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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베트남의 친구` 소설가 · 시인 · 다큐 감독,반 레
권은주 2003-10-22

“한때 한국을 정말 싫어했지만 이젠 친구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오목한 연못처럼 맑은 눈의 베트남 ‘선비’가 한국을 찾았다. 소설가이자 시인, 그리고 다큐멘터리 감독인 반 레가 그 주인공. ‘베트남을 이해하려는 젊은 작가들의 모임’(회장 방현석)과 조우필름의 초청으로 처음으로 한국에 온 그는 베트남의 존경받는 지식인 중 한명이자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실천문학사 펴냄)으로 한국인들에게도 낯설지만은 않은 인물.

소설, 시, 다큐에 이르기까지 반 레 감독이 다뤄온 주제는 전쟁과 그 속의 인간들이다. 1966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베트남전쟁에 뛰어들어 처절한 전투를 거쳤고, 전장에서 부상당한 뒤로는 종군기자로 1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으며, 77년부터 다시 서캄보디아 전선에서 5년을 보냈던 그의 기억이 굳게 자리하기 때문. “전쟁은 내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자 불행한 시기”라는 그의 말은 그래서 이해가 된다. 83년 베트남 해방영화제작소에 들어간 이후 다큐 작업을 시작한 그는 1988년 <통낫현의 천주교인>으로 베트남영화제에서 최고 각본상을 받은 이후 <평범하지 않은 현상> <선과 악> 등 20여편의 작품이 베트남의 각종 영화제에서 상을 받아왔다. “다큐는 소설이나 시로 표현할 수 없는 영역을 포착해낼 수 있습니다. 즐겁게 이야기를 하던 사람도 전쟁의 상흔으로 주제가 넘어가면 갑자기 안색이 바뀌고 눈물이 나오는데, 이 순간은 문학이 표현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베트남전쟁에 참여했던 한국군 병사에 대한 안 좋은 인상 때문에 한국을 외면했던 반 레 감독이 마음을 돌리게 된 것은 <한겨레21> 베트남 통신원 구수정씨의 적극적인 노력 덕분이다. ‘미안해요 베트남’ 캠페인을 주도했던 구씨 등 여러 한국인의 모습을 본 반 레 감독은 서서히 감동받기 시작했고, 2000년에는 구수정씨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다큐 <원혼의 유언>을 제작하기도 했다. 그때부터 한국과 인연을 맺은 그는 이대환 원작의 <슬로우 불릿> 영화화 과정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그는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쓴 소설가 방현석과 깊은 친분을 맺게 됐고, 시나리오의 베트남어 번역에도 참여했다. “시나리오를 읽고 아주 감동받았습니다. 한국은 우리의 친구라는 생각도 다시 하게 됐고요.”

한국에 와서 보고 싶었던 ‘친구’들과 뜨거운 재회를 했던 그는 광주의 김남주 시인 묘소와 5·18 묘역을 참배했다. 특히 5·18 묘역에서는 진한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또 부산영화제 현장도 들러 아시아 최대의 영화축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소박한 옷차림과 단아한 태도가 인상적인 반 레 감독은 “베트남과 한국이, 그리고 온 세계인이 서로 좋은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는 ‘원대한’ 포부를 밝혔다.글 문석·사진 손홍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