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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베르메르의 캔버스 속으로,<진주 귀고리 소녀>
2003-10-02

트레이시 슈발리에 지음 | 양선아 옮김

도서출판 강 펴냄 | 9500원

내가 어렸을 때 자주 읽었던 이른바 ‘학습만화’라는 책들에서 가장 자주 써먹던 수법은 시간여행이었다. 우리의 어린 소년소녀 주인공들은 꼭 아인슈타인처럼 백발에 콧수염을 단 만물박사 할아버지를 한명 두고 있는데, 과거의 역사적 사실에 궁금해하는 손자들을 위해 타임머신을 발명해 아이들을 역사적 명사들의 집으로 던진다. 종종 난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반 고흐나 베토벤 같은 사람들이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정체불명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그렇게 친절하게 굴 수 있었는지 궁금해한다. 만화 속에 나오는 반 고흐는 자기 귀를 잘라 창녀에게 던져주는 일 따위는 전혀 못할 것 같은 친절한 남자였으니 말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장편소설 <진주 귀고리 소녀>의 기본 개념 역시 이런 학습만화들과 다르지 않다. 슈발리에의 소설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시간여행 소망 성취 환상이다. 슈발리에는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인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화실로 들어가 그의 걸작들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하고 싶다. 진짜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갔겠지만 그건 아직 불가능하니 작가는 어쩔 수 없이 차선책을 택한다. 자신의 상상력을 이용해 전기적 사실이 그렇게까지 잘 알려지지 않은 이 남자와 그의 모델을 재구성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소설은 문학적 점잇기 놀이라고 할 수 있다. 슈발리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베르메르의 작품들을 연대기 순으로 배열한 뒤 그 작품들을 하나씩 자신의 소설에 끼워넣으며 이야기를 만든다. <싱잉 인 더 레인>과 같은 할리우드 뮤지컬이 당시 유행가들을 이용해 영화 각본을 쓴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목만 읽어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슈발리에가 주인공으로 삼은 사람은 베르메르가 그린 <진주 귀고리 소녀>이다. 이 작품은 주인공의 사회적 위치에 대해 말해주는 그 어떤 단서도 존재하지 않는 그림이므로 슈발리에는 백지상태에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슈발리에가 창조해낸 그리트라는 소녀는 아버지가 사고로 실명하자 베르메르의 집에 하녀로 들어가 이 전설적인 화가의 삶을 엿보고 곧 그의 미술세계에 조금씩 매혹되기 시작한다. 그리트의 베르메르의 관계는 이 독립심 강한 젊은 여성이 화가와 모델간의 어쩔 수 없는 주종과 소유의 관계에서 빠져나오면서 끝장나지만 그들의 관계는 서구 미술 사상 가장 중요한 초상화를 남기게 된다.

<진주 귀고리 소녀>에서 슈발리에는 요하네스 베르메르가 그랬던 것처럼 17세기 네덜란드의 정교하면서도 화사한 묘사를 시도한다. 슈발리에의 소설은 베르메르의 그림에 대한 비평적 모사이다. 작가는 베르메르의 그림을 창문으로 삼아 그 뿌연 이미지 너머의 삶을 상상하고 캔버스를 사이에 둔 역학관계를 파헤친다. 여기에 10대 소녀의 믿음직한 성장기가 더해지면 이야기는 훨씬 그럴싸한 설득력을 얻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은 여전히 점잇기 놀이이다. 슈발리에의 20세기적인 상상력을 통해 베르메르의 그림을 다시 바라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지만 그만큼이나 노골적으로 속보이는 게임이기도 하다. 베르메르의 그림들이 가진 원래의 아름다움을 망치고 싶지 않다면, 그리트가 베르메르의 세계에서 빠져나온 것처럼 독자들 역시 책을 덮은 뒤 진주 귀고리 소녀에게 원래의 미스터리를 돌려주어야 할 것이다. 듀나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