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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종합선물세트 [10] - 일본 소설 ①
한지혜(소설가) 2003-09-09

일본 소설이 좋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도 읽는 데 부담이 없다는 점이다. 그들의 소설에는 어떠한 강박도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에 대해서, 민족에 대해서, 이념에 대해서 그리고 가족에 대해서. 일본 소설의 주인공들은 그 어떤 것에도 구속되어 있지 않다. 오직 개인의 일상과 개인의 존재감만이 있을 뿐이다. 등장인물은 나와 너와 그리고 그 혹은 그녀가 전부다. 주인공들의 일상은 그들과의 관계가 유지되는 테두리 안에서 이뤄진다. 관계에 얽매이는 법도 없다. 치정 정도가 사람과 사람이 만나 가장 복잡하게 꼬인 관계라고나 할까. 그들의 소설은 만나다, 헤어지다, 살아가다 딱 그 정도의 관계 안에서만 고민하고 그 안에서 방황한다. 담백하다 싶게 개인적인 소설, 그게 바로 일본의 ‘사소설’이다. 그들은 오직 자기 자신의 무게에 대해서만 고민하는데 강박이 없는 존재의 무게는 가벼운 법이다. 읽는 마음도 가볍지 않을 수 없다. 물론 그들의 소설이 항상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볍고도 무거운

<해변의 카프카>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작가인 하루키는 가벼운 작가이자 동시에 무거운 작가다. 하루키의 소설은 크게 두 가지 스타일로 나뉜다. <상실의 시대>처럼 동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일상을 특유의 감성으로 디테일하게 쓴 소설이 있는가 하면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처럼 세계의 구조와 인간 실존의 문제를 철학적으로 조망한 소설이 있다. 전자는 가볍고, 후자는 다소 무겁다. 최근 출간한 <해변의 카프카>는 후자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가출한 15살 소년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이 소설은 단순하게 말하면 한 소년의 내면이 성장하는 과정이다. 주인공이 35살이 아니라 15살이다보니(하루키의 소설은 35살 남자가 주인공인 경우가 많다. 35살 그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나는 가끔 그게 궁금하다) 요리를 하고 연애를 하고 맥주를 마시는 일은 없지만, 음악을 듣고 도서관에서 책을 뒤적여 해답을 찾는 방식은 여전하다. 게다가 의식과 무의식이 시공을 초월한 대립을 통해서 비로소 어떤 답을 찾아가는 다소 난해한 설정은 <세계의 끝…>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변의 카프카>는 우리가 알고 있는 하루키 소설과 다소 다르다. 작가후기에서 그는 불후의 걸작을 쓰고 싶다고 했던가. 비틀스와 듀란듀란 대신 나쓰메 소세키와 고대 소설인 <겐지 이야기>와 그리스비극을 차용하고 있는 <해변의 카프카>는 한결 깊이있고 풍부해 보이기는 하지만 때문에 하루키 특유의 감수성은 오히려 빛이 바랜 느낌이다. ‘걸작’에 대한 부담을 덜어냈다면 훨씬 재미있는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의 문체는 감성적인 소설에 더 적합하다. 형이상학은 그에게 버거워 보인다.

또 다른 무라카미인 류는 퇴폐적이고 감각적이며 관능적이고 폭력적인 소설을 즐겨 쓴다. 그에게 아쿠타가와상을 안긴 <한없이 투명한 블루>에서부터 그가 지속적으로 택하는 소재는 마약과 섹스와 폭력. 그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를 즐기고 있기도 하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 세계에 냉소적인 시선을 던진다. 이러한 경향은 신작 <너를 비틀어 나를 채운다>에서도 예외없다. 아라키 노부요시의 사진을 그대로 옮겨 그린 듯한 책표지가 말하듯 이 책은 SM에 빠져 있는 일곱명의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에게 살해된 남자가 여자들의 기억을 찾아내어 그들이 사디즘에 빠진 원인을 말해주는데, 그 원인이란 게 일곱명 모두 유년 시절의 성적 학대라는 결론이 좀 씁쓸하다. 하기야 여성을 바라보는 무라카미의 시선은 획일적인 데가 있다. 그에게 있어 여성은 성적으로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존재 둘 중 하나일 뿐이다. 여성에 대한 무라카미의 입장은 비교적 최근작인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에서 확연하게 드러난다. 세계 미식가협회 회원이기도 한 무라카미 류가 생각하는 가장 훌륭한 세계의 요리 31개를 엽편소설 형식으로 소개하고 있는 이 책에서 편마다 요리와 함께 여자가 등장한다. 그 여자들에 대한 묘사는 요리에 대한 그의 평가와 일치한다. 그에게 여자란 입맛 다시며 먹어치우는 요리에 불과할 뿐이다.

