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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덴의 저편에 잠들다,엘리아 카잔
김혜리 2003-10-08

엘리아 카잔 감독이 지난 9월28일 맨해튼에서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94살. 유족으로 세 번째 아내 프랜시스 러지와 다섯 자녀가 있고, 유산으로는 할리우드 리얼리즘영화의 명작과 ‘밀고자’라는 오명이 있다. 엘리아 카잔 감독이 뉴스의 중심에 선 마지막 순간은 아카데미로부터 공로상을 받은 1999년 오스카 시상식장이었다. 제아무리 위대한 평생의 예술적 공로도 1952년 미국 의회 반미행위조사위원회에서 옛 동료의 공산당 활동을 증언한 카잔의 ‘비신사적’ 행위를 덮을 수 없다고 여긴 일부 영화인들은 기립박수를 보이콧했다.

처연한 말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사실 엘리아 카잔에게 따돌림받는 일이 낯선 고초는 아니었다. 터키 이스탄불에서 그리스계 양탄자 상인의 아들로 1909년 9월7일 태어난 엘리아 카잔은 네살 때 가족과 함께 뉴욕으로 이주했다. 아버지는 카잔을 쓸모없는 자식이라고 생각했지만 로버트 스티븐슨과 빅토르 위고를 읽어주던 어머니의 의견은 달랐다. 친구도 없이 사춘기를 보낸 카잔은 예일대에 진학해 연기와 연출을 공부했고, 1932년 ‘극단 그룹’에 합류했다. 여기서 엘리아 카잔은 그의 사적, 공적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친 첫 아내 몰리 데이 대처를 만났고, 30년대 중반 공산당에 입당했다. 당시 진보적인 연극계에서는 드문 일도 아니었다. 카잔은 2년간 당적을 유지했으나 자유토론이 억눌리는 분위기에 등을 돌렸다.

극단 그룹의 해체로 시작한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엘리아 카잔은 브로드웨이와 할리우드의 총아로 승승장구했다. 이십세기 폭스사의 제작자 대릴 F. 자누크와 맺은 협력관계는 풍성한 결실을 맺었다. <부메랑> <거리의 패닉> <신사협정> <핑키> 등 사회적 리얼리즘을 강렬한 드라마에 담은 카잔의 영화는 인기와 존경을 동시에 얻었다. 1951년 센세이션을 일으킨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는 <비바 자파타!> <워터 프론트>로 이어진 말론 브랜도와의 파트너십을 개시했다. 그러나 카잔의 묘비명에 새겨질 만한 최고의 업적은 특정 작품이 아니라 1947년 리 스트라스버그와 설립한 액터즈 스튜디오였다. 엘리아 카잔은 연극과 영화를 막론하고 연기에 관한 한 마술사 같은 연출자였다고 사람들은 전한다. 배우가 사적 경험을 끌어내 캐릭터와 완전 동화되는 심리적 자연주의 연기, 즉 메소드 연기의 전당이었던 액터즈 스튜디오는 말론 브랜도, 제임스 딘, 몽고메리 클리프트, 폴 뉴먼, 로드 스타이거, 워런 비티를 할리우드에 선사했고 미국 내 연기상의 60%를 졸업생들이 싹쓸이한다는 전설까지 낳았다.

그러나 경력의 정점인 1952년 4월, 옛 동료들의 공산당 활동을 확인한 카잔의 청문회 증언은 그를 다시 냉랭한 고독 속으로 돌려보냈다. 그의 변명은 지나치게 소략했다. “나는 공산당원들을 오랫동안 싫어한 터였다.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내 일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어도 사과하지 않는 카잔의 태도는 피해자들의 분노에 불을 지폈으나 엘리아 카잔은 <워터 프론트>(1954), <에덴의 동쪽>(1955), <초원의 빛>(1961), <아메리카 아메리카>(1963) 등 줄기차게 영화를 만들었고 일부 평론가는 그의 정점을 후기 작품 가운데에서 발견하기도 했다.

1976년 F. 스콧 피츠제럴드의 마지막 소설 <라스트 타이쿤>을 영화화한 뒤 엘리아 카잔은 서재에 파묻혔고 소설과 수기에 창작욕을 배출했다. 그러나 갈채와 야유로 분열된 1999년 오스카 시상식장은 세월의 치유력을 비웃었다. 카잔의 과거를 종교재판에 직면한 갈릴레오에 비유한 후배 영화인도 있었지만 시상식장에서 저격을 기대한다고 극언한 사람도 있었다. 스스로 껍질을 벗으며 몇개의 생을 산 검은 뱀이라고 불렀던 엘리아 카잔은 이제 마지막 탈피를 끝내고 에덴의 저편으로 떠났다. “울적한 장례는 원치 않는다. 대신 파티를 열어 모든 사람을, 오래된 적대자들까지 초대해달라”는 것이 고인의 소망이었으나, 초청장을 받을 만한 대다수 적대자보다 카잔은 오래 살았다. 김혜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