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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오구> 무당딸 미연역 이재은
2003-12-05

“주연 조연 안따져요 강한 캐릭터면 그만이지”

〈오구〉를 찍기 위해 사람을 찾던 이윤택 감독이 식당에서 밥먹는데 텔레비전에서 〈명성황후〉가 방영 중이었다. 이재은이 소리하는 장면이었다. “쟈가 누고 … 영화 나온 것 있나” 이재은이 나온 영화를 비디오로 본 이 감독은 여러 다리를 건너 이재은을 찾아냈다. “〈오구〉의 미연이를 내가 하면 잘할 것 같았어요. 부전공이 소리인데 그것도 살릴 수 있고요. 죽음을 축제로 표현하고 거기에 사람 냄새가 묻어나는 작품 자체도 좋았고.”

항상 새로운 면 보이고 싶어

〈오구〉에서 이재은(23)은 확실히 도드라져 보인다. 그가 연기한 미연은 무당의 딸로 태어났다가 동네 청년들에게 봉변을 당해 미혼모가 된, 또 그 사건 때문에 애인이 자살해버린 비극적 사연의 소유자다. 처연함이 느껴지는 캐릭터이기는 〈내츄럴 시티〉도 마찬가지였다. 디스토피아 같은 미래도시에서 몸을 팔고 사는 소녀를 연기한 이재은은 그 영화에서도 도드라져 보였다. 나이보다 먼저 어른들의 추한 세계를 알아버린, 그럼에도 앳된 얼굴. 그 묘한 부조화가 눈길을 잡아챈다. 연민을 품을라치면 바로 그 틀을 벗어나버린다. 〈오구〉에서 두눈 부릅뜨고 앙칼지게 싸울 때 이재은은 무섭다.

〈노랑머리〉 〈세기말〉 〈자카르타〉 〈내츄럴 시티〉 〈오구〉, 5살 때부터 연기를 시작한 이재은이 성인으로 출연한 다섯 편의 영화는 저마다 다르지만 그가 맡은 역에는 공통점이 있다. 남자들의 음습한 욕망으로 얼룩진 세상에서 상처입지만 기죽지 않고 자신을 위해 열심히 싸운다. 한국영화에서 드문 캐릭터들임과 아울러, 이미지 관리를 중시하는 여자 배우들이 아직도 잘 안 맡으려는 역이다. 이재은은 잔 계산 하지 않고 용감하게 달려왔다. 충무로에선 그런 태도를 높이 사는 이들이 많다. “주·조연 잘 안 따져요. 역의 비중보다 그걸 내가 해서 눈에 띌 수 있는 강한 캐릭터면 좋겠다 싶죠. 색다르고 이미지가 강한 것, 그런 역 하는 게 좋고 연기도 팍팍 늘고. 착한 역도 좋겠지만 악역을 잘해서, 사람들이 쟤만 나오면 죽이고 싶어지게 하는 것, 그런 거 매력있지 않아요”

연기경력 19년, 비움의 덕 알아

이재은은 스스로도 욕심이 많다고 했다. 뮤지컬, 연극, 영화, 텔레비전 드라마 가리지 않고 ‘배우’이길 원하고 새로운 역과 일들을 찾아 나선다. “이런 연기를 잘하던데 이것도 잘하는구나, 그런 말 듣고 싶어요. 쟤가 이번엔 또 무슨 일을 저지를까 궁금증을 자아내고 싶고. 〈어을우동〉(이재은이 공연중인 마당극) 하면 ‘쟤 창도 해’ 같은 반응 있잖아요.” 색다른 역을 선택해 왔는데, 그러다보니 영화에서 그의 배역들은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더 커 보이는 역설이 빚어진다. “크면서 차가운 이미지가 풍기는 건지, 착하고 똑똑한 건 해 봤는데 멍청한 역은 한번도 안 해 봤어요. 그런 역이 안 들어와요. 제가 똑똑하게 생겼나 봐요. 부드럽기보다 날카로워 보이나 봐요. 착한 푼수, 바보 같고 그런 귀여운 여자를 해보고 싶은데 ….”

연기경력 19년. 이재은의 연기관은 뚜렷해 보였다. “촬영 전날까지 대사만 외워놓고 아무것도 안 해요. 미리부터 고민해서 준비하고 연습하면 사심이 많아지거든요. 연기가 계산적이 되고 사족이 많아져요. 저는 공부 안 하기로 유명한 배우예요. 그 인물에 빠지려고 하기보다 그 인물도 내 인생의 일부분이라고 생각하죠. 이 인물이 앞으로 어떻게 되는지만 알고 있고 나머지는 감독에게 맡겨요. 내 작품이긴 하지만 전체를 조율하는 건 감독이니까. 저는 비어 있으려고 한다고 할까. 마른 스펀지가 물을 많이 빨아먹는 것처럼.” 글 임범 기자 isman@hani.co.kr , 사진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