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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ecial] 아프간에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은‥
이영진 2003-10-08

<오사마> 감독 세디그 바르막이 이야기하는 영화 제작기

<오사마>는 탈레반 정권이 무너진 다음 만들어진 아프가니스탄의 첫번째 장편영화다. 전쟁의 포화 속에 변변한 카메라 하나 없는 변방에서 만들어진 영화이기에, 혹자는 허술하기 그지없는 필름조각이라고 업신여길지 모른다. 하지만 정작 영화를 대하면 데뷔작이라고 믿기에 의혹이 일만큼 사려깊다. 한 소녀가 생계를 위해 소년으로 변장하게 되면서 이어지는 파국은 폐허로 변한 아프가니스탄의 풍광과 맞물려 묘한 긴장과 오랜 여운을 남기기 때문. <오사마>를 들고 올해 처음 부산을 찾은 세디그 바르막 감독(41)을 붙잡고서 그 비밀을 물었다. 가난하지만 영화를 찍기에 행복한 이들의 원초적인 아우성을 지상중계한다. 편집자

 

# 1

“길거리에선 채찍질이 가해졌다. 귀와 다리를 잘라내는 만행도 빈번했다. 포악한 탈레반 정권 아래서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탈레반 정권은 영화제작을 완전히 금지했다. 그게 파키스탄으로 떠난 이유다”

<오사마>의 제작은 7년전 바르막의 파키스탄 망명 시절로 거슬러오른다. 탈레반 정권의 폭정을 피해 몸을 숨겼던 바르막은 그곳에 머무는 동안 한 잡지에 난 아프가니스탄 관련 기사를 읽었다. 13살 소녀가 학교에 가고 싶어 남자아이로 변장했다가 결국 발각되고 이 일로 인해 교장이 감옥행 신세가 됐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이 기사를 바탕으로 시나리오를 썼다. 단편이라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동료의 소개로 <칸다하르> 촬영을 위해 파키스탄으로 건너온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을 만난다. 그게 인연의 시작이 될 줄이야. 탈레반 정권이 붕괴되고 2001년 다시 카불로 돌아온 그는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오후 5시>를 아프가니스탄에서 촬영할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카불을 찾은 모흐센과 다시 만나게 된다. 당시 그는 도저히 단편으로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못할 것 같다는 고민을 털어놨고, 모흐센은 그의 아낌없는 후원자를 자임했다.

   

# 2 

“캐스팅을 위해 여기저기 쏘다니다 밤이 되버렸다. 길가에서 잠시 앉아 쉬고 있는데 누군가 ‘아저씨, 저 돈 좀 주세요’ 하는 거다. 봤더니 한 여자아이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눈이 굉장히 인상적이어서 이름을 묻고 나서 영화를 찍자고 했다. 그랬더니 ‘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영화는 물론이고 TV도 본적이 없는 아이였다”

바르막은 직업 배우를 피하기로 맘먹었다. 사미라 마흐말바프의 <오후 5시> 촬영현장에서 느꼈던 강렬함 때문이었다. 삶을 가공치 않고 영화 속으로 끌어들여오는데서 비롯되는 역동적인 기운은 데뷔를 준비하고 있던 그를 한껏 고양시켰을 것이다. 그때부터 바르막은 고아원과 학교와 거리를 돌아다녔다. 이때 만난 아이들만 3천명에 이른다. 애초 바르막은 주인공으로 남자아이를 염두에 두고 있었는데 마땅한 아이를 발견하기 쉽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당시 12살이던 마리나 골바하리를 만났다. 몹시 추운 밤거리를 배회하던 ‘성냥팔이 소녀’ 마리나는 그에게는 우연히 찾아든 ‘행운’ 같은 존재였다. 바르막은 슬픔과 두려움이 수시로 교차하는 눈망울에서 ‘오사마’를 예감했다.

#3

“마리나는 학교에는 가끔 간다고 했다. 기술을 배우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가는 것이라 했다. 당시 대부분의 학교에선 글 대신 기술을 가르쳤다. 마리나는 학교를 가지 않는 대부분의 나날을 길거리에서 보내면서 구걸로 연명하는 아이였다. 그녀의 자매들도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마리나에게는 어떤 사전 요구도 주어지지지 않았다. 바르막은 일부러 줄거리도 말해주지 않았다. 비극적인 상황에 그대로 노출시킨 다음 마리나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지켜보기로 했다. 그리고 즉각적인 반응을 담기로 했다. 실제로 촬영 도중 후반부에 늙은 남자가 오사마에게 족쇄를 채우는 장면에서 마리나는 정말로 겁에 질려 꺼이꺼이 울었다. 바르막은 자신의 연기 연출이 가혹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리허설 중에 폭격으로 죽은 언니에 대한 기억을 캐묻자 마리나는 울기 시작했고, 이 광경을 지켜보는 바르막과 스탭들 또한 버거웠다. 그 일이 있은 후, 마리나는 대사를 줄 때마다 자신의 감정을 날 것 그대로 조금씩 뱉어내기 시작했다.

