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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종합선물세트 [6] - 고전만화 ①

결실의 추석에 고전만화의 풍성한 곳간을 열어본다. 쪼다 유비, 아수라 백작, 풋고추와 칠떡이…. 추억의 이름을 다시 불러본다. 최근 몇년간 만화출판계에서 꾸준히 이루어져온 고전의 복간과 인기만화의 완전판 발간이 우리에게 근사한 밥상을 차려주고 있다. 복간은 단순히 옛것을 재활용하는 데만 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다. 고급스러운 장정과 삭제본의 복원으로 그 시절에는 불가능했던 ‘참된 감상’을 가능하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고전의 테두리를 긋는 일은 쉽지 않지만, 1970년대 이전에 발표된 작품으로 2001년 이후에 재발간된 작품 속에서 선정했다.

성인만화의 농밀한 매력

<삼국지>

고우영은 한국 만화계에서 가장 독창적이면서도 고전적인 격조를 갖춘 작품을 그려온 작가다. 특히 1970년대 스포츠 신문에 연재된 <임꺽정> <수호지> <삼국지> 등은 강렬하고 현대적인 캐릭터, 경쾌한 유머, 능청스러운 입담 등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지금 보아도 신선한 맛을 풍겨낸다.

동양 고전의 백미인 <삼국지>는 이미 수많은 소설가와 만화가에 의해 재해석되어왔는데, 사실 고우영의 이 만화만큼 새로운 색깔로 그려진 작품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사나이 조조, 힘의 심벌 여포, 네로 동탁, 미녀 초선과 같은 캐릭터들은 원전의 특징을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성격으로 옷을 갈아입었고, 유비를 쪼다라고 하면서 <반삼국지>(反三國志)적인 해석을 가한 설정은 당시로서는 매우 충격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개성적 연출이 만화적 과장으로만 느껴지지 않는 것은, 장비를 시장판의 고기 장사꾼으로 그리는 등 서민적인 토착성에 깊게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삼국지>는 성인만화로서의 농밀한 매력을 감추지 않는다. “고을 이름이 뭔가? 당신이 살 오른 여인네의 히프를 칠 때 어떤 소리가 나던가? 탁!이지? 바로 탁현 누상촌이란 고을이다.” 구수한 입담은 전래의 판소리꾼이나 변사의 목소리를 느끼게 하고, 당시에 유행하는 문화적 요소를 적절히 집어넣은 고전과 현대의 볼륨 댄스는 무릎 치는 웃음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고급 장정으로 재발간된 이 책은 군사정권하에서 폭력, 선정성의 이유로 삭제되었던 100여쪽을 복원했다는 데도 큰 의미가 있다.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의 일생의 역작

<불새>

<철완 아톰> <밀림의 왕자 레오> <리본의 기사> 등 데즈카 오사무의 여러 작품들이 국내에 정식 발간되면서, 우리도 아시아 만화의 진정한 뿌리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데즈카가 일생을 매달렸던 역작 <불새>를 보지 않는다면, 그의 진짜를 안다고 말하긴 힘들 것이다.

<불새>는 영원히 죽지 않는 불사의 상징인 불새를 중심으로 수천년의 역사, 수많은 인물, 다채로운 형식의 실험, 심오한 철학적 주제를 변주해간 작품이다. 실제로 데즈카가 1954년 <만화소년>에 ‘여명편’을 그리면서 시작되었고, 70년대 실험 잡지 <콤>(COM)을 통해 본격화시켰고, 죽기 직전까지 연극과 애니메이션으로 그 세계를 이어갈 만큼 그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긴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이 국가의 형태를 갖추기 이전인 부족사회(‘여명편’)에서부터 불새를 차지하려는 싸움은 시작되었고, 일본 국가 건설의 중요한 시점(‘봉황편’)에도 역사의 배후에는 그 새가 자리잡고 있었고, 로봇이 인간과 동등한 지위를 얻기 위해 싸우는 먼 미래(‘미래편’)에도 불사를 위한 무모한 노력은 계속된다. 서기 2577년의 우주선 속에서 일어나는 살인사건을 배경으로 각각의 구명정 속에 갇힌 대원들의 복합적인 시점을 그려가는 ‘우주편’은 만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극한의 형식 실험으로 나아가고, <선녀와 나무꾼>의 이야기를 변주한 ‘우의편’은 완벽히 연극적으로 제한된 무대로 자신을 얽어매기도 한다.

