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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올드보이>의 배우 최민식 [1]
김혜리 2003-12-06

영화 메커니즘과 자유롭게 결합하는 `선수`

배우 최민식이 작심하고 카메라 앞에서 명치에 힘을 주면, 결코 대충은 수습이 안 된다. 최민식이 움직이거나 멈춰 서 있는 스크린을 보는 동안 그의 아픔과 쾌감은 어물쩍 관객의 몸으로 옮겨오고 다음에 그가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해 좀이 쑤신다. 그처럼 강력한 최민식이라는 배우의 감정적 설득력은 프레임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극중 인물로 아예 살아버리는 연기방식에서도 비롯되지만, 배우 뒤에 숨은 사람 최민식이 어쩔 수 없이 풍기는 선의와 연민의 기운에도 기인한다. 그는 관객을 감상적이고 예민하게 만든다. 그러니 <올드보이>의 관객은 고통스럽다. 최민식의 오대수는, 원형적 갈등으로 축조된 복수담에 우리를 자꾸 ‘필요 이상’ 몰입하게 만든다. <올드보이> 개봉 사흘째의 오후, 어젯밤의 행복한 숙취를 아직 몸 안에 간직하고 있는 최민식을 만났다. 그리고 몰입했다.

당신은 현재 우리 영화계에서 고전적 의미의 정극 배우상에 가장 가까운 연기자가 아닐까. 우선 미남이고 성량, 음색, 움직임, 감각을 재현하는 기본기 면에서 매우 정련된 연기 스타일을 가졌다. 그것이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독이 될 때도 있었다. TV 연기를 시작할 즈음, 연극성을 배제하는 노력을 시작해서 지금은 많이 덜어낸 상태다. 연극으로 훈련된 배우들의 장점은 전반적으로 작품을 끌고가는 힘이다. 장르마다 차이가 있는데 로맨틱코미디보다는 비극적 요소가 든 정극 스타일 드라마에서, 갈고닦은 무대의 역량이 훌륭한 자산이 된다. 독이 되는 경우는, 무대 메커니즘에 익숙해 있기 때문에 카메라 앞에서의 표현에 서툴고 특히 내추럴하고 일상적 연기를 할 때는 작위적이고 딱딱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러니 작품마다 코드를 잘 뽑아서 표현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은 최민식의 연기 스타일을 알 파치노에 비유했다. 글쎄 왜일까? 쭈글쭈글하고 나이가 많아서인가. (웃음) 에너제틱한 면 때문일 거다. 라면 끓는 냄비 뚜껑에서 증기가 피식피식 새어나오는 것처럼 에너지를 분출하는 연기가 비슷한지도 모르겠다.

정통 연극 훈련을 거친 배우에겐 신체가 무기일 것이다. 자신의 눈, 옆모습 등의 표현력을 파악하고 필요할 때에 의식적으로 구사하나. 배우에게 몸은 무기라기보다는 악기다. 그러나 신체를 의식적으로 가동하는 일은 전혀 없다. 클로즈업이고 카메라 움직임이 이러니 이 표정을 지어야지 하고 작정하진 않는다. 숏 사이즈는 기본적으로 염두에 둔다. 카메라 앵글 안에 효과적으로 들어가는 것 정도는 계산하지만 그 밖의 정서는 그냥 흐름에 맡긴다. 그런 계산까지 들어가면, 그때부터 거짓말이 된다. 메인 컨트롤 시스템만, 머리부터 가슴까지만 ‘올드보이’를 집어넣고 지금 찍는 시퀀스, 숏의 느낌을 통제하는 거다. 저장된 소프트웨어, 하드웨어로 클릭만 해주면 된다. 아니 ‘컴’자도 모르는 놈이 컴퓨터 전문가처럼 말하고 있네.

노력으로 조절할 수 있는 체중의 범위는. 10kg가량? 그러나 1년쯤 시간을 주면, 당신 정도의 체중도 만들 수 있다.

