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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 순교 혹은 해방
2001-01-05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무셰트>

무셰트

Mouchette 1967년,

감독 로베르 브레송 출연 나딘 노르티에, 마리아 카르디날

12월30일(토) 밤 9시

로베르 브레송의 영화들은 종종 죽음을 육체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는 ‘해방’, 또는 잔인한 세상에서 순수함을 되찾기 위한 일종의 ‘순교’로 그리곤 했다. 예컨대 <시골 사제의 일기>(1951)의 젊은 사제 앙브리쿠르나 <잔 다르크의 재판>(1962)의 잔이나 <당나귀 발타자르>(1966)의 당나귀나 모두 그런 길을 걸어갔다. 무셰트 역시 그랬는데, 그러나 그녀는 존재의 비참함에서 벗어나 은총의 상태로 승화하는 통로로서 죽음을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스스로 ‘결행’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바로 그 ‘의지’가 우리 마음속에 심적인 고양감을 불러일으킨다.

1937년에 발표된 조르주 베르나노스의 소설 <무셰트의 새로운 이야기>를 영화로 옮긴 <무셰트>는 크레디트가 지나간 뒤 올가미에 걸린 새를 보여준다. 도망치려고 안간힘을 쓰며 홰를 치다가 결국에는 날갯짓을 포기하는 새, 그건 곧 무셰트의 처지에 대한 은유라는 것이 밝혀진다. 어느 가난한 가정에 살고 있는 열네살 소녀 무셰트에게 삶이란 온통 그녀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은 것들로만 이뤄져 있는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중환을 앓고 있고, 아버지는 걸핏하면 그녀를 학대하는 알코올 중독자이다. 학교에서도 그녀는 결단코 그 누군가로부터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학교가 파한 뒤, 숲속을 헤매던 무셰트는 어두운 밤 그만 비를 만나게 된다. 이 난처한 상황 속에서 나타난 밀렵꾼 아르젠느는 무셰트에게 도움을 주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녀의 처녀성도 앗아가버린다. 다음날 아침 그녀의 어머니는 숨을 거두고 무셰트 역시 연못에 몸을 던져 자살한다.

이전에 로베르토 로셀리니는 <독일 0년>(1947)에서 황폐한 전후 독일사회의 역사적 비극을 묘파하기 위해 어린 주인공 에드문트의 섬뜩한 자살 모티브를 이용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에 반해 베트남전이 절정에 달했을 때 만들어진 <무셰트>는 동시대와의 불화를 선포하지 않는다. 심지어 브레송은 무셰트가 자살하는 명확한 동기조차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다. 처녀성의 상실도, 어머니의 죽음도, 마을 여인들의 비난도 무셰트의 자살을 완벽하게 해명해주진 못한다(브레송은 원작에서 어떤 심리묘사나 분석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것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단지 브레송은 무셰트가 스스로 목숨을 버리기까지의 과정을 운명에 의한 일종의 ‘수난기’처럼 보여준다. 그렇다면 여기서 그녀가 스스로 생을 결정하는 행위는 그녀에게 가해진 잔인함을 전도된 해방으로 바꾸는, 자기 표현의 수단인 것이다.

드레스로 몸을 칭칭 감고 언덕에서 구르는 세번의 자살 시도 끝에, 무셰트는 연못 위에 번지는 물결과 텀벙하는 소리만을 남기고 세상과 작별한다. 브레송은 그 위에 천상의 소리와도 같은 몬테베르디의 <성모의 노래>(Magnificat)를 올려놓음으로써 무셰트가 육체를 버린 대신 영적인 자유를 얻었다는 암시를 남겨놓게 된다. 디제시스 바깥에서 들리는 음악으로 브레송의 영화 인생에서 마지막이 될 이것은 또한 그간 정적(靜寂)이 지배해 무정하게만 보였던 영화에 어렴풋하게나마 구원의 복음을 전해준다(우연찮게도 <무셰트> 이후로 브레송은 끝간 데 모를 염세주의가 미만한 ‘후기’로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영화가 끝나면 아마도 우리는 불가해하게 가혹하고 절망적으로 숭고한, 한편의 감동적인 무성영화를 본 듯한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홍성남/ 영화평론가antihong@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