#4

“11월21일은 내겐 기념일이다. 첫 촬영을 시작한 날이어서만은 아니다. 그땐 탈레반 정권 이후 첫 영화라는 사실에 모두들 흥분한 상태였다. 난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면 되겠다고 여겨서 일부러 어려운 군중 장면을 첫 촬영분량으로 택했다. 그런데 통제가 만만치 않았다. 난 패닉 상태에 빠져들었고, 신경성 위장병까지 도졌다. 기한을 넘겨 사흘하고 반나절이 되어서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이날은 탈레반 정권이 직장을 폐쇄하고 여성들의 사회생활을 금지하자 이에 대항하여 시위하는 여성들의 행렬 장면을 찍을 계획이었다. <칸다하르><오후 5시> 등의 제작 실무를 맡기도 했던 프로듀서가 여성보호소에 연락을 취해 소정의 출연료를 지급한다는 조건으로 엑스트라 900여명을 모았다. 이란에서 수리해 온 것까지 포함하여 3대의 카메라도 액션 구령만을 기다리면서 만반의 채비를 갖췄다. 그러나 대규모 인원을 통제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안전요원들이 나서서 메가폰을 들고 진행했지만 원하는 그림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엑스트라 중 3분의 1정도가 오히려 탈레반에 저항해서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 큰 의미를 가진다며 위안을 줬다. 몸과 마음은 피폐해진 상태였지만, 그들은 뭔가 발언할 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고 바르막은 말한다. “그들은 영화에서처럼 진심으로 탈레반 정권을 향해 소리친 것이다”

 

#5

“촬영을 시작한 지 10일쯤 됐는데 어린 아들과 딸이 엄마를 졸라서 현장엘 왔다. 짬이 나서 소감을 물었더니만 딸은 “탈레반 군이 무섭다”고 하고 여섯살짜리 아들은 “총을 쏴보고 싶다”고 해서 날 놀래켰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사람들은 두려움과 공격성이라는 극단적인 감정을 오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사마>는 결혼식 장면을 제외하고 대부분 어두운 톤 일색이다. 바르막은 이에 대해 “전쟁은 끔찍하다. 선한 마음까지 파괴해 버린다. 영화가 비추는 폐허가 되버린 도시는 어쩌면 그런 아프가니스탄 사람들의 황폐한 내면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라는 말로 이를 설명한다. 촬영현장에서 바르막을 가장 괴롭힌 것 또한 끔찍한 현실을 다시 들여다봐야 한다는 사실이었을 것이다. 극중 병원 장면을 찍으면서 그는 도저히 뷰파인더를 들여다 볼 수 없었다. 제 몸 건사하려고 모두들 서둘러 빠져나간 병원 복도에서 홀로 남은 아이가 뒤뚱거리면서 힘겹게 걷는 장면을 롱테이크로 찍으면서 그는 울고 또 울었다. 아무도 손을 내밀어주지 않는 아프가니스탄의 현실이 떠올라서였다. 물론 영화가 사람을 치유하는 기적을 보기도 했다. 오사마의 할머니 역으로 나왔던 노파는 어렸을때 인도영화를 즐겨봤다면서 촬영 내내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탈레반 병사 역도 실제 경험이 있는 사람이 자신의 전과를 지우고 싶다며 자청해왔다. 영화가 화해의 세상을 일구는데 복무해야 한다는 그의 확신은 촬영이 진행되면서 더욱 굳어졌다.

 

#6

“따로 촬영 장소를 찾아 나설 필요는 없었다. 3백만명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도시 카불은 전쟁으로 인한 폭격 때문에 절반 이상이 파괴됐다. 우린 그런 곳을 찾아다니며 촬영했고, 이 와중에 몇가지 문제가 우리를 괴롭혔지만, 매일매일이 즐거웠다”

 

탈레반 정권은 물러났지만 그렇다고 탈레반 옹호자들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제작진을 쫒아다니며 촬영을 방해하기 일쑤였다. 소란을 피우거나 여자 연기자들에게 추근덕거리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지 얼마되지 않아 각종 시설들이 전무하다는 것은 더욱 고역이었다. 대중교통이 없어 덜덜거리는 고물차로 이동했는데 고장이 나기라도 하면 모두들 달라붙어 수리하느라 진땀을 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전기 또한 없었다. 그래서 촬영현장에는 항상 대형 발전기가 동원됐다. 무시무시한 소음 때문에 모두들 짬만 나면 귀를 막고 괴로워했다. 밤이 되면 어김없이 엄습하는 추위와의 싸움도 제작진을 힘들게 했다. 오후 5시부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12시간 동안 촬영이 이어지는 날도 빈번했다. 거기에다 수은주는 영하 15도까지 곤두박질쳤다. 묵묵히 촬영에 임해줬던 스탭과 배우들이 아니었다면 크랭크 업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마리나가 물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모든 촬영이 종료된 그 날 또한 잊을 수 없다. 마리나는 다시는 동료들을 볼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엉엉 울었다. 마리나 뿐만이 아니었다. 모두들 한데 엉켜 울었다.

 

이란의 테헤란에 있는 스튜디오에서 후반작업을 마친 뒤 아프가니스탄에서 <오사마>가 상영됐을 때 호응은 엄청났다고 한다. 뉴스에서도 상영 이후 반응을 다룰 정도였다. 오사마의 비극이 자신과 무관한 불행이 아니었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첫번째 장편영화 <오사마>로 올해 칸 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됐던 그는 현재 아프간영화협회의 리더이기도 하다. 그는 아프가니스탄의 모흐센 마흐말바프가 되길 주저하지 않는다.

(여담 하나. 마지막 촬영을 끝내고 나서의 소회를 떠올려달라는 질문에 바르막은 대답 도중 눈시울을 붉히더니 기어코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눈물만큼 전염성이 강한 것이 있을까. 통역을 맡아준 이도 고개를 숙이고 훌쩍였다.) 글 이영진 취재지원 이다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