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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전기톱을 보낸다, <공포의 텍사스>
2001-05-23

얼마 전 신문을 보니, 이 사회는 이미 먹고살 만한 참 좋은 세상인데 그 망할 놈의 자살 사이트 때문에 자살사건이 일어난다고 말한다. 폭력게임 때문에 폭력이 난무하고, 일본문화가 들어와서 한국문화를 저질스럽게 더럽히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글을 쓰면서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찢어죽이고, 갈라죽이고, 심지어 전기톱으로 잘라 인피를 벗겨내는 영화를 소개할 참이기 때문이다.

공포영화를 소개하고 난 뒤 신문에 공포영화 때문에 식인인간이 출몰했다는 기사가 실리면 어쩌나?

이러한 심각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포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내가 공포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현실성과 비현실성을 동시에 표현한다는 데 있다. 비현실성은 또다른 현실의 이면을 더욱 구체화한다.

<공포의 텍사스>는 내가 본 공포영화에서도 특히 손꼽히는 공포영화 중 하나다.

영화의 등장인물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전기톱으로 사람을 죽여서 먹고사는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로 구성된 가족. 그리고 그 가족에 의해 희생된 조카의 원수를 갚기 위해 전기톱을 구입해서 복수극을 벌이는 보안관, 그리고 그 남성들간의 복수극에 휘말리다 결국 사건을 해결하는 라디오 아나운서인 여성.

등장인물만 봐도 이 영화는 매우 흥미롭다.

이 남성 식인괴물 삼대(三代)는 다른 공포영화와 달리 괴물 습성을 대물림하고 있다. 그리고 남성성의 상징인 보안관이 총이 아닌 괴물의 무기와 같은 전기톱을 준비한다는 것도 호기심이 생기는 설정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제작의도는 모르겠지만, 난 이 영화를 보면서 색다른 여성주의를 발견했다. 억지일까?

나에게 이 영화는 너무나 리얼하고 페미니즘적인 시각으로 읽혔다. 그리고 보통 페미니즘 딱지가 붙은 영화처럼 남성 관객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관객을 끊임없는 공포로 밀어붙여 영화의 끝을 보게끔 만들었다. 우선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여성이 남성들의 폭력과 공포에 어떻게 노출돼 있는지를 극대화해서 보여준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녀를 도와주려는 보안관 역시 그 여성의 공포를 극대화하는 인물에 불과할 뿐이라고 말한다. 여성에 대한 과잉보호, 또는 정의롭다는 것의 이면은 그저 폭력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미친 식인집단은, 아버지의 장(場)을 지키려는, 가부장제라고 하는 남성지배문화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 집단에서 아버지의 권위는 극대화되며 이는 남성집단 안의 지배권력관계를 통한 폭력과 억압이라는 일상 속의 파시즘을 표현하고 어머니는 그냥 상징성을 가진 노예로 남아 있다. 그것은 일상 속의 파시즘에 희생당하는 여성들의 모습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 바보 같은 가정 안의 아들은 주인공 여성을 죽이려 하지만 그녀는 이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육체를 무기화해서 살아남는다.

기억에 남는 가장 공포스러웠던 장면은 식인아들이 죽은 사람의 인피를 그녀에게 하나씩 뒤집어씌우며 즐거워하는 장면이다. 여주인공은 살아남기 위해서 남성의 얼굴을 강요당하는 것을 감수한다.

공포를 극대화하기 위한 소품인 윙윙거리는 전기톱은 식인아들의 손에 들려 있을 때 전기톱이 아니라 남성의 성기로 표현된다. 그래서 그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강요되는, 폭력적인 남성의 성이 여성에게 공포와 다름 아님을 시사한다. 식인아들이 전기톱을 자신의 성기 가까이에 두고 피스톤 운동을 하듯 움직이는 장면은 여성 최악의 공포인 강간을 표현한다.

여주인공은 다른 영화와 달리 자신을 위험에서 보호해줄 남성이 부재한 상황에서 자신의 적극적인 호기심으로 이 험난한 여행을 헤쳐나간다. 그녀 자신만의 지혜와 용기로 강요되는 이성애를 담지하면서….

결국 우여곡절 끝에 죽은 존재이며, 가시남성이자 무성인 할머니의 전기톱을 빼앗아 식인삼대(三代)를 멸한다.

그 승리의 무기는 남성의 전유물이라 여겼던, 그리고 영화에서 남성성을 표현한 중요한 소품, 전기톱이었다. 결국 그 전기톱의 쟁취는 성적 주체성의 쟁취로 읽힌다. 그리고 여느 공포영화의 마지막과 달리 여전히 부재중인 남자주인공인 보안관 없이 승리감을 맛본다.

영화감독인 친구는 내 영화 보는 습관을 제멋대로의 해석이라고 한다. 그렇다. 그래서 난 영화보기가 즐겁다. 문학이 독자의 것이듯 영화는 관객의 것이 아닌가. 누군가가 미리 평해주고 의도를 말해주고 그리고 그 코드대로 영화를 보고 느껴야 한다는 것은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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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변리나/ 알문화 기획대표·안티 미스코리아 1회 및 2회 총연출·불구속 입건 퍼포먼스 프로젝트 기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