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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종합선물세트 [3] - DVD 애니메이션 박스 세트 ①

적게는 3장에서 많게는 수십여장에 이르는 엄청난 분량의 DVD 박스 세트들이 계속 출시되고 있다. 아무리 DVD 마니아라고 해도 정상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전체 세트를 다 감상하는 일은 쉽지 않다. 시리즈물의 가장 큰 특징인 중독성 때문에 한번 보기 시작하면 여간해서는 멈출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오늘은 디스크 한장만 보고 끈다. 다음 디스크는 내일 본다’식의 적절한 규칙을 정해놓고 실행하면 되지만, 생각처럼 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스스로도 ‘이러면 진짜 내일은 폐인이 돼 다닐 텐데…’라고 걱정하면서도, 어느샌가 두 번째, 세 번째 디스크를 갈아끼우면서 밝아오는 새벽빛에 괴로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일반적인 것. 그런 경험을 해본 사람들에게 추석 연휴는 그야말로 ‘황금’ 같은 기회라고 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부담에서 벗어나 마음껏 시리즈물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릴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올 추석 연휴에는 최근 그야말로 쏟아지듯 출시되었던 애니메이션 박스 세트들을 부담없이 볼 수 있는 최적의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중에서도 <슈퍼 특공대>라는 제목으로 공중파TV를 통해 방영되었던 미국 애니메이션 <슈퍼 히어로>보다는 <신기동전사 건담W>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엑스 드라이버> <지구소녀 아르주나> <기동전함 나데시코> 등 일본 애니메이션이 더 적합해 보인다. 원칙적으로 모두 케이블TV에서 방영된 뒤 출시되었다고는 하지만, 방영시간을 꼬박꼬박 챙겨가며 한회도 빠뜨리지 않고 본 경우는 거의 드물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보기 어려웠던 일본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들 가운데 재미와 완성도 면에서 모두 ‘필수’라고 평가받는 일곱 작품을 올 추석 추천 DVD 박스 세트로 선정해 보았다.

가족과 함께 추억 속으로

<빨간머리 앤>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얼마 전 한 설문조사에서 한국인이 꼽은 추억 속의 애니메이션 중 1위에 오른 <빨간머리 앤>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시청하기에 적합한 가족용 애니메이션의 최고봉이다. 1985년에 국내에서 첫 전파를 탄 이후 방영되었던 50회분의 에피소드 모두가 수록되어 출시된 <빨간머리 앤> 박스 세트는 빨간색과 하얀색의 종이 박스에 각각 6개씩의 디스크 케이스가 들어 있다. 하지만 1979년 닛폰애니메이션사가 제작해 같은 해 일본 <후지TV>를 통해 방영을 시작했다는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타이틀에 담긴 애니메이션 자체의 화질은 그리 언급할 만한 게 못 된다. 제작연도를 감안하면 상당한 수준으로 보정되었지만, 아무래도 현저하게 느껴지는 필름 스크래치와 들쭉날쭉한 색감변화는 눈에 거슬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구닥다리 애니메이션을 추천하는 이유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금 향유하게 만드는 아우라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국내 방영 당시 불규칙한 편성시간 때문에 삭제되었던 부분이 채워져 있고, 일본 TV판 오프닝과 엔딩이 비교 감상할 수 있도록 담겨져 있으며, 대사를 뺀 음악과 음향만을 선별해 들을 수 있는 독특한 기능까지 첨부해놓고 있기도 하다. 물론 북클릿에 실려 있는 주요 스탭들과의 짧은 대담 외에는 별도의 서플먼트가 전혀 없는 단점이 있지만 그조차도 가슴이 찡해지는 감동을 느끼게 해주는 본편의 힘으로 충분히 용납이 된다.

