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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적으로 확실히 무책임한,<도플갱어>

지독한 묵시록과 달뜬 희망을 함축하는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플갱어>

<도플갱어>라는 제목을 처음 들었을 때 떠올렸던 것은 검은 선글라스와 물방울 문양 스카프를 한 여인의 얼굴이었다. 사실은 그 여인의 이름조차 알고 있다- 드루 배리모어. 착해서 거미 한 마리 때려죽일 수 없는 청순가련형 여자가 있는가 하면 그와 똑같이 생겼지만 엽기적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 선글라스에 스카프한 요부가 있다. 이 둘은 구별할 수 없을 만치 외관이 같다는 것 외에 연결고리랄 게 없다. 단서가 있다면 섹스 정도? 이 두 사람이 정말 두 사람인지 아니면 한 사람인지에 대해 거듭 말을 바꾸다가 느닷없는 결론에 이르는 하품나는 스릴러. 이상이 1993년 드루 배리모어 주연의 동명영화 <도플갱어>다. 유감이지만 이 이상 더 기억할 게 없다.

하지만 굳이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1)독일 민담에 나오는 ‘도플갱어’라기보다는 사실은 영미권의 ‘사악한 쌍둥이’(Evil Twin) 얘기다. 그 말은 이 둘의 관계가 선악의 대립항으로 묶인다는 뜻이다. 2)이 분리를 통해 도달하려는 곳은 결국 섹스와 욕망이다. 억눌렸던 것이 벌떡 일어나 저지르는 통제불능 상태는 전복적 B급영화의 쾌감을 선사한다. 3)하지만 결론은 무책임하다. 마치 2시간 동안 강간과 살인을 저지르는 ‘상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다가 5분 동안 눈물로 참회하였더라 하는 식으로서의 모범적인 결론. 사실상의 주인공은 도플갱어지만 결국 본체와의 대결 끝에 그동안의 악행의 징벌로서 처벌받고 소멸한다. 이상이 ‘도플갱어’ 소재의 호러나 스릴러에 대한 일반적 기대치이거나 장르의 공식일 것이다.

‘식민지화’의 문제

그렇다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플갱어>는? 우선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야 할 차례다. 그렇다면 단연 그건 ‘선글라스와 스카프’라고 해야겠다. 다른 많은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그렇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플갱어에게는 관객의 편의를 위해서라도 있을 법한 스카프와 선글라스가 없다. ‘나는 도플갱어입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물론 휘파람 정도가 있지만 적어도 여기서 썩 중요한 대목은 아니다).

때문에 극중 인물들도 결국 두명의 하야사키를 헷갈리지만 관객도 이 두 사람을 헷갈린다. 물론 그것은 의도적이다. 본체와 도플갱어간의 경계선을 지우는 의도. 혹은 둘 다 도플갱어이거나 자기 자신이라는 둘간의 대등한 설정 말이다. 그리고 그 의도는 어쩌면 <간다천 음란전쟁>에서부터 시작해 <큐어> <회로> <해파리> 등을 모두 통과한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구로사와 기요시의 <도플갱어>는 진지하게 ‘무늬만 도플갱어’인 이블 트윈을 끌어들이지 않는 진짜 ‘도플갱어영화’다. 편의상 본체니 도플갱어니 해도 실은 둘은 대등하다. 이것이 구로사와 기요시가 정해놓은 도플갱어에 대한 일종의 정의(定意)다. 영화의 시작은 따라서 정중앙에 무표정한 하나의 하야사키가 나왔다가 두 화면으로 갈라져 복제된 뒤 이 두 화면이 각각 전혀 다른 표정을 짓는 장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동생의 도플갱어와 어색한 동거를 하게 된 유카의 ‘둘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봐야 하는 거냐?’는 질문의 명확한 대답으로서. 그러니까 하야사키가 그 질문에 대해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대답한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다.

