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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물 같은 눈물, 눈물 같은 똥물
2001-05-23

아줌마가 <인디안 썸머> 씹고 <휴머니스트> 편드는 이유

● 서류상으로 아줌마의 가장 든든한 빽은, 가입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외국계 생명보험이다.

가입한 지 2년이 지나면 자살해도 보험금이 나온다는 얘기를 듣고, 서명 안 할 도리가 없었다. 자살유혹을 2년이나 참아냈다면 그게 곧 ‘살아보려고

최선을 다한 결과’ 아니냐는 건데, 이 얼마나 휴머니스트적인 해석인가. 나중에 문득문득 살기 몹시 힘들어질 때, 이 규정이야말로 자살을 꼬드기는

반휴머니스트적 당근 아닐까 하고 잠깐 의심해 본 적이 있지만, 자본주의 본토에서 상륙한 생보사가 바보인가?라는 반문 앞에서 의심은 간단히 해소되고

말았다. 그 규정에 혹해 가입한 사람 중에서 그 규정 때문에 자살하는 사람이 극소수라는 통계가 벌써 나오고도 남은 게 틀림없어. 영악한 자본은,

자살방정식마저도 진작 풀어낸 뒤에 희희낙락 자살에 베팅하는 사람들 푼돈을 긁어모으고 있는 거야.

그런데 아줌마, 알면서도 또 한번 이상한 자살방정식에 푼돈을 베팅하고 마는 것이다. 살해당한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자살이고, 살인범인 줄

알았는데 알고보니 그것도 자살범이라는, 시차를 둔 이 쌍둥이 자살극에서 수혜자는 누구일까? <인디안 썸머>는 그것이 문제인 영화다(물론

아예 안 보면 이런 쓸데없는 문제에 시간낭비 안 해도 되지만).

가식과 위선으로 범벅된 <인디안 썸머>에서, 주인공 신영은 제 손으로는 제 목숨 끊을 용기가 없어서, 형무소의 오랏줄을 빌리자고

든다. 깨진 병으로 팔목을 그을 때도, 하필이면 응급치료가 가능한 병실에서, 하필이면 강직한 변호사가 뛰어들어오기 직전이다. 한번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은 채 길들여진, 혈중 투지농도가 0.01%도 안 되는 이런 여자를 만나면, 투지로 뭉친 변호사는 주체못할 사랑에 울부짖을지

몰라도, 투지로 뭉친 아줌마의 경우 주체못할 짜증에 울부짖게 된다. 자학형 인간에 이끌리는 이타적 인간, 청순가련형에 이끌리는 용맹무쌍형,

공주병 환자에 이끌리는 왕자. 고마해라, 마니 써뭇다 아이가.

고아에다가 간호조무사 출신 아내와 의사 남편이라는 설정도 마음에 채인다. 그런 층 지는 신분 때문에 사이코 남편의 유혈낭자한

폭력을 견디고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고? 떵떵거리는 가문 출신에다 직업도 같은 의사였다면 그렇게 당하고 살지는 않았을 거라고? 너무 지겨운 논리라서

구역질이 난다. 인간아, 층 진다고 싸움도 못하니? 오삼숙도 못봤니?어느 외국평론가의 말을 흉내내자면, <인디안 썸머>에서 그럴듯한

거라곤 그 제목뿐이었다. 객기와 위악으로 범벅된 <휴머니스트>가 뜻밖에 유쾌했던 건, <인디안 썸머>를 본 직후에 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장미희씨 연기만 모아놓은 모자이크 필름을 두 시간 보고 난 뒤 똥물로 그 메스꺼움을 상쇄하는 기분이었달까. ‘똑 사세요’

다음에 ‘똥 퍼!’를 듣는 상쾌함이랄까. <인디안 썸머>는 깨끗한 척하는 새빨간 거짓말이고 <휴머니스트>는 더러운 척하는

새하얀 거짓말이었는데, 더러운 척하는 거짓말이 결과적으로 훨씬 덜 기분 더러웠다. 하나는 ‘니 비위를 맞춰줄게’고 하나는 ‘니 비위 좀 긁어볼게’인데,

과녁이 빗나간 아부가 진심으로 던진 농담보다 훨씬 더 비위가 상했고, 억지로 짜낸 눈물보다는 차라리 똥물이 더 맑았다는 얘기다. 물론 세 바가지는

좀 많긴 했지만.

마태오, 유글레나, 아메바 같은 이름에서부터 장난치기로 작심한 것 같은 이 영화는, 정작 본론으로 들어가면 <인디안 썸머>보다

훨씬 더 진지하다. 하긴, 할말없는 사람이 카메라에 침뱉고 카메라에 정액 쏘며 오버하는 것 봤는가. 어떤 영화가 사형수와 변호사 짝짓기시키려고

온갖 사기 다 치면서 중매서는 동안, 어떤 영화가 나 알고보면 나쁜 영화 아니야, 나 알고보면 나쁜 영화 아니야, 라면서 관객과 ‘까꿍놀이’

하며 헉헉거리고 딸딸이친다면, 아줌마는 단연 ‘딸딸이’쪽에 손을 들어줄 태세가 되어 있는 것이다. 둘 다 망가지는 ‘짝짓기’보다 한쪽만

망가지는 ‘딸딸이’쪽이 낫다는 건, 아줌마의 일관된 철학이기도 하다. 누가 뭐래도, 걷는 악 위에 뛰는 악 있고, 뛰는 악 위에 나는 악이

있어 덜 악한 순서대로 차례로 땅에 묻히고 ‘나는 악’이 맨 나중에 공중에 매달린다는 이 영화의 결론만큼은 논리정연한 바가 있지 않은가.

<인디안 썸머>나 <휴머니스트>나 우리 인생이나 삼자간에 서로 다를 바 없는 대목도 있다. 주인공들이 수갑 찬 제자리로

돌아간다는 거. 모두들 죽도록 오버하고, 죽도록 망가진 끝에, 하나도 나아진 것 없이 제자리로 돌아가고 만다는 얘기. 그래도 20자평은 같을

수가 없지. <인디안 썸머>는 똥물 같은 눈물 한 바가지, <휴머니스트>는 눈물 같은 똥물 세 바가지, 아줌마 인생은

고생 바가지.

최보은|아줌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