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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식 진군가의 위력,<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
권은주 2003-09-27

조니 뎁의 몽상적인 눈망울이 위력을 발휘하는 해적영화, 그것만으로도 일단은 새로운 유형의 해적영화로 팬들에게 각인되는 데 성공한 해적영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 그 뻔한 모험담의 일부인 해적영화, 바로 <캐리비안의 해적: 블랙펄의 저주>이다. <멕시칸>, 일본 원작의 미국식 변형판 <링> 등에서 이국적인 세팅을 즐기는 취향을 발휘한 바 있는 고어 버빈스키 감독의 신작이다.

디즈니 자본이 투자를 아끼지 않은(아끼지 않은? 그건 모르겠군) 이 거대한 규모의 블록버스터를 더욱 웅장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클라우스 바델트가 담당한 오리지널 스코어다. 이름부터가 약간은 독일군 장교 냄새가 나는데, 아닌 게 아니라 정통 독일 뮤지션이다. 클라우스 바델트의 이름을 미국으로 실어온 것은 다름 아닌 한스 짐머. 역시 독일군 장교 냄새가 나는 이름 아니던가? 어쨌든 클라우스 바델트는 존 윌리엄스와 더불어 블록버스터용 웅장 오케스트라 사운드의 대표주자인 한스 짐머의 <글래디에이터> <미션 임파서블2> 등의 영화를 통해 짐머 밑에서 한수 배운 뒤에 <K-19> <타임머신> 등의 영화에서 본격적으로 자기 이름을 박기 시작했다. 그러던 클라우스 바델트의 ‘할리우드 O.S.T호’가 <캐리비안의 해적>을 통해 진짜 제대로 된 흥행의 항로를 달리는 항해의 닻을 올리기 시작한 것이다.

확실히 독일 사람들의 오케스트레이션은 최고다. 이른바 ‘짝퉁’의 느낌이 전혀 없다. 베토벤, 바그너, 말러를 잇는 위대한 독일 관현악의 전통이 살아 움직이는데 누가 그걸 당하겠나. 모든 것들이 한마디로 ‘압도적’이다. 특히 바그너 이후의 무한선율, 그 죽죽 흐르면서 발전하고 또 발전하는 상승의 멜로디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데에는 한스 짐머도 박수를 칠 만하다. 존 윌리엄스 같으면 ‘나와는 다른 전통이군’이라 체념하고 돌아설 정도. 존 윌리엄스가 명쾌한 팡파르풍의 밝은 브라스로 승부를 건다면 독일쪽 사람들은 납덩이 같은 무게가 느껴지는 장쾌한 오케스트레이션 자체의 흐름으로 승부를 건다. 종류가 다르다.

또 하나, 클라우스 바델트의 음악에서 느껴지는 단순성은 흡사 최근 독일 출신의 단순무식한 메탈 사운드로 메탈 팬들의 귀를 압도하면서 ‘형님’ 소리를 듣고 있는 람슈타인의 사운드를 방불케 한다. 진군의 느낌을 주는 북소리와 함께 울려퍼지는 단순한 비트의 사운드는 어딘지 약간은 기분이 나쁘다. 남들이 뭐라든 아랑곳없이 앞으로 질주하는 거대한 파도 같다. 하긴 해적의 영화에서 강력한 오케스트라 히트를 주무기로 한 이 질주감보다 더 잘 어울리는 사운드를 발견하기란 힘들다. 무뚝뚝하고 남자답고 희망차다. 음울한 사운드의 검은빛 역시 강력한 폭풍우의 어떤 쇄도를 암시한다. 그러다가 갑자기 날이 개듯 전형적인 독일식 낭만주의 오케스트레이션이 등장하면 마치 후기 베토벤이나 브람스쯤이 되살아온 듯한 느낌.

O.S.T 앨범에는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며 세상을 덮는 안개의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는 <Fog Bound>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 곡 <He’s a Pirate>에 이르는 열다섯 트랙이 사운드의 질주와 그것이 잦아들 때의 음울한 복선, 또 그 와중에 서정성을 표현해내고 있다. 앨범에는 클라우스 바델트가 작곡하고 한스 짐머가 ‘오버프로듀스’했다고 적혀 있다. 그게 뭔지는 모르겠으나, 이쪽 사운드의 사단을 한스 짐머가 관리하고 있다는 점은 명백하고 할리우드는 바로 그 전통적 힘을 영화 속에 잘 이용하고 있다는 것 역시 명백하다. 성기완/ 대중음악평론가 creole@hite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