일탈에 관하여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회유곡><인간 실격>

무라카미 류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일탈에 대해 쓰는 시마다 마사히코는 다자이 오사무와 더불어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일본 작가다. 무라카미 류의 일탈이 세계에 대한 나르시시즘이라면 마사히코는 무정부주의를 꿈꾸는 소설가다. 그에게 있어 관(觀)으로 말할 수 있는 모든 세계는 부정해야 하는 대상이다. 그는 체제와 이념을 거부한다. 틀 안에 갇히는 것을 싫어하고 규정에 반발한다. 심지어 그는 그 자신도 부정한다. 아니 조롱한다. 모든 이념과 집단의식이 그의 소설에서는 하나의 농담이자 유머가 되어버린다. <부드러운 좌익을 위한 회유곡>은 그 농담의 절정이다. <꿈의 메신저>에는 버려진 유조선을 개조하여 움직이는 무국적 도시를 건설하려는 소설가가 등장하는데 그런 도시의 건설은 바로 마사히코의 꿈이기도 하다. 마사히코의 소설은 워낙 독특해서 정상적인 코드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시각도 있다. <악마를 위하여>를 읽어두면 다른 마사히코의 소설을 이해하는 데 한결 도움이 될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 아쿠마 카즈히도는 악마적인 내성을 가진, 분열된 자아로 세상을 살아가는 인물이다. 마사히코의 소설적 자아인 셈이다. 마사히코의 모든 소설은 아쿠마 카즈히도가 썼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39살에 자살한 다자이 오사무는 이른바 ‘퇴폐의 미학’을 보여주는 작가다. 그의 삶이나 소설적 행보는 우리나라 소설가 이상을 연상시킨다. 상처입은 예술가 소설의 전형인 <인간 실격>은 예민한 자아로 인하여 세상과 화합하지 못하고 끝내 유리된 삶을 살다가 미쳐버리는 한 사내의 일대기로 그 자신의 정신적 자화상으로 불리기도 한다. 세상과 맞물리지도 등돌리지도 못하는 인간 내면의 풍경을 너무나 적나라하게 들여다보고 있는 이 소설은 패전 뒤 일본사회에 만연하던 허무주의의 실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작가의 투신자살이라는 극적인 상황과 맞물려 지금까지도 일본 문청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다.

소설적인 미의식

<모래의 여자>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

지극히 소설적인 것들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이 잘 보여주고 있다. 오직 소설로만 가능한 이야기, 그것이 마루야마 겐지가 지향하는 소설이다. 마루야마는 일본 문단 내에서도 매우 구도자적인 소설 쓰기를 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사실 그의 에세이나 소설에서 드러나는 여성관이나 세계관은 나하고 맞지 않는다. 맞을 까닭이 없다. 수시로 여성을 무뇌아나 단세포 생물로 취급하는데 누군들 맞장구치고 싶을까.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소설은 값진 데가 있다. ‘소설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건강한(?) 마초의 전형이다 싶은 그가 어떻게 이렇게 섬세한 문장을 쓸 수 있을까 의심이 날 정도로 그의 문체는 아름답다. 소설을 공부하는 입장에서는 훔치고 싶은 문체다. 우리나라 몇몇 작가들은 마루야마 겐지의 문장과 이미지를 그들의 소설에 차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기도 한데, 그네들의 심정이 이해가 갈 정도다. 겐지의 소설 가운데 특히 문체가 아름다운 소설 가운데 하나가 <봐라, 달이 뒤를 쫓는다>다. 해변가에 사는 청년이 죄를 짓고 도망쳐온 것이 분명해 보이는 어릴 적 여자친구와 오토바이를 타고 고향을 떠났다가 되돌아오는 이야기를 그린 이 소설은 오토바이가 질주하며 보는 거리의 풍경이 내용의 전부라고 할 수 있음에도 지겹거나 단조롭지 않다. 오히려 장편의 시를 읽는 것과 같은 감동이 있다.

아베 고보의 <모래의 여자>도 문청들에게는 필독서다. “8월의 어느 날, 한 남자가 행방불명되었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인간의 실존을 생각하게 한다. 날마다 똑같은 분량의 모래를 퍼내야 살 수 있는 모래구덩이에 갇힌 남자의 삶은 읽는 것만으로도 입안이 버석거린다. 시시포스의 신화를 연상시키는 어쩔 수 없는 반복의 삶도 가슴 메이지만, 몇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 비로소 탈출의 묘안을 세운 남자가 그 방법이 탈출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순간 탈출을 미뤄두는 마지막 대목은 특히 인상적이다. 정작 삶을 억압하는 건 희망 혹은 가능성이 아닐까. 잠재된 가능성이라는 건 사실 실현 여부가 불가능한 가능성이기도 하다. 희망도 없이 모래구덩이에 갇힌 존재가 아니라 희망을 안고도 모래구덩이에서 나오지 못하는 존재, 사실은 그것이 인간의 실존인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