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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Choice 2] <머나 먼(Uzak)>
2003-10-04

<머나 먼(Uzak)>

월드 시네마/ 터키/ 2002년/ 110분/ 감독 누리 빌제 세일란/

오후 2시 대영1관

무표정한 얼굴로 덩그러니 앉아 있는 사십대 남자. 그의 등 뒤로 희미하게 꼬물대는 배경은 한참을 바라봐야만 그것이 여자의 벗은 몸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이 살을 섞는 사이일지는 몰라도 마음을 나누는 일은 없을 터다. 이때 또 다른 남자가 적막한 설원 저편에 작은 점으로 나타나 화면 가득 얼굴이 들어찰 때까지 느리고 힘겨운 발걸음으로 다가온다. 이 쓸쓸하고 무기력하고 처량한 첫인상 그대로, 사촌형제간인 두 남자의 만남은, 그 겨울 그렇게 이뤄진다. 풍경으로 마음을 전하는 영화 <머나 먼>의 ‘끝이 보이는 시작’이다.

이스탄불에서 사진작가로 일하는 마흐무트는 섹스 파트너가 있지만, 이혼한 아내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공장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사촌동생 유수프의 방문 소식이 반가울 리 없다. 유수프는 세계 각지를 돌아다니면서 미국 달러도 벌 수 있는 외항 선원이 되고자 하나, 길은 쉽게 열리지 않는다. 좋아하는 여자도 생겼지만, 그녀의 환심을 사기엔 역부족이다. 사촌형과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형은 그 누구와도 그 어떤 소통도 원치 않는 사람이다. 지친 동생은 시골로 돌아가고, 형은 이스탄불에 다시 홀로 남는다.

<머나 먼>은 그리 많은 사건을 나열하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기대, 미래에 대한 희망, 고향에 대한 향수 따위는 진작에 폐기 처분하고 도시에 정착한 사진작가의 소소한 일상이, 어쩌면 그의 과거이기도 할 사촌동생의 방문을 계기로 작은 불협화음을 일으키며 전개될 뿐이다. <작은 마을> 등 고향과 과거에의 향수를 즐겨 이야기하던 누리 빌제 세일란은 전작의 연장선상에서, 자꾸만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있는 현대 도시인의 초상을 잿빛 탄식과 함께 토해 놓는다. “삶은 얼마나 무의미하고 공허하며 또한 부조리한가”라고. 극중에 두번이나 삽입된 타르코프스키의 영화(<거울>과 <스토커>)는, 실제로 감독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작품들. <머나 먼>의 ‘사유하는 이미지’에 매혹된 올 칸영화제는 이 작품에 심사위원 대상과 남우주연상을 안겨줬다.

PS: 칸영화제는 <머나 먼>에서 과묵한 사촌형제를 연기한 두 배우에게 공동으로 남우주연상을 헌사했지만, 시골 청년 유수프를 연기한 메메트 에민 토프락은 이 영화의 칸 진출이 결정된 직후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상태였다. 누리 빌제 세일란 감독은 그의 사촌동생이자 터키의 촉망받는 연기자였으며 막 웨딩마치를 올린 새신랑이었던 토프락의 영전에 트로피를 바쳤다.

글 박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