. 즉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지역의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했던 영화감독들의 영화에 관심을 두었고 사회적,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인간문제를 주요시했다”고 영화 선정의 기본 방침을 밝힌 바 있다. 다시 말해, 저개발 지역 감독들과의 연대의식을 강조한 발언이었는데 그런 차원에서 켄 로치 감독에게 명예표범상이 주어졌고 획기적인 119편의 ‘재즈와 영화’의 회고전도 따지고보면 미국 백인사회의 인종차별에도 불구하고 재즈 문화의 황금기를 이룬 흑인 음악가들에 대한 헌정식이었다. 더불어 로카르노영화제는 지난해부터 ‘인권’부문을 새로 만들어 인권에 관한 영화상영과 심포지엄을 주선하고 있으며 다른 영화제서보다 여성감독의 영화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크다.

연대의식도 좋지만

한 기자는 로카르노영화제가 유엔총회를 닮아간다고 비아냥거렸지만 비냘디의 연대의식에 누가 반기를 들겠는가. 다만 영화에 대한 판단의 기준이 평형을 잃을까 싶고 그런 미심쩍음은 올해의 수상작 선정과정에서 현실로 드러났다. 올해 대상을 받은 파키스탄의 여성감독 사비아 스마르의 영화 <말없는 (우)물> (Silent Water)의 수상 결과에 대해 스위스 국영 텔레비전의 기자나 주요 일간지인 <취리히 차이퉁> 기자는 심사위원들이 “정치적 판단을 내렸다”고 평했다.

심사가 제대로 됐더라면 김기덕 감독에게 대상이 주어졌을 것이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니다. 기자회견장에서 만난 카를로비 바리 영화제 집행위원장 자오라로바는 “김 감독 영화는 이제 클래식 수준에 올랐다”고 극찬하면서 “대상을 받고도 남는다”고 했다. 또 김 감독과 인터뷰를 한 23명의 국제 매체기자들이 모두 통역을 맡은 내 앞에서 대상을 받을 것이라고 엄지손가락을 들었다. 올해 경쟁영화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독창적인 영화로 꼽혔던 김 감독의 영화가 대상을 놓친 건 무척 아쉽지만 다음 영화를 기대하면서 스위스 불어권의 일간지 <트리뷴 드 제네브>에 실린 8월15일치의 두 기사 가운데 에마뉘엘 쿠에노 기자의 한 구절을 인용하겠다. “최근 로카르노영화제에서 행해지는 우수작을 곡해하는 잘못된 심사 경향을 불신해야 한다. 지난해에 구스 반 산트의 영화에 대한 오판이 있었음에도 이번 김기덕의 새 작품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에서 또 실수를 한 건 이해하기 어렵다. 이 영화야말로 경쟁부문에서 제일 우수했을 뿐만 아니라 2003년에서 본 가장 중요한 작품 중 하나였는데 말이다.”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1]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2]

▶ 제56회 로카르노영화제 결산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