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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리엘의 진혼곡
권은주 2003-12-17

롤랑 조페의 영화 <미션>은 유럽인들이 ‘아메리카’라고 명명한 ‘새로운’ 대륙을 ‘발견’함으로써 그 대륙 원주민 전체에 발생한 끔찍한 사태의 한 단면을 다루고 있다. 그 대륙과 함께 그들은 ‘발견’되었고, 그 대륙이 유럽인들의 것이 됨과 함께 그들의 운명 또한 유럽인들의 손에 들어갔다. 총탄에 의해서든 병균에 의해서든 먼저 죽은 자들은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른다. 죽음 이상의 처참한 모욕을 피할 수 있었으니까.

<미션>에도 나오듯이, 유럽인들은 벌건 피부의 원주민들이 인간인가를 두고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며 다투었지만, 논쟁의 실질적인 이유는 분명했다. 그들이 인간이라면 그들을 노예로 사고팔 수 없기 때문이다. 레비스트로스 말대로 그들은 유럽인들이 신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유럽인들은 그들이 인간이 아니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래서 <미션>의 가브리엘이나 멘도자 신부는 그들 역시 인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그들에게 음악과 예술을 가르치고 그들과 더불어 미사를 본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상관이 보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결국 한편에선 총을, 다른 한편에선 십자가를 든 채 거대한 폭포 같은 죽음으로 밀려간다.

‘휴머니즘의 시대’라는 르네상스 시대에 벌어진, 인간을 둘러싼 저 논쟁에서, 우리는 그래도 위안을 찾는 방법을 안다. 가브리엘이나 멘도자처럼, 그들 역시 인간임을 주장했던 수많은 휴머니스트들이 있지 않았던가! 그렇다. 그래서 휴머니즘은 그리도 끈질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 게다. 그러나 ‘인디언’들을 두고 인간이니 아니니 논쟁을 벌이던 그 시절, 아프리카의 흑인들이 인간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우리의 휴머니즘, 그것은 백인들의 발명품이고, 따라서 백인들을 모델로 한다. 검은 눈과 검은 뺨, 그것은 인간의 얼굴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그들에겐 휴머니즘이란 이름으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어떤 특권도 없다. 반대로 소나 말처럼, 인간을 위하여 마음껏 사용해도 좋은, 그들의 신께서 ‘인간을 위해’ 만들었다는 자연의 일부요 환경의 일부일 뿐이다. 오, 차라리 사과나무로 태어났다면 더 좋았을 것을…. 다행히 검지 않은 얼굴을 한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사과나무가 아니라 좀더 ‘나은’ 인간을 부러워할 수 있으니. 게다가 나의 ‘인간됨’과 그 존엄함을 확인해주는 동물들은 물론 더 검은 얼굴, 더 작은 체구의 사람들마저 있으니 말이다. 그런 점에서 휴머니즘은 분명 우리를 위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리’의 관리들은 얼굴이 우리보다 꺼먼 외국인 불법체류자를 찾아내 쫓아내는 데는 열심이지만, 우리보다 허옇고 우리에게 영어도 가르쳐주는 백인 불법체류자에 대해선 실상을 파악하지 못했다며 감히 추적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우리’의 사장님들은 고장난 기계는 돈을 들여 고치지만 손목이 잘린 고장난 외국인은 줘야 할 돈도 주지 않고 내쫓아버린다. 하지만 그들만은 아닌 듯하다. 얼굴마저 백인풍으로 꾸미면서 검은 얼굴의 외국인들을 보며 안도하고, 하얀 얼굴을 보면 어떻게든 그들의 언어로 말을 한번 걸어볼까 긍긍하면서도 검은 얼굴을 보면 욕설이나 주먹마저 사용하는 우리의 동족들. 이런 생각이 떠오를 때면 내가 ‘인간’으로 태어났다는 사실이,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참혹하다.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얼마 전 구릿빛 얼굴의 노동자들을 겨냥한 “사냥”이 시작되었을 무렵 지하철에 뛰어들어오는 전동차를 향해 의연히 걸어가며 죽음을 맞았던 스리랑카 노동자 다카카에게서, 나는 총을 들고 ‘인간’들을 향해, 그들이 선고한 죽음을 향해 의연하게 나아가는 멘도자 신부의 모습을 보았다. 그 다음날 자신이 사용하던 기계에 목을 맨 방글라데시 노동자 비꾸에게서, 나는 십자가를 들고 ‘인간’들이 알려준 죽음의 방법을 택했던 가브리엘 신부의 모습을, 아니 그뒤를 따르는 ‘인디언’들의 모습을 보았다. 폭포소리에 묻혀 지워진, 그러나 결코 지워지지 않을 오보에 소리를 들었다.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 + 너머’ 연구원·서울산업대 교양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