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Skip to contents]
HOME > Magazine > 스페셜 > 스페셜1
봉준호 감독, 2004년 최고의 기대주 임수정을 만나다 [2]
사진 손홍주(사진팀 선임기자) 정리 문석 2004-01-02

저 20대예요

봉준호 | 다음 영화는 아직 못 정했죠?

임수정 | 예.

봉준호 | 에브리바디가 다 궁금해하는데, 어떡할 거야, 빨리 정해야지. 해도 바뀌는데 어떡할 거야. 먹고살아야지. (웃음) 고민이 많죠?

임수정 | 너무 고민이 많아요. 사람들의 기대치가 너무 높아진 것 같아요. 제가 어디선가 과대평가된 것 같다는 말도 가끔 했는데, 어떤 분위기에 휩쓸려서 내가 여기까지 온 것 같다는 생각이 가끔 들어요. 그 기대치에 부응할 만한 작품을 선별하고, 그 작품에 몰입해서 제대로 연기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드니까 작품을 고르기가 어렵더라고요. 부담감도 커지고….

봉준호 | 작품을 결정할 때, 장르, 시나리오, 캐릭터, 감독 등도 볼 텐데 그중에 굳이 우선순위를 나열한다면 어떻게 되나요?

임수정 | 일단은 캐릭터에 대한 연민이 있어야죠.

봉준호 | 연민? 넓은 의미에서의 연민? 동정하는 게 아니라?

임수정 | 그렇죠 연민. 거기에는 동정도 있을 수 있겠죠. 아, 이 캐릭터 하면 연기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겠다, 이런 생각 갖고는 선택을 못하는 것 같아요. 왠지 나랑 닮은 구석이 있다거나, 측은하게 느껴진다거나, 또 다른 나의 모습인 것 같은 그런 것들을 보면 하고 싶어지는 것 같아요.

봉준호 | <피아노 치는 대통령>은 제가 못 봤어요. 미안해요. 하긴 수정씨도 <플란다스의 개>를 못 봤으니까….

임수정 | 아니, 저 그거 봤어요.

봉준호 | 케이블에서 하던 거 보다 잤죠?

임수정 | 안 잤어요. 케이블인 건 맞는데…. (웃음)

봉준호 | 극장에서 본 사람을 너무 못 만나서…. 하여튼 <피아노 치는 대통령>이 35mm영화로는 처음이었죠. 많이 힘들었어요?

임수정 | 그때는 힘든 게 뭔지도 모르고 아무것도 몰랐어요.

봉준호 | 그게 2002년이니까 영화 데뷔한 게 1년 반 정도 전인데, 까마득하게 옛날처럼 느껴져요?

임수정 | 아주 오래 된 것 같아요. 1년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아요.

봉준호 | 거기서도 고교생 역할?

임수정 | 그렇죠.

봉준호 | 그 전에는 모델만 했나요?

임수정 | <학교4>라는 청소년드라마에도 나왔어요. 거기서도 고등학생 역이었죠. 이미 나이는 스무살이 넘었었는데.

봉준호 | 만날 10대 역할만 하는데.

임수정 | 20대 역할을 하고 싶어요, 이제는.

봉준호 | 캐릭터의 연령대도 작품을 고르는 데 참고 대상이 되겠네요.

임수정 | 사실, 고등학생 역이 아직도 들어오고 있거든요. 고등학생인데 몸이 아프건 정신이 아프건 어디가 아프고, 그러면서도 인생 다 산 아이처럼 성숙했고, 그런 역할들이. 그런데 그 몇달 사이에 제가 조금 더 어른으로 가나봐요. 왜냐면 몇달 전만 해도 그런 아이들 보면 연민이 막 생기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막 들었었는데, 이젠 10대의 감성에 공감은 하지만 동일화시키진 못하는 것 같아요.

봉준호 | 수정씨와 이야기해보니 공감 또는 연민이라는 말이 반복적으로 나오는데, <…ing>를 보면 여주인공이 ‘횡단보도 아저씨’에 대한 얘기하면서 막 우는 장면이 있잖아요. 연민이라는 말을 들으니까 그 시퀀스가 생각이 나는데, 좀 어렵지 않았어요? 몇 테이크나 찍었나요?

임수정 | 테이크는 많이 안갔어요. 그 장면에선 순간적으로 올라오는 감정을 표현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 연기를 반복하다 보면 그건 순간적인 게 아니게 되잖아요. 저는 테이크를 가면 갈수록 점점 못하거든요.

