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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는 분해되고 현실은 남는다
2001-05-23

<교도소 월드컵> 세트 김성훈

1969년생·94년 인덕전문대 시각디자인과 졸업

임권택 감독 <꿈>(94)에 미술스탭으로 참여 <교도소 월드컵>(2001)으로 데뷔

오랜만에 어깨에서 힘이 쫘악 빠진 영화를 만났다. 죽음 앞에, 사랑 앞에, 의리 앞에 한없이 진지해져 가는 한국영화에 ‘니기미 플러스

더블’을 외치며 수다스럽게 등장한, <교도소 월드컵>이 그것. “유치해서 못 봐주겠네. 어쩜 저렇게 유치할… 풋, 우하하핫,

킥킥킥!” 시사회 내내 관중석에선 비난과 웃음소리가 남북한 단일팀마냥 어깨를 엮었다. 그 시각, 마석에 자리한 소품창고에서는 미술감독 김성훈이

‘교도소’의 잔해를 찾느라 분주했다. 다음날 있을 씨네와의 인터뷰에서 사진촬영에 쓰일 터였다. 대부분의 세트는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세트촬영이 끝나면 바로 분해하는 것이 기본 수순. 그가 어렵게 찾아낸 것은 우연찮게 소품팀에 맡겨놓은 감방열쇠가 전부였다.

비록 작은 열쇠 한 조각이지만 사연이 남달랐다. 덩어리가 큰 세트를 다 짓고 작은 액세서리를 만드는 일만 남았을 때였다. 만들어 간 자물쇠로

번번이 퇴짜를 맞던 그는, 영등포교도소에서 자물쇠와 열쇠를 제작해 판매한다는 소문을 듣는다. 개당 3만원씩 3개를 사서 신나게 돌아오는데

갑자기 교도소쪽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민간인에게 팔 물건이 아니라는 통보였다. 고스란히 자물쇠를 물리고 조금은 억울한 심정이 된 그에게,

그들이 선물삼아 남기고 간 것이 바로 이 열쇠란다.

“형, 다 날아가고 아무것도 안 남았어.” 지난해 7월 크랭크인하여 8월 중순부터 세트 제작 및 촬영에 들어간 때였다.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리에 밤잠을 설치던 터에 수상한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뜬눈으로 서성이다 아침 일찍 조감독 배상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니나 다를까 감시탑을 포함해 교도소 현판과 그 밖의 구조물들이 흔적을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버렸다. 오픈세트장으로 쓰인 양평의 부안초등학교

운동장 이곳저곳에 흉물로 변한 세트조각들이 흩날렸다. 감시탑은 아예 담 너머로 날아가 있었다. 다행히 지나가던 사람이 없어 사고는 면했지만

미술팀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일단 흩어진 잔해를 모으는 것으로 복구작업은 시작됐다. 그런데 교도소 현판의 일부가 어디로 날아갔는지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학교 뒤편 소각장을 찾은 스탭들, 할렐루야, 쓰레기들과 함께 얌전히 대기중이던 현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일주일 정도로 예정되어 있던 세트촬영은 장마와 태풍으로 인해 한달 반이나 걸렸으며, 미술팀은 곰팡이 제거와 페인트칠에

온 정력을 바쳐야 했다.

아버지 김유준이 10년 이상 임권택 감독과 영화 작업을 하는 동안, 그는 대학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영화판에 분업시스템이 도입되기 시작한

94년은 그가 대학을 졸업한 해이기도 했다. 한 사람이 세트의 모든 것을 책임지던 아버지의 시대에서 일을 배운 그이기에, 디자인과 축조가 분리된

현장에서 일하면서 남모를 갈등도 많이 겪었다. 디자인을 공부하지 않으면 미술분야에서 한낱 막노동꾼 취급을 당하는 현실 때문이었다. 어렵게 막을

올린 첫 영화에 대한 소감을 묻자, “내용은 현실을 비껴가도 세트만큼은 사실 그대로의 모습일 겁니다”한다.

글 심지현|객원기자 사진 이혜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