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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neChoice 3] <침묵의 물>, <붉은 황금>, <희미한 불빛>, <사막의 춤>
2003-10-05

<침묵의 물 (Silent Waters)>

아시아 영화의 창/ 파키스탄, 독일, 프랑스/ 2003년/ 110분/ 감독 사비하 수마르/

오후 8시 메가박스 3관

<침묵의 물>은 파키스탄의 격변기 속에서 가장 큰 희생을 겪어야 했던 여성의 현실을 비추는 영화다. 1977년 군부의 지아 장군은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을 등에 업고 부토 정권을 무너뜨린다. 그리고 2년 뒤, 광풍은 작은 마을인 차크리에도 불어닥친다. 부토를 처형한 근본주의자들은 과격한 이슬람 율법을 설파하면서 마을을 공포분위기로 몰아넣고, 젊은 피리 연주자 살림도 이에 동조하기 시작한다. 자립적인 여성인 그의 연인 주베이다는 그의 모습을 보며 걱정하지만, 살림은 오히려 주베이다와의 관계를 끊으려 한다. 그리고 이 다가올 소용돌이를 바라보는 살림의 어머니 아예사의 표정에는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한다. 보이지 않던 광풍이 서서히 바람을 모으기 시작하는 것은 한 시크교도가 마을로 들어오면서부터. 그동안 이 마을 사람들은 힌두교와 이슬람교가 혼합된 이 종교에 대해 그리 적대적이지 않았으나, 근본주의자들은 뭔가 꼬투리를 잡아 그를 몰아내려 한다. 이와 함께 아예사의 불안감은 눈에 띄게 더해간다. 인도로부터 파키스탄이 분리되던 1947년 당시 뭔가 엄청난 일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1947년과 1979년의 시점을 끊임없이 교차하는 가운데, 그리고 후반부 2002년으로 점프하면서, 여전히 우물 속 깊은 나락 같이 비참한 파키스탄 여성의 현실을 고발한다. 파키스탄에선 매우 드문 여성 독립영화 감독 사비하 수마르는 힌두교, 이슬람교, 시크교 등 사이의 끊임없는 종교분쟁 속에서 가장 큰 희생을, 때로는 죽음까지 강요받았던 존재가 바로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밀도 짙게 보여준다. 올해 로카르노영화제 대상작이기도 하다.

글 문석

<붉은 황금 (Crimson Gold)>

아시아영화의 창/ 이란 / 2003년/ 97분/ 감독 자파르 파나히/

오후 4시 메가박스 6관

“도둑을 체포하려 한다면 세상을 체포해야만 할 것이다.” 나름의 식견과 전문가 의식을 가진 영화 속의 도둑은 이렇게 말한다. 얘기인즉 남의 재산을 가지려 하는 행위는 세상에서 가장 널리 퍼진 ‘직업’일 것이고 우리 가운데 누구도 그 일에 빠져들 수 있다는 것이다. <붉은 황금>의 주인공 후세인은 이 ‘이론’의 한 가지 (불행한) 사례가 되고만 인물이다. 영화가 시작되면 우리는 이 남자가 한 보석상에서 강도짓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예기치 못한 다급한 상황이 일어나면서 그는 보석상 주인을 죽이고 만다. 보석상 안에서 길쪽을 향해 그동안 묵묵히 지켜보던 카메라는 천천히 앞으로 이동을 하더니 자신의 머리를 향해 총을 들이대는 후세인의 얼굴을 보여주기에 이른다. 이 이란산 범죄영화는 이후로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어떻게 건실한 피자 배달원이었던 후세인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려 한다. 친한 친구의 동생과 결혼을 앞두고 있는 그는 약혼자에게 결혼 선물을 해주고 싶어 고급 보석상을 찾지만 첫눈에 돈이 없어 보이는 그는 여기서 모욕감만을 맛본다. 그렇듯 후세인을 좌절로 이끈 주요 동인은 빈자와 부자 사이에 놓인 깊은 골이었던 것이다. 전작 <써클>에서 여성들을 구석으로 내몬 이란사회에 카메라를 들이댔던 자파르 파나히는 이번 영화에서는 후세인의 오토바이를 타고 돈 없는 이들에게 깊은 굴욕감을 주는 이란사회를 격하지 않은 목소리로 가끔은 부조리한 유머를 섞어가며 이야기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가 시나리오를 썼다.

