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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연구가 달라지고 있다

한국 영화사부터 산업, 책연구까지 다양해진 한국영화연구의 새 경향

“우리의 영화역사는 치매 증세에 빠져 있다.” 어느 영화학자의 말을 빌리면 그렇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이 말을 부정할 수 있는 물증은 아직까지 많지 않다. 한국영화사 연구의 기원이자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한국영화전사>(이영일)가 1969년에 간행된 이후 한국영화 통사라고 할 만한 연구성과는 찾기 힘들다. 영화연구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한국 영화역사를 재구성해야 한다”고 입을 모으는 것은 그러므로 당연한 이치다.

그런데 최근 영화연구의 흐름이 변화하고 있다. 학문적 중심은 한국영화로 이동했다. 몇년 전까지 “한국영화를 공부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는 편견이 자라나고 있던 자리에 새로운 씨앗이 뿌려진 것이다. 연구서적과 단행본, 각종 심포지엄을 중심으로 한국영화에 관한 이론적 연구의 기운은 어느 때보다 활발해졌으며 새로운 성과를 낳고 있다. 한국영화가 잃었던 기억을 미약하나마 회복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감독들에 대한 본격 비평 담론

주목할 만한 서적들이 있다. 8년 만에 복간된 <영화언어>(도서출판 소도)는 아예 한국영화에 관한 연구서적이다. 계간지 성격을 띠는 <영화언어>는 중앙대 이용관 교수가 발행인으로 있으며 영화평론가, 연구자들의 이론적 성과를 싣고 있다. 올 여름에 발행된 복간호에서 필진들은 이창동, 허진호, 홍상수 감독에 관한 관심을 표한다. 최근 한국영화에서 활약하고 있는 감독들에 대해 본격적인 비평의 담론을 펼쳐보겠다는 심산이다. 편집위원 문재철씨는 “비평과 이론의 만남의 장을 구성하겠다. 한국영화에 대한 집중적인 논쟁의 작업, 그리고 이론적 체계화의 계기를 삼겠다”라며 포부를 밝힌다. 복간호에서 문재철씨는 홍상수 감독론인 <권태의 이미지에 대한 맥락적 접근>이라는 글을 직접 썼다. 이제까지 서구 모더니즘적 시각으로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독해하는 경향이 있었던 국내 평단의 흐름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같은 글에서 그는 한국사회의 특수한 사회·문화적 맥락으로 당대의 정서구조를 보여주는 것으로 홍상수 영화를 읽을 것을 권한다. 심플한 저널비평의 영역에서 별다른 지적 만족을 얻을 수 없는 독자라면, 이 제안은 솔깃한 것이 될 것이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현문서가)는 소중한 체험이다. 영화평론가 정성일씨가 2002년 여름부터 인터뷰 작업에 착수해 얼마 전 하나의 서적으로 묶어냈다. 임권택이라는 한 사람의 인간, 그가 살아온 한반도의 역사, 그리고 감독 임권택의 영화세계를 아우르는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는 <족보>와 <만다라> <춘향뎐> 등으로 이어진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 대해 가장 구체적인 접근을 허락하고 있다. 이는 한국영화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성과물이 될 것이다. 그는 또한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행복한 책읽기)를 통해 한국 작가에 대한 본격 연구를 확장해 가는 저널/평론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영화전사> 이후 새로운 연구방법론을 도입, 한국영화사 연구의 재개를 촉발한 책으로는 김소영 교수의 <시네마, 테크노문화의 푸른 꽃>(1995, 열화당)이 꼽히며 그외에도 최근 영상자료원 원장에 부임한 이효인씨의 <한국영화사강의>(이론과실천), 변재란 교수 등이 지은 <한국영화와 근대성>(도서출판 소도) 이후 드물지 않게 연구서들이 나오고 있다. 특히 고 이영일 선생을 기리는 ’이영일 아카이브’(한국예술종합학교 한국예술연구소 산하)에서 이영일 선생이 말년에 행한 영화사 강의를 정리한 <이영일의 한국영화사 강의록>(도서출판 소도)을 비롯해 관련 저작을 계속 출판하고 있는 점도 전례 없는 일이다. 연세대학교 산하 미디어아트센터 역시 최근 한국영화사에 대한 저작물을 생산하는 하나의 기지로 떠오르고 있다.