배우로서의 치유와 화해

현재 하는 연기의 기본틀은 언제 형성됐다고 보는지. 언제 연기틀이 형성되었다기보다 나는 ‘회복’한 경우다. 학교 다닐 때 난 정말 괜찮은 놈이었다. 정말이다. 그때 나는 순수하고 미쳐 있었다. 좋은 배우가 무엇인지, 좋은 배우가 되기 위해 실천할 덕목이 무엇인지에 대해 깨어 있었고 목말라했다. 그런데 방송하고 인기를 얻으면서 그것이 많이 떨어져나가고 망가졌다. 내가 ‘병’에 걸린 걸 안 것이 연극 <택시 드리벌>을 하면서다. <택시 드리벌>도 “연극을 꼭 해야지” 해서가 아니라 장진 감독을 방송사에서 만나 “그냥 해볼까?” 하면서 시작한 거다. 그런데 막상 연습에 들어가니 나는 너무 멀리 와 있었다. 한때 미쳐서 살았던 일들을 불편해하고 무슨 대본을 이렇게 오래 읽나 지겨워하고. 과거의 나는 토씨 하나 갖고 밤새 토론하는 것이 일상이었는데. 다행인 것은 그때라도 내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는 거다. 뭘 하든 지금 상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배우로서 성취감 없이 느낌없이 방송사 파우처나 받으면서 살아가는 건 안 되겠다는 깨달음이 한순간에 끔찍하게 다가왔다. 지금은 많이 편해졌다. 먹고살고 인정받고 미래의 불안이 없어서라기보다 내가 나와 평화롭게 화해한 상태다.

현장에서 모니터를 자주 체크하는 편인가. 자주 본다. 한두 테이크 가고 아니다 싶을 때는 모니터 보기도 전에 내가 다시 갈 것을 청한다. 한데 연출쪽에서 “괜찮은데, 왜?”라고 반응하면 그때는 모니터로 확인한다. 나 역시 여러 테이크 가면 좋은 연기가 안 나오는 쪽이다. 지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홍상수 감독의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는 테이크가 무척 많다더라. 배우가 방어를 내리고 탈진한 상태에서 나오는 진실의 순간을 잡으려는 감독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방식으로 작업해야 한다면 힘겨워할 것 같다.

<올드보이>는 시나리오 단계부터 같이 작업한 케이스다. 박찬욱 감독은 <올드보이>를 가리켜 ‘배우 최민식의 갤러리’라는 표현을 썼는데, <해피엔드>의 서민기, <파이란>의 강재, <취화선>의 오원이 <올드보이> 속에 보이는 것도 시나리오 작업부터 줄곧 참여한 주연배우의 존재감이 직간접적으로 반영된 게 아닐까. 도입부 파출소 시퀀스는 내 의견이다. 원래는 비행기 안에서 여자에게 집적대는 모습이었는데 나는 감금을 기준으로 ‘비포 앤 애프터’의 구분이 확연하려면, 도입부의 아주 짧은 시간에 오대수의 캐릭터를 집약적으로 보여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본의 설정만 갖고 찍은 막막한 애드리브들이었다. 다방에 전화를 걸어 커피 주문을 하기도 하고, 웃통을 벗기도 하고. 파출소 안 사람들이 애드리브를 잘 받아줄지 불안감도 있었다. 즉흥적으로 지어낸 에피소드를 4∼5개의 시퀀스로 찍은 것을 점프 컷으로 이어놓은 게 지금의 도입부다.