한편 훗날 <신세기 에반게리온>을 만들어내는 가이낙스의 초기 작품으로 마니아들에게서 전폭적인 인기를 끌어낸 걸작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도 가족들이 함께 즐기기에 적합한 애니메이션 박스 세트다. 디즈니의 <아틀란티스>가 일부를 모방했다는 설이 제기돼왔을 만큼, 탄탄하고 흥미로운 설정들이 가장 큰 특징. 단, ‘12세 이용가’라는 제한이 붙어 있는 것이 말해주듯이 아주 어린 가족들과는 함께 보기에는 조금 무리가 따르니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아쉬운 점은 총 39화의 에피소드가 수록된 10장의 디스크로 출시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 (뉴패키지) 박스 세트 역시 서플먼트가 그다지 풍성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뮤직비디오 2편과 매커닉 장면을 영상편집한 <Mechanic Anthology>가 서플먼트의 전부인 것. 그러나 쥘 베른의 SF모험소설 <해저 2만리>를 이렇게 바꿔놓을 수 있구나라고 탄성을 자아낼 만큼 무한한 상상력과 그것과의 결합으로 인해 더욱 빛을 발하는 모험담은 분명 이 작품만의 매력이다. 더불어 초판본에 한해 들어 있기는 하지만, 이스터 에그 형식으로 숨어 있는 10개의 ‘오마케 극장’ 이야기들 역시 <신비한 바다의 나디아>의 매력을 높여주는 부분이다.

독특한 애니메이션과의 근접 조우

<자이언트 로보> <나의 지구를 지켜줘>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긴 연휴를 기회로 보통 때는 접해보지 못한 특별한 경험을 해보고 싶은 이들에게는, 아주 특성이 강해 이른바 마니아풍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을 선택해 몰입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일반적인 일본의 로봇만화에 대한 선입견을 한방에 뒤엎는 특별한 작품 <자이언트 로보>는 그런 시각에서 최고의 선택이다. 검은색 바탕에 진한 세피아톤으로 그려진 거대 로봇의 이미지와 굵은 붓글씨로 투박하게 써내려간 제목글씨부터 심상치가 않은 이 작품은, 세 가지 면에서 상식을 깼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첫째는 무게감이 물씬 느껴지는 케이스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게 화면 속 작화 스타일은 <바벨 2세>처럼 귀엽고 옛스럽다는 점이다. 둘째는 귀엽고 옛스러운 캐릭터들이 수십명씩 등장해 조직을 이루며 싸우는데, 도저히 서로의 서열을 알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산만하다는 점이다. 셋째는 귀여운 캐릭터와는 상반되게 엄청난 힘을 앞세워 결투를 벌이는 거대 로봇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자이언트 로보>가 이렇듯 특이한 이미지를 갖추고 있는 가장 근원적인 이유는 작품의 원작자인 요코야마 미쓰테루에 있다. 그는 위에 언급한 <바벨 2세>는 물론, <철인 28호> <요술공주 샐리> <삼국지> 등의 수많은 작품을 그려낸 당사자. 애니메이션을 연출한 야스히로 감독이 그의 허락하에 그의 다른 작품 속에 등장했던 모든 캐릭터들을 출연시켜 <자이언트 로보>를 만들어냈던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기존 작품에 등장했던 캐릭터들의 선악 구조를 모두 재배치해 보는 이들로 하여금 꼬리에 꼬리를 무는 흥미를 이끌어낸다는 사실이다.

서플먼트의 핵심인 ‘배틀 토크’ 코너에도 언급되듯이 <기동경찰 패트레이버>류의 매커닉을 앞세운 사실적인 로봇만화가 주류를 형성하던 당시 일본 애니메이션의 흐름을 깨고, 복고에 대한 오마주로 무장한 채 튀어나온 <자이언트 로보>는 충격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바로 그 점에서 ‘걸작’이라 불리게 된 것. 7회의 에피소드를 수록하고 있는 4개의 디스크와 별개로 서플먼트만을 위한 다섯 번째 디스크에는 그런 특별한 제작과정의 이야기가 설명되어 있어 흥미진진하게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해외에서 방영된 예고편들, 로보의 전투장면에 힘을 실어주던 오케스트라 음악의 녹음현장, 한국 성우들의 인터뷰와 더빙 현장 등도 서플먼트에 담겨져 있는 코너들이다.

(위에서 부터)♣ 복고에 대한 오마주로 무장한 채 튀어나온 <자이언트 로보>는 처음 등장했던 당시, 충격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걸작'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귀엽고 옛스러운 캐릭터와 거대 로봇이 함께 등장하는 점이 특이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평가가 극과 극을 달리는 <부기팝은 웃지 않는다>. 염세적인 세계관을 바탕에 깔고 있는 이야기와 어둡고 뿌연 이미지와 독특한 매력을 가지고 있다.♣ 미소년 캐릭터들의 몸에 12지신의 혼령이 씌여 있어 체력이 떨어지거나 이성이 껴안으면 해당 동물로 변해버리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