가슴 속의 추억, 그 속의 어두운 욕망

<마징가 Z>

1970년대를 보낸 많은 소년 독자들이 ‘너무 잘 안다’고 생각하는 작품이지만, 정작 그 만화를 다시 들여다보면 우리가 얼마나 잘못 알고 있었던가를 깨닫게 된다. 가슴으로는 추억을 되살리고 머리로는 그 추억의 배후에 자리잡고 있는 어두운 욕망을 발견해보자.

“너는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다. 세계를 정복하는 것도 네 마음대로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신비로운 능력의 로봇을 얻게 된 주인공 소년 고지는 이 기계를 통해 정의를 실현하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것은 결과론일 뿐이다. 소년은 로봇에 합체하면서 엄청난 폭주를 경험하기도 하고, 적의 로봇을 필요 이상으로 가해하기도 하고, 그 전투의 과정에 도시에 엄청난 피해를 주기도 한다. 여자주인공은 (지금 보면 무척 촌스럽지만) 툭하면 팬티를 보이고, 여성의 성적인 면이 강조된 로봇들이 역시 페미니스트들의 분노를 살 만한 행동을 한다.

사실 이 만화는 2차대전 이후 아시아 소년들의 성장해가는 욕망을 누구보다 앞서 잡아냈고, 그 욕망을 새로운 단계로 넘겨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철인 28호>와 같은 외부 조종의 로봇은 <마징가 Z>라는 자동차처럼 타고 조종하는 로봇으로 바뀌었고, 그를 통해 진정한 인격을 가진 기계 요정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만화가 나가이 고의 다른 작품들인 <파렴치 학원>과 <데빌맨>이 과연 국내에 정식으로 들어올지는 알 수 없지만, 1960∼70년대가 지금보다 폭력과 인간의 근본악에 대해 훨씬 깊이 탐색했던 시대라는 건 분명하다.

촌스럽고 유치한 맛

<5학년 5반 삼총사>

명랑만화를 젖혀두고 1970년대를 이야기할 수 없듯이, 박수동을 말하지 않고 그 시절을 추억할 수 없다. 어른들을 위해 <고인돌>의 능청스러운 성의 세계를 보여준 박수동은 아이들에게는 <오성과 한음> <홍길동과 헤딩박> <번데기 야구단>으로 말썽과 장난의 희열, 그리고 그 책임을 가르쳐주었다. 그중에서도 <5학년 5반 삼총사>가 가지고 있는 고전으로서의 가치는 결코 적지 않다.

꽤나 잘난 머리지만 엉뚱한 아이디어를 내놓기 일쑤인 풋고추, 부잣집 아이의 여유와 예술적인 재능을 갖춘 칠떡이, 우락부락한 외모에 주먹대장이지만 정의파인 뚝배기. 이 전설의 삼총사는 언제나 평범한 학교와 골목에서 신선한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벌서기 일등인 말썽꾼이 후배들 교실에서 멋진 교사 역할도 해내고, 여름방학 야영장에서는 귀신 흉내로 선생님을 놀리고, 가난한 친구를 돕기 위해 별난 머리를 굴리기도 한다.

성냥개비에 먹을 묻혀 그림을 그리기도 한다는 박수동의 독특한 필치는 요즘 소년만화의 반짝거리는 주인공들에게서 만날 수 없는 진솔된 맛을 느끼게 해준다. 조금은 촌스럽고 유치한 도덕적 결론에 지배받고는 있지만, 그 과정에서 펼쳐지는 자유분방함은 지금의 만화가 따라오지 못할 어떤 경지를 보여준다. 거북이 자동차는 우리를 고향으로 데려가고, 얼기설기 만화는 우리를 어린 시절로 돌아가게 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