문제는 도플갱어가 튀어나온 이유다. 물론 모든 총구는 불을 뿜기 위해 존재하고 쪼개진 도플갱어는 결국 죽거나 다시 합치려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짜 도플갱어’(이블 트윈)가 아닌 진짜 도플갱어가 나오는 이 영화는 기본적으로 ‘하나 되기’에 대한 영화라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죽거나 합치거나 간에 쪼갠 원인이 무엇이냐이다. 그 원인이 (상식적이게도) 억압된 것이 돌아왔기 때문이라면 본체와의 건전한(?) 대화를 통해서 치유에 도달하고 다시 합치거나(평범한 정신분열극) 잠시 억눌린 것들이 살풀이할 시간을 허락하고 그것들이 하는 짓을 함께 즐긴 뒤 죽여버리면 될 것이다(보수적 B급영화).

그러나 <도플갱어>에서 억눌린 것은 도플갱어쪽만이 아니다(다시 말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편의상 구분이다). 본체 또한 눈에 보이는 실적을 약장수 공연 수준이라도 계속 보여야 하는 연구자로서 회사의 부조리함에, 최선을 다하자는 당위론에 입각해 ‘힘내세요’ 하고 외치는 팀원들의 엇박자 나는 기대에 억눌린다. 여자와 자고 싶으면서도 ‘어떻게 그런 짓을!’ 정도의 공허한 말밖에 할 줄 모르고 연구 결과로 다가올 부와 명예, 권력이 동기부여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면서도 감히 인정하지 못한다. 그런 그가 인공신체의자에 집착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는 자신의 욕망의 투사(投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야사키는 인공신체의자가 “인간의 복잡성에 부응할 수 있어야 할 만큼 정교해야 한”다고 우긴다.

반면, 욕망에 솔직한 도플갱어는 그런 투사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쾌활하고 어찌보면 썩 매력적이라서 얼핏 보아 억눌렸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정도다. 위험하지만 적어도 한풀이를 게걸스럽게 해치우느라 소란을 피우거나 떼를 쓰는 사이코는 아니다. 오히려 “내게 다 맡겨”라고 말하지 않는가! 유일한 문제는 그가 하야사키로 인정받지 못한다는 점일 것이다. 뻔뻔할 만큼 자신을 이용하려드는 하야사키의 뒤치다꺼리를 하면서 의례적인 감사 정도로 만족하는 것은 그저 하야사키 미치오임을 인정받기 위한 것, 즉 ‘하나가 되기’ 위함이다.

그러나 ‘하나 되기’는 요원하다. 죽은 사람의 안부를 되물을 만큼 하야사키가 남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에? 실은 귀를 기울이고 ‘이해’하며 합쳐보겠다는 정신치료적 태도에 이미 도플갱어를 본체의 그림자 정도로만 취급하는 전제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본체’(origin)인 하야사키가 ‘도플갱어’(supplement)인 하야사키에 대해 갖는 우월성, 아니 이미 자기가 본체라거나 하는 말을 하면서 나타나는 그 ‘식민지화’의 문제가 그대로 남는 것이다. 하야사키가 눈을 감고 ‘사라져라 사라져라’ 하고 마인드 컨트롤하는 장면의 코미디는 어느 정도 그 부분에 대한 조롱이다.