다양한 영역, 다양한 형태로 늘어나

영화연구는 영화사로만 끝나지 않는다. 번역과 다양한 저작, 그리고 논문 등의 형태의 연구작업이 이어지는 중이다. 출판사 시각과 언어 편집장으로 <매혹과 혼돈의 시대-50년대 한국영화>(도서출판 소도)를 비롯해 다양한 저작물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김소연씨 역시 한국영화사에 관한 연구를 중시한다. “최근의 한국영화사 연구자들은 이전 세대 연구자들과는 다른 사고를 하고 있다. 그것은 작가에 관한 탐구에 집착하는 대신, 대중영화의 변화를 수용하고 탐구하는 것에서 차별화된다. 이영일 선생의 후기 저작들이 중요한 지점도 그것이다”라고 말한다.

곧 출간될 예정인 이영일 선생의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이 영화사 연구에 있어 뜻깊은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마찬가지 이유다. 이영일 선생의 제자들이 선생이 말년에 갖고 있던 한국영화사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69년의 저작을 개정증보한 이 책에 대해 김소연씨는 “이영일 선생의 후기 글들을 보면 이전까지 선생이 의미를 두었던 부분에서 벗어나 다양한 대중영화에 의미부여를 하는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최근 한국 영화연구에도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견해를 밝힌다.

도서출판 소도의 대표 이순진씨는 과거 한국영화에 관한 연구서적을 누구보다 열심히 만들고 있고 기획하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한국영화에 관한 저서를 중심으로 하는 출판사를 꿈꾸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구체적인 사료없는 영화에 관한 역사적 논쟁은 무의미하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영화사에 관한 서적에 남다른 의미를 둔다. 이순진씨는 최근 국내에서 한국영화사에 관한 연구가 하나의 ‘붐’을 이루고 있다고 진단한다. 한국영화사 연구는 역사주의적 방법과 특정 시대에 관한 고찰, 두 가지 흐름으로 나뉘어 있으며 여기서 실증적 자료를 토대로 하는 연구를 중시해야 한다는 것이 이순진씨의 견해다. 그는 앞으로 한국영화에 관련된 서적들을 다수 기획하고 있다. <한국영화전사> 개정증보판을 비롯한 이영일 아카이브의 기획저작물들을 출판할 뿐 아니라 EBS에서 방영 중인 <한국영화걸작선> 코너를 하나의 서적으로 묶는 것 등이다. 한 출판사에서 이렇듯 많은 업적이 이루어지는 것 역시 희귀한 사례다.

