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봉준호 감독, 2004년 최고의 기대주 임수정을 만나다 [1]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문석 2004-01-02

미지의 성, 연민의 섬

“오늘은 딴사람 같아요.” 성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신한 임수정에게 봉준호 감독이 인사말을 건넸다. 지난 연말 각종 시상식을 함께 누비며 서로 얼굴은 익혔으나 깊은 대화를 나눠보지 못한 배우에 대한 감독의 인터뷰는 그렇게 시작됐다. 2003년 <장화, 홍련>과 <…ing>에서 신인답지 않은 성숙한 연기를 펼쳐 충무로 최고의 기대주로 떠오른 임수정에게 봉준호 감독은 한 사람의 감독이자 팬으로서 시시콜콜한 질문까지 퍼부었다. 반면 임수정은 이날 인터뷰를 위해 <장화, 홍련>과 <…ing>를 ‘복습’할 정도로 세심한 준비를 했던 봉준호 감독의 질문에 거침없고 솔직하게, 그리고 똑 부러지게 답했다. 꼼꼼한 감독과 대범한 배우가 나눈 대화를 정리한다.

봉준호 | 수정씨를 보면서 늘 묘하다는 생각을 했어요. 얼굴은 나와 다른 세상의 사람처럼 생겼거든요. 그런데 <…ing> 같은 영화를 보면 말과 행동이나 이런 것은 일상적인 것을 너무 잘 담아내잖아요. 얼굴이 주는 다른 세상의 느낌과 연기의 너무나도 자연스런 느낌이 충돌하면서 묘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반면 <장화, 홍련> 같은 경우는 인공적인 세트에서 찍혔고, 그 집도 사실 다른 세상이잖아요. 거기서는 어떤 일체감을 느끼면서 묘한 느낌을 주는데, 본인은 어느 쪽이 맞다고 생각하나요?

임수정 | 개인적으로는 일상적인 연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좀 불안해 해요. 편안하게 하는 연기가 더 어려워요. <…ing> 같은 경우에는 그냥 우리 일상생활을 그대로 담아놓은 현실이잖아요. 근데 그런 경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봉준호 | <…ing>를 보니까 이미숙씨와 주거니받거니 하는 거라든가 연기를 무척 천연덕스럽게 하던데.

임수정 | 그래도 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사실 일상적인 상황이 아닌데 일상적으로 연기하는 것도 힘들고.

봉준호 | 자꾸 외모에 대해서 말하게 되는데, <…ing> 같은 경우에는 실제 나이보다 많이 어린 역할이었잖아요. 실제 나이보다 어린 역할을 하는 건 어땠어요?

임수정 | 그동안 나왔던 영화 세 작품 다 10대 소녀의 몸을 가지고는 있지만, 실은 어른이나 다름없는 아이 역할을 했었어요.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건 단순히 제 외모에서 풍기는 이미지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저는 캐릭터가 제 나이보다 더 성숙됐다거나 더 떨어진다거나 그런 건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봉준호 | 그런데 20대 중반이라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죠?

임수정 | 놀라죠. 근데 20대 중반의 친구들이 갖고 있는 것을 저도 가진 것 같아요. 단지 제 외모가 나이보다 어려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묘하게, 신기하게 다가가는 것 같고요. 그건 행운인 것 같아요. 어린아이인데, 어른인 것 같은 연기를 했을 때 잘 어울린다고 생각해주니까.

묘한 이 느낌은 뭐지?

봉준호 | <장화, 홍련>을 보면 그런 묘한 분위기가 200% 발휘되는 것 같은데, 상대역과의 호흡도 중요하지 않았나요?

임수정 | 상대 배우로부터 영향을 받는 건 이 영화에서 처음으로 느꼈어요. 상대 배우의 눈빛이나 말이나 또는 배우 그 자체만으로 내가 흔들린다고 하나, 그런 느낌이요. 아침에 이런 대사는 이렇게 해야지, 생각은 하고 오지만 현장에서 상대배우의 느낌을 받고 전혀 다르게 바뀌는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봉준호 | 문근영의 경우는 특히 그랬을 것 같은데.

임수정 | 그렇죠. 근영이는 어른 못지않은 좋은 감성을 갖고 있어요. 너무 많은 자극이 됐죠. 실제로 수미가 수연에게 집착하는 것처럼, 촬영 끝날 때쯤 돼선 제가 근영이에게 많이 집착하고 있었던 것 같아요.

봉준호 | 문근영에게는 영감도 받고 그랬는데, 반대편으로 고개를 싹 돌리면 염정아씨가 있단 말이에요. 극도의 집착과 애정을 문근영에게 쏟아붓다가 장면 하나만 딱 바뀌면 엄청난 분노와 증오가 있잖아요. 그 둘 사이를 오가는 것 때문에 힘들진 않았나요?

임수정 | 근영이와의 호흡은 내가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정아 언니와 대립하는 데서는 기계를 돌리듯이 에너지를 끌어올려야 하는데, 그게 힘들더라구요.

봉준호 | 그렇게 힘들 때 김지운 감독은 안 도와주었어요? 그 양반은 뭐 하고 있었던 거야. (웃음)

임수정 | 물론 도와주시긴 했죠. 그런데 이러쿵저러쿵 설명하지 않으세요. 뭔가 감정을 잘 못 잡고 있다고 판단하시면 딱 와서 그냥 몇 마디 툭툭툭 던져주세요. 그러면 감정이 확 잡혀요. 다른 배우들도 똑같은 경험을 했다고 하더라구요. 수정아, 이런 상황이니까 이렇게이렇게 해서 이런 감정을 가져야 하지 않겠니, 하는 식으로 설명적으로 지시하지 않는 것 같아요.

봉준호 | 음…. 그 노하우, 다음에 만나면 물어봐야지. (웃음)

임수정 | 자신만의 비밀인데 가르쳐주실까요. (웃음)

봉준호 | <…ing>는 편하게 느껴졌어요. 어떻게 보면 어둡게 침잠할 수 있는 그런 이야기인데, 밝고 가벼워 보여서 좋더라구요. 특히 느낀 게 수정씨 대사 스피드가 굉장히 빨라요. 빠른데, 발음이 정확하게 다다다닥 꽂혀요. 닭이 모이를 쪼듯이. 본인은 자신이 대사를 빠르게 한다는 것을 알아요?

임수정 | 몰랐었는데 간혹 그런 말을 해주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그건 제 평소의 말투가 그런 것 같아요. <…ing>의 말투가 평소의 말투와 가까워요. 사실 저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아이들 말투처럼 “뭐 있잖아아~” 이러면서 말했던 것 같은데, 자연스럽게 그런 말투에서 벗어나게 되면서 어미를 딱딱 끊게 되더라구요. 끌지 않고.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