<희미한 불빛 (Distant Lights)>

월드 시네마/ 독일/ 2003년/ 105분/ 감독 한스 크리스티안 쉬미트/

오후 8시 부산 2관

<희미한 불빛>은 수많은 사람들의 사연이 뒤얽혀 있는 독일과 폴란드의 국경지대를 탐험하는 영화다. 이곳에는 독일로 불법 입국하려는 우크라이나인들이 있고, 이들의 사정을 안타까워 하며 도우려는 통역사와 딸 아이에게 성찬식 드레스를 사주기 위해 이들의 불법 입국까지 주선해야 하는 폴란드 택시운전사도 있다. 또 큰 돈을 위해 몸을 사리지 않는 폴란드의 아름다운 젊은 여성과 한때 그녀의 연인이었지만, 배신해버린 독일 남자가 있으며 매트리스 장사를 하다 쫄딱 망해버린 빈궁한 사업가와 그의 곁을 지켜주려는 여성도 있다. 이 각기 다른 조건과 상이한 욕망을 가진 사람들이 한데 얽혀가면서 영화는 조금씩 슬퍼져 간다. 한 우크라이나인은 통역사의 차 트렁크 안에 숨어서 독일로 들어가려하고 또 다른 우크라이나 부부는 택시운전사에 의지해 국경의 강을 건너려 한다. 건축회사에 다니는 독일 남자는 공사 수주를 위해 폴란드 여성을 ‘성상납’하려는 사장에게 대들며, 매트리스 사업가는 엄청난 빚을 안은 채 쓰러지려 한다. 이 아슬아슬한 상황, 그들에게 절실한 도움을 주는 것은 바로 그들 곁에 있는 다른 사람들이다. 동기와 사연이야 서로 다르지만, 이들은 결국 자본주의적 관계를 넘어서는 진정한 연대와 호혜적 관계의 가능성을 역증하는 존재들이다. 이 영화는 그 제목처럼, 조그만 입김에도 꺼질 수 있는 ‘희미한 불빛’이지만, 최소한 아직까지는 이 불빛 아래서 사람과 사람들이 어깨를 맞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뜨거운 마음을 가진 <매그놀리아>라 할만하다. 올해 베를린영화제 국제평론가협회상 수상작인 이 영화는 <굿바이 레닌>과 함께 새로운 독일영화의 도래를 알려주는 이정표이기도 하다.

글 문석

<사막의 춤 (Dancing In The Dust)>

새로운 물결/ 이란/ 아쉬가르 파르하디/ 2003년/ 95분

오전 10시 메가박스6

이 영화를 서슴없이 걸작이라고 말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사막의 춤>은 걸작만이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깨우쳐준다. 나자르는 버스 안에서 만난 레이하네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까지 한다. 그러나 레이하네의 어머니가 매춘부라는 이유로 그들은 이혼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른다. 레이하네를 사랑하는 마음이 변치 않은 나자르는 그녀의 새로운 결혼 지참금을 마련해주는 것만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의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도망치던 나자르는 우여곡절 끝에 땅꾼 하지의 차를 타고 사막에 도착한다. 나자르는 그곳에서 뱀을 잡아 돈을 마련하려다가 도리어 손가락을 물려 절단하게 된다. 병속에 담긴 손가락과 결혼반지를 쳐다보며 나자르는 슬픔과 아픔을 참지 못해 운다. <사막의 춤>은 화려한 화술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감동을 가져오는 힘을 갖고 있다. 아쉬가르 파르하디는 이 슬픈 사랑 이야기를 소중하게 다룬다.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받은 파라마르즈 가르비안은 순진하고 덜떨어진 주인공 나자르 역을 충실히 소화하면서 이 영화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그의 엉뚱한 모습은 웃으면서 울게 되는 영화의 뒤섞인 감정과 어울린다. 사랑의 낙원을 보여줄 듯한 낭만적인 첫 장면 이후, 붕대를 감은 손을 뒤로 하고 돈뭉치를 넘겨주는 슬픈 마지막까지, 착하고 순진한 나자르에게 현실은 장애로 가득 찬 사막일 뿐이다. 그래서 <사막의 춤>은 현실에서 길을 잃고, 사랑을 위해 돈을 구해야 하는 슬픈 신밧드의 모험처럼 보인다.

글 정한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