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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종합선물세트 [7] - 고전만화 ②

소녀가 꾸는, 아름다운 남자의 꿈

<악마의 신부>

<베르사이유의 장미> <캔디캔디>와 같은 70년대 소녀만화의 대표적 고전들을 새삼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은 제목조차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메이저의 세계와 조금 거리를 두고 있지만, 그 당시 소녀들의 마음에 깊숙한 인장을 새긴 작품들이 있다. 머리칼이 온통 은색으로 변하도록 지하 동굴에 갇혀 자란 소녀가 훗날 지상으로 올라와 자신을 땅밑으로 보낸 자들에게 복수를 감행하는 <은발의 앨리스>와 더불어 우리를 어둠의 쾌락에 빠져들게 한 만화 <악마의 신부>(원제는 <데이모스의 신부>)가 복간되어 나와 있다.

‘어두운 금요일’에 여주인공 미나코는 신비한 꿈을 꾼다. 꿈속에서 나타나는 흑발의 아름다운 남자 데이모스. 그는 그 옛날 친남매이자 연인이었던 비너스를 빼앗긴 아픔을 잊지 못하고 비너스의 육체를 가진 현대의 소녀에게 찾아와 그녀의 영혼을 앗아가려고 한다. 끔찍하고도 아름다운 공포의 세계를 보여주며 그녀를 유혹한다.

어느 소년은 프리마돈나를 꿈꾸다 교통사고로 죽은 여자친구를 따라 그림 속에 갇혀버린다. 외딴섬에서 죽어간 불쌍한 자들은 지옥초가 배합된 시멘트 속에서 자신의 원한을 심어둔다. <악녀 성서>(惡女聖書)로도 유명한 이케다 료코의 탐미적인 공포의 이야기가 다소 둔중한 먹의 필체로 기록되는데, 사실 이러한 어수룩한 그림이 더 큰 마력을 보이는 것이 괴기 공포의 세계다.

소년의 로망이여, 다시 한번

<사이보그 009>

<독수리 5형제> 이전에, 어디서나 나타나는 <짱가> 이전에, 우리는 이 이름을 불렀다. “제로-제로-나인.” 커다란 단추가 달린 전투복에 어금니에 장치된 가속장치는 어느 모로 보나 이제는 촌스럽다. 그래도 다양한 능력의 주인공들이 팀을 이루어 악을 물리치는 SF 전대물 장르를 개척한 작품으로 <사이보그 009>의 카리스마는 훼손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요코야마 미스테루의 <바벨 2세>와 <자이언트 로보>는 아직 정식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으니.

사고로 중상을 입은 뒤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사이보그로 개조된 009는 세계의 정의를 위해 싸우는 8명의 동지들과 힘을 합치게 된다. 갓난아기의 몸에 두뇌만 고성능의 컴퓨터로 개조된 001, 제트 분사 장치가 탑재된 다리로 화려한 공중전을 벌이는 002, 초인적인 시각과 청각 능력으로 정찰임무를 주로 맡은 여성형의 003에서부터 심해에서 특별한 능력을 지닌 아프리카형의 008에 이르기까지…. 지금도 당신이 그중 누군가와 닮았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소년의 로망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이다.

<철완 아톰>의 오차노미즈 박사를 떠올리게 하는 코주부 길모어 박사 등 여러 요소들이 데즈카 오사무의 <철완 아톰>을 이어받고 있지만, 다양한 주인공들을 통한 화려한 엔터테인먼트 요소는 지금 봐도 흥미롭다. 최근 일본에서는 1960∼70년대 고전 SF만화를 세련된 테크닉의 애니메이션으로 리메이크하는 붐이 일고 있는데, <사이보그 009> 역시 2001∼2002년에 TV판으로 재탄생했다. 주제곡은 X-재팬의 요시키가 결합한 글로브(Globe)의 <What’s the justice>.

<환상의 프리마돈나>를 기억하나요?

<스완>

21세기의 독자들에게 거리의 무용수 <스바루>(소다 마사히토)가 있다면, 1970년대 독자들에겐 열혈의 발레리나 <스완>이 있었다. 당시 소년만화에서는 마구와 필살기가 판을 치는 스포츠만화가 주류의 장르로 군림하고 있었는데, 소녀만화에서 여기에 대응하여 등장한 것이 열정의 예술가만화이다. 미우치 스즈에의 <유리가면>만큼 유명하진 않지만, 그 덕분에 새롭게 읽는 즐거움이 있는 <스완>(<환상의 프리마돈나>라는 제목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이다.

비범한 재능과 확실한 배경을 가진 경쟁자들 사이에서 외롭게 노력하며 조금씩 나아가는 소녀 발레리나 마스미. 콩쿠르에서 떨어진다. 발톱이 빠지고 다리가 붓는다. 사랑과 꿈이 어긋난 운명을 간다. 그래도 그녀는 춤을 추고 또 춘다. 아직도 많은 만화에서 열정과 노력의 주인공들이 등장하지만, 그때만큼 절절하면서도 아름다운 주인공을 창조해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아리요시 교코는 당시의 기라성 같은 소녀 만화가들 속에서 특출한 재능을 발휘하는 만화가는 되지 못했다. 그러나 충실한 조사를 바탕으로 발레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완결에 가깝게 그려나가는 성실함은 그녀 작품의 주인공과 무척 닮아 있다. 이야기의 단단한 얼개보다는 장면장면의 압도감이 좀더 빛나는 만화다.

도판이라도 반갑다, 50년대의 만화들

<다시보는 우리 만화>

1950년대와 1960년대 우리 만화의 고전 역시 한권 한권 소개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아직 거기까지는 우리 만화출판계의 손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만화가 스스로도 원고나 책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천만화정보센터가 한국만화박물관을 개관한 기념으로 발간한 이 책 속에서 그 시절의 명작들을 눈요기 정도는 할 수 있다.

<마징가 Z>와 <은하철도 999> 이전에 우리에겐 산호의 <라이파이>라는 걸작 SF만화가 있었다. 순정만화가 왜 ‘순정’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는지는 <영원한 종> <네 자매>를 보면 알게 될 것이다. <코주부 삼국지>와 땡이 시리즈 등 당시의 히트작들이 지금 보아도 꽤나 기발한 아이디어를 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신과 친구들이 영문도 모르고 얻은 별명들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 알게 될지도 모른다.

비록 온전한 작품들이 아니라 도판으로만 실려 장편의 만화들은 그 진면목을 확인할 수 없다는 것이 무척 아쉽다. 그래도 판타지, 탐정, 로맨스 등 다양한 장르로 펼쳐져 있던 우리 만화의 풍부한 세계를 확인하게 해준다. 그리고 만화에는 역시 부록이 빠질 수 없겠지. 이 책의 부록으로 실려 있는 ‘딱지만화’에 대한 이야기 역시 당신의 추억을 되살리는 데 큰 몫을 할 것이다.

오랜만에 찾은 고향, 혹시 다락방이나 헛간에 헌책들이 쌓여 있다면 그곳에서 추억의 만화들을 찾아보라. 어쩌면 값어치를 따질 수 없을 만큼 훌륭한 고전만화의 판본이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