부활체의 활극

이쯤하면 ‘밝은 미래’가 정말 밝은 게 아니었던 것처럼 구로사와 기요시의 ‘하나 되기’가 정말 ‘하나 되기’가 아니라는 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그때 갑자기 영화는 정치적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전공투 세대라든가 버블경제 세대라든가 하는 구체적인 지시를 담는 식은 아니다. 부재의 방식으로 존재하거나(<카이로>), 불가능한 방식으로 존재하는(<도플갱어>) 것들, 프로이트식으로 말해서는 죽음의 본능(<큐어>) 따위로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것에서조차 식민지화의 문제를 거론하는 데리다적인 방식이다(구로사와 기요시가 장르영화에 매달리는 것조차 그런 의미에선 내러티브로 영상 자체의 생명력을 식민화하지 않기 위해서다). 시스템에 대한 예민한 혐오감이 드러날 때 도플갱어는 “나는 너다” 혹은 “내가 너를 인정하듯이 너도 나를 인정해라” 하고 하야사키에게 부르짖고 장렬히 산화한다. 이 장면은 섬뜩할 만큼 첨예하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다는 듯, 영화 <해파리> 엔딩에서 튀어나온 듯한 젊은이 기미시마를 통해 감독은 똑같은 내용을 변주하며 확장한다. 사실 그는 외부에 있는 도플갱어다. 파트너로 하야사키에게 인정받자 도플갱어의 대사였던 “나에게 다 맡겨”라는 대사를 똑같이 말하는가 하면 하야사키를 트럭으로 치고 나서는 도플갱어의 유일한 표식인 휘파람을 불기까지 한다. 하야사키에게 배신당하고 돌변하기 직전까지 거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무시당하던 이 청년의 요구도 결국 ‘인정하라’는 것 그 하나였던 것이다. 그가 솜씨 좋은 공장노동자라는 것이 드러나고 폭력에 대해 진가를 발휘할 때 <도플갱어>는 정말로 정치적이 된다. 어설프게 이해하려들지도 말고 다루려고들지도 말고 그들의 존재를 그대로 인정하라는 이런 식의 ‘하나 되기’ 설파라니. <해파리>의 연대를 떠올리게 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어떻게? 결론부터 말하자면 <도플갱어>는 놀랄 만큼 실천적이고 놀랄 만큼 무책임하다. 이 두 말을 합쳐놓고 보면 그가 시네아스트라는 평판을 얻는 이유를 자연히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모순은 그가 그것을 영화 안에서 진행한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은 다른 말로는 종교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른다. 결국 ‘하나 되기’는 이뤄지지 않는다. 대신 과격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 그리고 분명하게 묘사되진 않지만 예수의 부활을 연상시키는 지점이 지나고 행복한 부활체의 활극이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구로사와는 영화라는 제단 위에서 인물들을 제물로 바치고서야 시스템을 붕괴시킨 행복한 희망을 잠시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그의 영화가 지독한 묵시록과 달뜬 희망 양자를 동시에 함축하는 것은 어쩌면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것은 마치 총탄세례를 받고 죽었다 부활한 네오가 ‘The One’으로 점프하는 <매트릭스>식 해결이다. ‘현실적으로’ 확실히 무책임한.

그러나 그의 영화적 실천의 가치를 가늠하는 것은 정말로 현실적이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니다. 영화는 세계의 스크린이며 그 안에 전망을 포함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실천(praxis)은 원래 그 자체로 목적이 되는 행위라서 마치 하야사키가 몰두하는 인공신체의자와 같다. 그것을 금전이나 명예와 교환하며 나름대로 좋은 일도 할 수 있다는 식의 가정은 애초에 들어와 있지 않은 것이다. 다만 그것을 담보로 그 현실적인 것이 서 있는 다케다 부장(시스템)에게 주먹을 날리는 데 가치가 있을 뿐이다.

다만 문제는 이런 식으로 자신과 자신의 영화에 대한 직접적인 은유가 느닷없이 끼어들기 시작하면서 영화는 갑자기 구로사와 기요시의 자기 변증이 된다는 점이다. 그렇게 되면 “내 방식대로 가는 것이 옳다”는 도플갱어의 말도 심상치 않게 들리고 인공신체의자를 필생의 대업으로 여기며 집착하는 하야사키의 얼굴과 구로사와의 얼굴이 오버랩되며 절벽 밑으로 춤추며 떨어지는 그 기계(영화?)의 모습을 보게 된다. <도플갱어>는 예기치 않게 무거워진다. 웃기려고 하면 할수록 심각해지는 이상한 매듭이 생긴 것이다. 이렇게 세계를 향한 전망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불가능한 요구를 자신에게 되돌리는 닫힌 절망이 된다. 물론 그는 ‘뒤돌아보지 말고 가라’며 독촉하고 자신을 돌아보려는 무라카미를 덤프트럭에 깔아뭉갠다. 그러나 이 역시 더이상 그렇게 유쾌한 징조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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