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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과 배우 다른 가짜 속편들의 재미
심지현 2003-09-24

<서스페리아>가 워낙 큰 여파를 미치자 개봉 뒤 1년 반쯤 지나 <서스페리아2>가 개봉된다. 그러나 자막에 나온 원제는 <Deep Red>. 알고보니 같은 감독이 2년이나 먼저 만든 영화였다. 일본에서 제목을 맘대로 붙인 것을 수입할 때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일본판 가짜 <서스페리아2>의 포스터, 맨 위에 보이는 붉은색 문구는 “이탈리아 호러의 귀재, 다리오 아르젠토 대표작 <서스페리아> PART2가 완전판으로 등장!”이다. <서스페리아>가 호러영화의 귀감으로 뜨고, 감독의 이름이 유명해졌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이러한 가짜 속편은 그래도 감독이 같으니 시리즈물의 개념으로 받아들일 만하다.

하지만 비디오 시장에 등장하는 속편들에는 감독이나 배우의 물갈이는 둘째치고 내용조차 원작과 연관이 없는 엉터리가 종종 눈에 띈다. 키워드가 되는 사건이나 인물 구성의 얼개를 비슷하게나마 간직한 ‘시추에이션’ 아류작이 대부분이지만 제목 외에는 원작과의 유사성을 찾기 힘든 독립된 작품도 허다하다. 예를 들어 <미녀 삼총사>가 인기를 끌자 그 2편이라는 것이 출시되었는데,(물론 ‘진짜’ <미녀 삼총사2>는 아직 비디오로 출시되지 않았다) 제목은 <미녀 삼총사 2번째 임무>다(‘2’ 다음의 ‘번째 임무’는 거의 알아볼 수 없는 흐릿한 문구로 재킷에 들어가 있다). 늘씬한 세명의 미녀들이 등장해 험한 사건의 단초를 풀어가며 화려한 액션을 선보인다는 점에서 원전의 분위기를 흡사하게 따른다. 그러나 세명의 미녀가 등장한다는 점만 비슷할 뿐, ‘찰리’도, ‘엔젤들’도, ‘임무’도 없다. <금발이 너무해>의 경우 현재 속편이 개봉 대기 중에 있지만 그러한 사실과 상관없이, 이미 <금발이 너무해 두 번째 이야기>(원제: Totally Blonde)가 비디오로 출시돼 있다. 금발이 아니라는 이유로 남자 친구에게 거부당한 여자주인공이 머리를 금발로 염색한 뒤에 인기만발의 여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내용으로 역시 금발이 등장한다는 점 외에는 유사성을 찾기 힘들다.

<유주얼 서스펙트2>는 가짜 속편의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독립적인 구조를 가지며 독특한 재미를 충분히 발산하고 있는 영화다. 휴스턴 월스 페스트 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상을 수상한 영화의 원제는 ‘The Contract’(살인청부). 술김에 살인을 청부한 여인이 겪는 무시무시한 일상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이 영화가 굳이 <유주얼 서스펙트>의 속편을 가장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두 영화가 그러하듯 신인감독과 무명배우를 가리기 위한 장막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상의 세 영화는 ‘제목에 속았다’는 느낌만 빼면, 꽤 재미있는 영화들이다. 물론 안방극장에서 봤다면 더욱 좋았을 영화들이지만, 톡톡 튀는 아이디어와 낯선 배우들의 신선함까지 합친다면 대여료가 아까울 정도는 아니다. ‘그나마 내용이 괜찮으니 넘어가주지?’라고 생각하는 것은 빌리는 사람들 입장이지만, 원작을 수입해 배급하는 영화사의 경우에는 심기가 꽤 불편할 만하다. 그러나 영화 제목은 상표와 달리 저작권을 신청할 수 없기 때문에 제작사나 배급사, 혹은 감독이 소유권을 주장하기 힘들다. 따라서 ‘먼저 가져다 쓰는 사람이 임자’인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법적으로 제재할 방도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부정경쟁방지법상 비슷한 제목을 가져다 쓰는 경우, 원작이 가진 이미지와 소비자의 신뢰도가 가져다주는 이득을 부정하게 취하는 행위이므로 제재를 가할 수 있도록 명기되어 있다. 즉 영화 제목이 하나의 독립된 저작물로서 보호받지 못하더라도, 그에 따라 생겨나는 부수적인 이득에 대해서는 보호받을 수 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 <트리플X>의 로고를 비슷하게 흉내낸 아류작을 배급사인 콜럼비아트라이스타에서 정정한 사례는 있지만, 아직까지 국내에서 제목을 사이에 둔 시비경쟁이 본격적으로 벌어진 적은 없다. 진짜 속편이냐, 가짜 속편이냐를 구분하는 것도 같은 감독과 같은 배우, 같은 시나리오 작가와 같은 제작자가 결합하지 않는 이상 제작자와 감독의 입장, 그리고 관객의 해석에 따를 길밖에 없다. 무임승차를 노리고 원작의 제목을 남발하는 수입상이나 비디오 업자만 아니라면, 알고도 속는 심정으로 가짜 속편을 집어드는 소비자들에게는 의외로 짭짤한 재미들이 주어질 수 있다. 알고 빌리면, 가짜 속편도 재밌을 수 있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