새로운 연구 과제, 영화산업 영역

좀더 시야를 확장하면 한국영화에 관한 연구는 다양화되고 있다. 이전까지 특정 영화작가에 집중되었던 경향에 비해 스펙트럼이 넓어지고 있는 것이다. <영화언어>의 문재철 편집위원은 “과거엔 외국이론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최근엔 한국영화에 집중하는 연구들이 많아지고 있다. 무엇보다 한국영화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흔적이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한다. 최근 한국영화에 관한 이론적 탐구가 세분화되고 있으며 다양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기호학이나 페미니즘 등 과거엔 특정 분야의 이론이 득세하는 흐름이 뚜렷했지만 요즘엔 이론의 독점화가 덜하다. 비교적 젊은 층의 대학원생이나 연구자들이 내놓는 연구논문 등이 특정 시대에 관한 영화연구, 극장문화 등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좋은 예다. 테크놀로지나 영화미학에 대한 관심 역시 늘어나는 추세다. 그럼에도 문재철씨는 “미시적 탐구나 역사 자료도 중요하지만 한국영화 전체를 아우르는 거대 담론, 시대에 걸맞은 패러다임의 정립이 필요하다”는 견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영화산업의 영역이다. 1990년대 이후 급속하게 양적으로 팽창한 한국영화의 산업적 규모는 영화산업 연구를 재촉했다. 영화인회의 정책위원 안지혜씨는 영화정책, 산업연구의 중요성을 피력한다. 그가 산업연구 분야에서 어려움을 호소하는 것은 연구의 체계를 마련하기 어렵다는 것. “산업과 정책연구에 있어 중요한 것은 데이터다. 수집가능한 자료가 많을수록 연구성과는 풍성해진다. 그러나 국내에선 최소한의 데이터 마련이 쉽지 않은 구조였다. 산업연구 분야는 무엇보다 제작, 배급분야와 현실적으로 맞물린 분야다. 제작, 배급 시스템이 현실화되고 합리화될수록 연구 역시 발전이 가능해진다. 즉 시스템변화에 민감하다는 의미다. 집계자료 등이 구체화되고 영화의 제작시스템의 체질이 개선된다면 연구 역시 활발해질 것”이라고 말한다. 과제는 적지 않다. “기본은 통합전산망 구축이다. 이것이 산업연구의 기본자료다. 최근 국내 영화산업 연구의 과제라면 어떻게 국내 영화시스템이 전근대적인 것과 싸우는지 과정을 기록하는 것이 될 것이다. 영화들이 다양화되고 소수영화가 제작되고 배급되는 것 역시 산업적 과제로 연결할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영화 저널도 변해야 한다

다른 영역에서도 자료구축은 시급하다. 이순진씨는 “영화사 연구에서 자료수집 문제는 핵심적이다. 영상자료원 등 기관에서 좀더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할 필요성이 있다. 그리고 영화연구에 있어 영화인들의 인터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다. 한국영화사를 연구하다보면 자료유실의 경우가 적지 않는데 이 경우 인터뷰가 어느 정도 보완책이 되는 것이다. 각종 기관의 연구지원, 연구작업을 위해 자료를 인터넷 등 공간에서 공유하는 작업도 중요하다”고 말한다. 김소연씨와 문재철씨는 또 다른 대안을 제시한다. 김소연씨는 “시장과 독자의 문제가 크다. 영화이론 연구를 수용할 시장과 독자가 너무 한정되어 있다. 이래선 곤란하다. 국제적 견지에서 새 패러다임을 짜야 할 필요가 있다. 다양한 지원이 있어야 하고 국제 심포지엄, 해외 학술지와의 교류 등이 앞으로 한국영화 연구의 나아갈 방향이 될 것이다”라고 논한다. 문재철씨는 “앞으로 국내 영화연구는 주체적으로 위상을 정해야 한다. 외국이론 역시 한국영화 연구를 위해 하나의 방법론으로 도입하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다양한 연구영역을 발굴하는 것 역시 과제”라고 말한다.

영화연구의 영역, 즉 아카데미즘과 국내 저널의 관계는 중요하다. 요컨대 국내 아카데미즘의 흐름, 다시 말해서 특정 작가와 사조에 관심을 집중하는 흐름은 저널에도 일정한 영향을 남겼을 것이다. 그렇다면 산업과 역사, 다양한 장르를 발굴하고 여기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최근 이론적 흐름이라면, 저널 역시 변화를 모색해야 하는 것 아닐까. 영화 관련 저널은 영화이론과의 소통을 하나의 길로만 제한하는 제스처를 취하곤 한다. 하나의 작품에 대한, 혹은 감독에 대한 분석을 이론 연구의 성과에서 끌어오는 것이다. 만약 영화연구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면, 그것에 동의할 수 있다면 영화저널 역시 과거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길을 찾을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