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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디지털이라는 이름의 일기장,혹은 무기(+English)
2003-10-03

<그 집 앞> <서브웨이 키즈> <자본당선언>으로 본 디지털 장편의 세가지 길

“그들은 거리로 나가 촬영기를 민첩하게 이용했다… 그들은 극영화를 르포르타주에 접근시켰으며 따라서 살아 있는 역사에 다가갔다” -파스칼 보니체

위 인용문의 ‘그들’은 1960년대의 프랑스 누벨바그를 지칭한다. 여기서 ‘그들’을 오늘의 디지털 세대로 바꿔도 이 문장은 유효할까? 디지털 세대가 과연 살아있는 역사에 다가갔는지, 혹은 그들이 새로운 영화 형식을 발명했는지를 단언할 수 없다면, 결론은 유보적이거나 아직은 부정적이겠지만, 적어도 두가지 점에서 그 치환은 그럴듯해 보인다.

한가지는 영화 사조의 변화 혹은 신조류의 생성이 촬영 기자재와, 인과관계는 아니라 하더라도, 상관성이 있다는 점이다. 프랑수아 트뤼포가 거리를 질주하는 쥘과 짐의 생동하는 육체성을 필름에 새겨넣었던 것도 테크놀로지의 발달에 의한 카메라의 경량화가 선행되지 않았다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오늘의 어린 예비 감독들에겐 트뤼포의 카메라보다 훨씬 싸고 가벼워진 디지털 카메라가 주어져 있다.

두번째는 그 변화가 영화 텍스트의 질적인 면에 영향을 미치며, 전통적 드라마보다 르포르타쥬 혹은 다큐멘터리에 접근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든 2000년대의 젊은이들에게 시스템이나 드라마의 계율보다는 자신의 삶, 혹은 주변인물들의 실제 생활이 보다 가깝다. 그들의 영화가 소설보다 에세이를 닮아가는 것은 자연스럽다. 누벨바그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알렉상드르 아스트뤽은 “카메라는 현대의 만년필이다. 데카르트가 살아 있었더라면 카메라로 <방법론 서설>을 썼을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는데, 2000년대에는 디지털만한 ‘현대의 만년필’의 적절한 지시어를 찾기 힘들 것이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는 10여편의 디지털 장편이 선정을 요청해왔다. 대부분은 그것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조차 알려지지 않은 작품들이다. 실제 제작된 작품은 그것의 몇 배가 될지 모른다. 충무로에서 한해 동안 만들어지는 장편의 수가 50-60편에 불과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숫자는 놀랍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물결의 전조가 형성되고 있다는 점은 확실하다.

여기선 그 중에서 <그 집 앞> <서브웨이 키즈> <자본당선언-만국의 노동자여, 축적하라>(이하 <자본당 선언>)에 주목하려 한다. 2000년대의 만년필로서의 디지털에 주어진 조건과 행로를 이들을 통해 추측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세편에서 시스템의 혜택과 구속 양자로부터 벗어난 디지털 카메라는 40여년 전 누벨바그가 그랬듯 거리로 나선다. 이것은 시스템으로부터의 가출이며, 내러티브 상으로는 대개 가족과 결별한 젊은이로 체현된다. 그들은 <그 집 앞>에선 남편 혹은 애인으로부터 떠나온 여인, <서브웨이 키즈><자본당 선언>에선 가족이 부재한 거리의 청년(들)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가출자들은 곧바로 난처한 상황에 직면한다. 그것은 거리가 더 이상 40년전의 거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거리는 이미 영화사에 편입됐고, 20세기 후반의 맹렬한 산업화의 힘이 거리의 미학적 잠재력과 역동성을 흡수해버렸다. (반전시위마저 CF이미지로 전용하는 오늘의 기업을 떠올려보라.) 여기서 몇가지 가능성이 생긴다. 그리고 각각의 경우에 디지털은 다른 층위에서 텍스트와 연관된다.

그 중 하나는 방황을 무위하다고 느끼거나 혹은 지친 나머지 가출자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 집 앞>은 그 골방으로의 회귀를 극화한다. <그 집 앞>에선 두 여인이 각각 전반과 후반에 등장한다. 전반의 여인은 유부남 애인을 떠나와 자신의 방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뒤 자신의 음식을 받지 못하는 자신의 몸과 싸우며, 후반의 여인은 남편과 애인을 떠나오지만, 결국 여관방에서 자위하다 울음을 터뜨린다. 두 여인은 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리고 영화의 순서와는 반대로 전자는 후자의 결과처럼 보인다. 가출은 무위로 끝났고, 그녀는 골방으로 돌아온다. 골방에서 지속가능한 생의 방식은 자신의 육신을 이상화하는 것, 곧 나르시시즘의 기획이다. 다시말해 미학적 육체적 욕망 양자를 오로지 자신의 육신을 통해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가 예정된 기획이다. <그 집 앞>은 관계의 실패가 아니라 나르시시즘의 실패의 고백이다. 그를 통해 디지털 세대의 난관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디지털은 준인격적 존재로서의 내밀한 일기장이다.