오대수, 유별난 피로

예전 인터뷰에서 <쉬리>의 박무영을 장르적 캐릭터로, <해피엔드>의 서민기를 비장르적 캐릭터로 예를 들어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그렇게 가르면 <올드보이>는 장르적 캐릭터에 가깝다. 노련한 배우로서 <해피엔드> <파이란>의 연기보다 <올드보이>의 연기가 덜 까다로웠을 거라는 짐작도 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다. 육체적으로 오대수는 최고로 힘든 역이었다. 그래도 <쉬리> 때는 몇년 젊기라도 했지. (웃음) 촬영 중 잠에 빠져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지태가 방독면을 쓰고 대수와 미도가 잠든 방에 숨어들어온 장면에서 나는 정말 잠들어버렸다. 펜트하우스에서 끔찍한 녹음을 듣고 무너져내리는 장면에서도 스탠 바이 상태에서 정신을 놓아 ‘레디 액션’ 소리를 듣지 못했다. 그러나 몸의 고단함이 피로의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당신은 어떤 캐릭터를 맡으면 아예 그 사람으로 거듭나는 타입의 배우다. 주어진 단서를 갖고 치열하게 몰입하고 변신해서 크랭크인 날 촬영현장에 나타나는 걸로 유명하다. 그런데 오대수는 너무 단서가 적다. 그가 당한 어떤 사건으로 규정될 뿐, 그 이전에 어떤 인간이었느냐에 관해서는 아내와의 사연도 없고 어떤 일을 하며 고교 이후 살았는지 물증이 불충분하다. 굳이 연기의 스타일을 ‘진경’이냐 ‘선경’이냐로 나누면 <올드보이>의 연기는 선경의 연기에 가깝지 않을까? 그래서 처음에는 정답이 없고 막연했다. 이번에는 크랭크인하기 전에 인물의 모습을 완성할 수 없었고 영화를 찍으면서 오대수가 됐다. 하긴 그것이 유별난 피로의 원인이었을 수도 있겠다. 그런데 초반에 촬영한, 금은방을 나와 미도가 건네준 딸의 주소를 적은 쪽지를 받는 장면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한번 미도를 울컥 돌아보고 걸어가는 내 뒷모습을 찍고나서 “이제 오대수를 어떻게 찍을지 알 것 같다”고 박찬욱 감독이 말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통나무 같은 몸으로, 받아든 쪽지를 집어넣지도 않고 손에 쥔 채 휘적거리며 걸었고 등에서는 분노가 흘렀다. “내가 어떻게 걸었는데?” 하고 물었지만 그때 감잡았다. (웃음)

여린 듯 무시무시한 이우진이 탐났다

그 말을 듣고보니 늘 궁금했던 점이 있다. 실제로 어떤 극중 인물 속으로 들어가려고 준비하는 단계에서 스스로 어떤 항목의 질문을 던지나. “그는 무엇을 입을까” 같은 질문 말이다. 정해놓은 물음은 없다. 말로 표현하기 힘든데, 그저 어느 순간부터 무의식이 그 인물의 사이클에 맞추어지고 현실 속에서도 생각이 자꾸만 그리로 가는 거다. 예컨대 <파이란>의 강재를 맡으면 차를 타고 가다가 “어, 쟤 강재 아니야?” 하고 지켜보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러가면 “강재라면 어떻게 앉을까? 차를 어떻게 마실까?” 끊임없이 생각한다. “강재라면 메뉴를 열심히 고르기보다 다방 레지 아가씨에게 관심이 갈 테니까 아가씨 관심을 끌기 위해서 커피도 시켰다, 율무차도 물어보고, 쌍화차도 시켰다 하겠지? 그러니까 커피맛은 무슨 맛인지도 모를 거야” 이런 식이다.

<올드보이>를 두 번째 볼 때야 비로소 하나의 우화, 또는 신화처럼 즐기고 몰입할 수 있었다. 나는 그것을 당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올드보이>가 <킬 빌>과 마찬가지로 치밀하고 화려한 스타일의 대중영화이면서도, 거리를 두기 어려웠던 것은 최민식의 수난과 복수가 우마 서먼의 수난과 복수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감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확한 이유가 배우 최민식의 사실주의적 연기인지 아니면 인간 최민식이 주는 어떤 신뢰 때문인지는 더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내가 유약한 인간이라는 점을 감출 수 없어서 그렇다. 겉으로는 센 척하면서도 여리고 감성적인 면이 있다. 지금은 많이 무뎌졌지만 아까 말했듯 젊은 날의 괜찮았던 나는, 지독한 로맨티스트였고 몹시 예민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크게 화를 내도 사정을 듣다보면 금세 불쌍해진다. 모질지가 못하다.

그래서인지 대수가 극중에서 우진이 왜 가뒀는지를 알고도 “복수가 성격이 됐다”며 다시 우진을 찾아갈 때에는 어쩐지 덜 수긍이 갔다. 그것은 극중 캐릭터의 리얼리티고 진실이다. 오대수는 그렇게 이우진에게 한번 자기를 더 심어주고 사과라도 받아야겠다는, 약속대로 5일 안에 답을 알았으니 네가 죽어라라고 말하고야 마는 순진한 놈이다. 그러다가 호구가 되지만. 거기 이어지는 펜트하우스의 대결장면은 <황야의 무법자> 같은 세계에 속한다. 권총 대신 사진액자를 서로에게 들이대는 거다. 그러나 우진이 몇수 위다. 정말 이우진 역을 하고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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