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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에 들이미는 화사한 칼날,<나의 즐거운 일기>
박은영 2003-11-12

Cara Diario, 1994년감독 난니 모레티출연 난니 모레티 EBS 11월15일(토) 밤 10시

난니 모레티 감독의 (1998)엔 이런 장면이 있다. 은 감독 자신이 주연으로 나오는 영화. 다큐멘터리를 찍기로 결심한 난니 모레티는 두 가지 경험을 한꺼번에 한다. 이탈리아에서 좌파가 정권을 잡게 된 것이 한 가지이고 나머지는 득남을 한 것이다. 그런데 이후 상황은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다. 좌익은 우익 정치인들 못지않게 구태의연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허탈감을 느낀 난니 모레티는 신문기사가 어지럽게 널린 방 안에 주저앉는다. 옆에선 아들이 태평스럽게 놀고 있다. 이 장면은 난니 모레티의 영화 특징을 요약한다. 신문기사의 스크랩과 TV 등 대중매체에 관한 냉소, 그리고 영화에 대한 성찰을 발견할 수 있는 것. <나의 즐거운 일기>는 난니 모레티의 영화 중 가장 유쾌하면서 ‘소수의 것과 문화’를 변함없이 옹호하는 감독의 세계관이 스며 있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세개의 장으로 나뉜다. 공간이동이 중시되므로 로드무비라고 봐도 틀리지 않다. 난니 모레티 감독의 모터스쿠터 여행담, 영화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조용한 장소를 찾아 친구와 섬을 여행한 일, 치료를 위해 의사를 찾아다닌 경험을 담고 있다. 1부에서 난니 모레티는 스쿠터를 타고 로마의 유명한 동네들을 돌아다닌다. 다음 장에서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장소를 찾던 난니 모레티는 친구 제라르도와 동행한다. 오랫동안 TV를 접하지 않던 친구는 미국의 드라마에 중독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처한다. 이후 감독은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며 여러 의사를 찾아다니지만 각기 다른 치료법을 제시하자 난감해한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에세이풍 영화다. 감독 자신의 경험을 일기를 쓰듯 카메라로 기록하고 있다. 에피소드들은 위트가 있다. <플래시댄스>라는 영화를 남몰래 흠모하던 감독은 주인공 제니퍼 빌스와 길거리에서 마주친다. 그녀 남자친구와 대화가 통하지 않자 특정 개념에 대해 토론하는 일이 벌어진다. 이후 극장에서 한 공포영화를 본 난니 모레티는 영화가 형편없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호평을 썼던 평론가의 글을 다시 찾아본다. 그리고 중얼거린다. “이자는 잠들기 전 자신의 글이 꺼림칙하지는 않을까?” 영화는 농담과 유머, 정치적 신랄함의 영역을 차례로 섭렵한다. 첫 번째 장의 마지막 대목에서 난니 모레티는 좌파감독 파졸리니가 숨진 장소를 찾아보기로 마음먹는다. 이는 1960년대 이탈리아의 청년 세대의 과거와 현재에 관한 비판적 발언일 것이다.

<나의 즐거운 일기>는 난니 모레티의 다른 영화, 즉 ‘정치영화’ 이나 <붉은 비둘기>(1989)에 비하면 온건하다. 그럼에도 에피소드에 숨겨진 칼날은 예리하다. 시나리오를 쓰는 난니 모레티와 친구 제라르도의 이야기는 특히 그렇다. 친구 제라르도는 TV드라마에 중독된 뒤 여행하는 미국인들에게 다음 에피소드 줄거리를 캐내고 싶어 안달한다. 의술(醫術)은 의심의 대상이다. 가려움증으로 의사에게 온갖 처방을 받았던 난니 모레티는 한 가지 교훈을 얻는다. “의사들은 타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차라리 아침에 물 한잔 마시는 게 건강엔 제일 좋다.” 일기장의 마지막 페이지를 장식하는 이야기다. 김의찬/ 영화평론가 garota@emp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