상영작엔 포함돼 있지 않은 <서브웨이 키즈>의 아이들은 <그 집 앞>과 달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대신 그들은 가출한 디지털 세대의 또다른 선택을 보여준다. 범죄로 먹고사는 그들의 취미는 마약과 촬영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텍스트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를 갖고 노는 그들의 모습이 디지털 카메라에 담긴다. 그들에게 디지털은 마약과 마찬가지로 거리에서의 실패를 달래는 유희의 수단이며 동료다. 이것은 전통적 의미의 액자구조화와는 다른, 카메라의 인격화라고 할만한 방식이다. 그들은 극 중에서 자신과 동료들을 찍어대지만 그 속에 담기는 이미지들이 내러티브 상의 기능을 맡지 않는다. 디지털 카메라의 물질성 자체에 의존함으로써, 그들은 ‘살아있는 역사’로부터 더욱 멀어지려 한다. 여기서 디지털은 아직 충분히 사용되지 않은 게임기다.

<자본당 선언>은, 앞선 두 영화와는 다른, 제3의 길을 택한다. 그것은 디지털 카메라를 비평의 무기로 사용하는 것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텍스트 밖의 하나의 기능으로 되돌려지면서, 오히려 기능 자체는 극대화한다. 같은 장면이 수없이 반복되면서 변주되는 <자본당 선언>의 반 전통적 내러티브와, 반복가능하며 쉽게 지워지는 디지털 이미지의 질감과는 깊은 연관이 있다. 거리로 나간 디지털 세대는 이제 자신의 실패를 세상의 실패로 치환하며 세계의 운동방식 자체를 비판한다. 그 비평은 과잉이지만 <자본당 선언>이 새로운 비평의 무기로서의 디지털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허문영/ 부산영화제 한국영화 프로그래머

Digital media : Is it a private journal or a weapon of criticism?

HUH Moon-young / PIFF Korean Panorama Programmer

This year, for the 8th Pus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10 digital feature films were submitted. It is a clear evidence that somewhere outside of our visual perimeter, a new form of filmmaking is coming into being.

In <Invisible Light>, <Capitalist Manifesto: Working Men of All Countries, Accumulate!>(hereinafter referred to as <Capitalist Manifesto>), and <Subway Kids>(no screening at PIFF '03), digital camera explores the streets life in order to escape from restrictions and benefits of 'the system.' In a narrative sense, the act of running away from 'the system' is personified by the adolescents who have parted from their families. In <Invisible Light>, the 'adolescents' are the 2 women who leave their lover or husband. In <Capitalist Manifesto> and <Subway Kids>, the 'adolescents' are the homeless youths, Unfortunately, runway adolescents of the digital age are soon faced with difficult situations. The streets already have been incorporated into films. Plus, the vigorous power of industrialization in the late 20th century has fully absorbed the potential energy and strength of street life. (Even the images of Anti-War demonstrations have commercial values in modern society.) Now, the new possibilities lay at our feet. In each possibility, the digital medium relates to its 'text' on a different level.

One possibility is for the adolescents to come back home when they find their action of running away meaningless or, simply, they get tired. In <Invisible Light>, the story gets dramatized when 2 women return to their own little room. The woman who appears in the first half of the story, confines herself in her own room after ending her illicit affair with a married man and struggles with her own body. The other woman who appears in the latter half, masturbates and weeps in a motel room after leaving her husband and her lover. The only way to sustain life in a small confined room is to idealize their own bodies. In other words, it is a plan of narcissism, a plan that is bound to fail. <Invisible Light> is a confession of failure of narcissism, not failure of relationships. In this film, digital media acts as a confidential journal of a semi-moral being.

On the other hand, <Capitalist Manifesto> uses digital media as a weapon of criticism. In this film, a digital camera is only a form of technology outside of 'text' and itself, as a machine, is dramatized. The repetitiveness of a scene to alter the semi-traditional narrative of <Capitalist Manifesto> has a profound relation to easily repeated and easily erased qualities of digital images. The generation of digital media replaces their own failure with the failure of the world, then proceeds to criticize the movement process of the world. The criticism is excessive but it is clear that <Capitalist Manifesto> has unfolded the possibility of the digital media as a new weapon of criticis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