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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비구비 인생길을 간다,<길> 촬영현장
박은영 2003-11-18

배창호 감독에겐 ‘감독 의자’가 무용지물이었다. 스탭과 배우를 통틀어 현장에서 가장 복잡한 동선을 그리고 있는 이가 바로 배창호 감독이었다. <흑수선> 이후 2년 만에 돌아온 현장, 5억원 규모의 저예산영화 <길>을 촬영 중인 그는 연출과 주연을 겸하고 있는 탓에 몹시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분장팀! 거울 좀 가져와봐. 손에 때가 지워졌네. 칠해야겠다. 얼굴에 땀도 더 묻혀야겠고. 그리고 너희들. 너희들은 아저씨 쳐다보고 있다가 저기 이발사쪽으로 가면 돼. 그리고 어르신. 옛날에 풀무질하는 거 보셨죠? 저… 이렇게 하면 되나요?” 그런 배창호 감독을 바라보고 있던 제작자 강충구씨의 탄복. “지금 이런 영화를 찍을 수 있는 분은 배 감독님밖에 없어요. 연기도 직접 하면서 촬영장 지휘도 완벽하게 하시고. 게다가 경제적으로 찍어주시니까… 참 대단하세요.”

<길>은 1970년대를 배경으로 장터를 떠돌던 대장장이의 인생을 그리는 영화. 젊은 시절 집을 나가 떠돌게 된 대장장이가 아버지 장례를 치르러 내려온 여공과 동행하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본다는 이야기다. 배창호 감독의 전작 중에서 <>과 가장 많이 닮아 있는 작품. 저예산 독립영화라는 제작 규모와 스타일도 그렇거니와, 한 인물의 일대기를 차분히 따라가면서 사라져가는 한국의 생활 문화를 더불어 조명한다는 점도 비슷하다. 그러나 배창호 감독은 “남성판 <>”이라는 비유는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은 영화가 고왔지만, <길>은 거칠고 깊어요. 많이 다르지.” 주인공의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가 사람이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고통, 애증과 회한 등의 거친 감정들도 포착해내려 했다는 것. 따라서 그 주인공을 연기할 이는, 그의 삶과 감정을 가장 잘 알고 있는 배창호 감독 본인뿐이었다고.

지난 2월부터 전국 각지를 돌며 제작진행비가 조달될 때마다 간헐적으로 이어져온 <길>의 촬영도 이제 막바지에 다다랐다. 전라도 김제, 함평, 강원도 대관령, 임계, 삼척을 돌아 경북 성주군 가천면에 들른 며칠, 제작진은 주인공의 회상신을 위해 1950년대풍의 장터를 재현했다. 내리는 비 때문에 촬영을 접을 수는 없는 일. “날씨가 왜 이렇게 구질구질하냐” 하는 애드리브를 흘려넣는 것으로 촬영은 속개됐다. 몇 시간째 서고 걷고 뛰고 외치고 있지만, 배창호 감독의 얼굴엔 피로한 기색조차 보이지 않았다. 성주=사진 정진환·글 박은영

♣ 1950년대 장터가 그대로 재현됐다. 놋그릇, 농기구, 닭, 채소, 옷감, 대바구니 등이 좌판에 널리고, 순박한 얼굴의 동네 주민들이 그 앞에 앉아주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연출됐다. 이날 가천면 주민들은 영화에 출연하는 쪽과 구경하는 쪽, 두 팀으로 나뉘었다.(사진 왼쪽)

♣ 배우 배창호에게 가장 힘든 건 걸쭉한 전라도 사투리를 구사하는 일이다. 그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사투리 코치를 불러 일일이 대사 감수를 받곤 했다.(사진 오른쪽)

♣ 주인공 태식에게 장터의 약장수가 달려와 친구의 사고 소식을 알려주는 긴박한 장면. <길>은 대장장이 태식(배창호)이 서울에서 내려온 여공(<>에서 어린 순이를 연기한 강기화)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지난 삶을 돌아보게 된다는 이야기다.

♣ 연기하랴 지도하랴 너무나 분주한 배창호 감독. “내가 역할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누구에게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좋지만, 현장 진행까지 겸하다보니 부담스러운 건 사실이죠. 뭐, 열심히 하는 거지. 최선을 다해서.”

♣ “어르신, 풀무질을 이렇게 하는 게 맞습니까?” “좀더 천천히… 천천히.” 보기 드물게 인터랙티브한 촬영현장이다. 옛 장터의 풍경은 물론 대장장이, 염색장이의 작업과정 등 사라져가는 한국 고유의 생활문화도 공들여 연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