봉준호 | 그 말을 들으니 송강호 선배가 생각나네요. 강호 선배도 테이크를 거듭할 때마다 순간성, 현재성이 계속 없어진다고 해요. 그래서 매 테이크가 첫번째 테이크가 되도록 대사도 바꾸고 이것저것을 바꿔서 연기를 한대요.

임수정 | 정말 그런 점은 배우고 싶은 능력 중 하나인데, 제가 그런 면이 부족하거든요. 저도 테이크를 가면 갈수록 안 좋기 때문에 초반에 잘 나온 것을 많이 썼으면 한다고 제가 감독님께 미리 말씀을 드리기도 했어요.

봉준호 | 지금까지 찍은 3편의 영화 중에서 가장 힘들었던 장면을 꼽는다면 뭔가요?

임수정 | <장화, 홍련>에서 삭제된 장면인데, 후반에 새엄마와 몸싸움 다 일어나고 난 뒤 거실에서 정아 언니와 제가 마주 보면서 우는 신이었어요. 그 장면 찍을 때 한계점까지 갔었어요. 촬영 후반이기도 했고, 체력이 다 떨어져 있는 상태이기도 했어요. 감정적으로 중요한 신인데 그땐 제 감정이 바닥이 났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아무리아무리 해도 감정이 안 올라오고 눈물도 안 나오고 너무너무 힘들었죠. 그 어디에도 기댈 데가 없으니까 갑자기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봉준호 | 배우 일을 하다보면 그런 경우처럼 이도저도 안 될 때가 한번은 오는 것 같아요.

임수정 | 그거는 자기 스스로 해결해야지, 아무도 도와줄 수 없는 것 같아요.

배우? 계속 해야 할 것만 같은 어떤 것

봉준호 | 배우란 존재에 대해서 감독만큼 많이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거예요. 감독 입장에서는 저 배우가 내 분신이었으면, 내 감정을 대신 표현해줬으면 하는 생각을 하니까. 나도 연기를 해봤거든요. <피도 눈물도 없이>에서 한신에 나와요. 그런데 뒤론 섭외가 안 들어오지만. (웃음) 엄청난 쪽팔림을 무릅쓰고 그걸 했던 것도 배우의 입장이 뭘까, 잠깐이나마 겪어보고 싶었던 거였는데 잘 모르겠어요. 배우의 입장이란 게 뭔지…. 왜 이렇게 길게 얘기하냐 하면 배우가 뭐라고 생각하냐를 물어보고 싶은 거예요. 배우란 뭔가요?

임수정 | 음…. 모르겠어요. (웃음) 배우가 뭐냐는 것에 대해서 똑 부러지게 정의내릴 배우가 있을까? 뭔지는 모르겠는데 하고는 있어요. 잘 모르겠는데 앞으로 계속 해야 할 것만 같은 느낌도 있고.

봉준호 | 사실 저도 왜 영화를 하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언제쯤 알게 될지도 모르겠고. 그런데 확실한 점은 배우나 감독이나 아주 힘든 일이라는 것이죠. 저는 웬만한 일이 다 감독만큼 힘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유일하게 인정하는 것이 배우예요. 배우가 우리보다 조금 더 힘들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해요.

임수정 | 저는 오히려 반대로 생각하는데요. 감독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면서. 특히 감독님들은 선택을 해야잖아요. 저는 선택 같은 것 잘 못하거든요. 차라리 누군가 나 대신 오케이다, 아니다, 그걸 선택해라, 말아라 하고 해줬으면 좋겠어요. 감독님들은 한컷 찍는데 몇십 가지를 보면서 일일이 선택을 해야잖아요. 하다 못해 다시 찍자, 계속 찍자, 내일 찍자, 밥을 먹자, 이런 것까지 선택을 해야 하니까 그런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 같아요.

봉준호 | 그래서 감독들의 직업병이 있어요. 식당에 가면 그런다니까. 메뉴를 못 고르고 “그냥 조감독이 먹는 것 먹을게”, 이런다니까. (웃음)

임수정 | 알 것 같아요. (웃음)

봉준호 | 오늘의 결론은 ‘우리는 못할 짓을 하면서 살고 있다’ 이런 거 같네요. (웃음) 그러니까 우리는 연민을 느끼자 이거지. (웃음) 서로 힘든 직업이니까 우리 연민을 느끼도록 합시다.

임수정 | 연민이요? … 네, 연민!

관련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