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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만화의 새로운 발걸음, <십자군 이야기>
2003-12-18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했다. 1999년부터 대학교지에 만화를 발표하다가 2002년 신문연재소설 삽화를 맡았고, 2003년부터 인터넷 뉴스사이트 프레시안에 <십자군 이야기>를 연재하더니 8개월 만에 프롤로그와 부록을 덧붙여 단행본을 묶었다. ‘유쾌한 지식만화’라는 카피가 이리도 잘 어울릴까. 단숨에 읽어나가는 <십자군 이야기>는 무지하고 완고한 우리의 고정관념에 역사의 진실이라는 ‘지식’을 선사한다. ‘십자군’이라는 정의의 아이콘이 가장 추악하고 반문화적인 존재였으며, ‘아랍’이라는 ‘악의 축’이 문화적 관용의 존재였다는 점이 중세 스테인드글라스에서 뽑아낸 듯한 독창적인 그래픽을 통해 전달된다.

불편한 것은 중세의 이야기가 오늘의 현실과 유사하게 오버랩된다는 점이다. 군중십자군의 의미없는 학살이나 이라크를 침공한 미군의 학살이나 무엇이 다를까? 전쟁의 광기에 집착하는 인간에 대해 회의하게 한다. <십자군 이야기>는 ‘반전’을 전면에 내세워 웅변하지 않지만, ‘반전’을 전면에 내세운 나 <만화로 평화 만들기> 같은 기획단행본보다 훨씬 더 효과적으로 독자들에게 반전을 설득해낸다. 이것이 만화의 힘이고, 이야기의 힘이다.

이원복표 지식만화와 반대편에 위치한 이 젊은 작가의 지식만화는 변화의 이정표다. 첫 번째는 성인용 지식, 교양만화의 가능성이다. 진지한 독서시장으로 만화가 들어가는 충분한 사례가 될 수 있다. 두 번째는 노력하는 작가의 가능성이다. 중세의 이야기에서 오늘날까지 이어져오는 아이러니를 발견하고, 그 흐름을 추적해 만화를 만들어낸 것은 기존 작가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성실의 덕목이다. 세 번째는 시나리오의 중요성이다. 이원복의 지식만화, 특히 <먼나라 이웃나라>가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힘은 ‘시나리오’에 있다. 이원복은 특유의 과장되지 않은 단정한 그래픽(명료한 선)과 통일된 칸 분할을 통해 시나리오에 집중하도록 한다. 김태권의 전략도 마찬가지다. 좀더 도상에 가까운 이미지는 높은 이야기 전달력을 보여준다.

위험을 무릅쓰고 예언하자면, <십자군 이야기>는 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다. 발매하자마자 여러 신문의 서평란에 소개되었고, 온라인 서점의 판매 베스트에 올랐다. 시장의 불황을 이야기하기 전에 좋은 기획을 이야기하고, 그 기획을 뒷받침해줄 성실함을 구하라. 좋은 기획을 발견하는 혜안과 성실함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박인하/ 만화평론가 enterani@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