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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늙은 매춘부의 죽음,<세라진> 촬영현장
박은영 2003-11-18

“내가 임청하랑 동갑이거든. 근데 그 언니가 하늘을 붕붕 날아다닐 때 난 만날 엄마나 할머니 역 했어…. 그나마 다행이지. 이번엔 공주거든. 양공주.” 배우이자 연극연출가로 이름 높은 이영란(50) 교수(스크린에서 그녀를 본 기억이 없다고? 잠깐 눈을 감고서 장선우 감독의 <꽃잎>에서 흰 소복을 입은 어머니가 누구였는지 떠올려보라). 그녀의 달변에 빠져들면 헤집고 나오기가 쉽지 않다. 양공주 세라진이 되기로 맘먹고 짬이 날 때마다 경기도 평택의 기지촌을 어슬렁거리면서 맥주를 몇병 마시는 것이 이제 일과가 됐는데, 행차만 하면 여기저기서 공짜 안주 대접하겠다며 손을 이끌 정도라니. 김성숙 감독의 <세라진> 촬영장을 엿보기 위해 들렀던 금요일 밤도 그녀의 독무대. 가장 붐비는 요일이라 손님들이 바에서 뒤늦게 나가는 바람에 촬영장 세팅이 새벽 4시까지 이어졌고, 다른 조·단역배우들은 잠에 곯아떨어졌지만 에너지 넘치는 그녀는 스탭들에게 수시로 농 걸고 장난치며 수다를 푼다.

<세라진>은 청계천 노동자의 일상에 드리워진 욕망의 실루엣을 들춰보인 단편 <동시에>로 주목받았던 김성숙 감독의 세 번째 단편영화. 1999년 돌연 뉴욕으로 유학을 떠나 많은 이들을 궁금케 했던 그의 이번 영화는 컬럼비아대 영화과 대학원 졸업작품으로 올해 이스트만 코닥 제작지원작이기도 하다. “몇년 전 기지촌의 60대 매춘부가 미군 병사에 의해 살해됐다는 신문기사”로부터 출발, 감독 자신이 어린 시절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기지촌에서 보았던 유년 시절의 풍경을 입힌 <세라진>은 “기지촌에서조차 밀려난 어느 늙은 매춘부가 죽음을 결심하고 난 다음 보내는 하루를 뒤따르는 영화”다. 사회적 비극이 잉태한 비극적 소재를 감독은 “욕망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주제”로 풀어보겠다고. 11월15일 예정된 8회 촬영을 모두 마치고, 현재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사진 정진환·글 이영진

♣ 실제 영업을 하는 술집이라 촬영이 끝난 다음에는 애써 붙여놓은 각종 장식을 떼어내야 한다. 이튿날 촬영 때 다시 붙여야 하고. 이중고를 감내해야 하는 독립영화 스탭들.(왼쪽 사진)

♣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꾀어온 외국인 단역들. 뒤에 보이는 술집 여인 역은 구정아 프로듀서의 친구이기도 하다. “무료한 생활에 활력소가 될까 싶어 자원했다”는 그녀는 담배를 피울 줄 안다는 이유로 카메라 앞으로 곧장 승진.(중앙 사진)

♣ 김성숙(가운데) 감독은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 1시간 이상 리허설을 한 다음에도 짬이 날 때마다 배우들을 붙잡고 주파수를 맞춘다. (오른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