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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투쟁과 단식투정

아이를 키워본 사람들은 다들 경험했을 것이다. 네댓살 먹은 녀석이 무언가 맘에 들지 않는 일이 있을 때 “나 밥 안 먹어” 하고 토라지는 것을. 쥐어박고 싶기도 하고, 가소롭기도 하고, 귀엽기도 한 것이 애들이 밥 안 먹는다고 투정부리는 일이다. 요즘 유행어로 “나는 소중하니까요”를 깨달은 아이들은 숟가락을 놓는다. 그러나 여기 넘어가는 부모들은 별로 없다. 소중한 자식 버릇 잘못 들까봐 부모들은 때론 철저한 무시로, 때론 따끔하게 혼내고, 때론 아이가 좋아하는 불고기나 피자 같은 음식을 앞세운 적극적인 공략으로 아이들의 단식투정을 무력화시킨다.

아이들의 단식투정과는 달리 정치적인 요구나 생존권적인 요구를 내건 단식투쟁에는 가벼이 볼 수 없는 절박함 또는 비장함이 묻어난다. 단식투쟁은 “네깐 놈들, 밥 몇끼 굶는다고 내가 눈 하나 까딱할 것 같냐”고 버티는 강자들을 향한 약자의 마지막 무기이다. 다른 투쟁수단을 애당초 동원할 수 없거나, 또는 다른 수단이 소용없음이 판명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쓰는 제 살 깎아내는 전술이 단식투쟁이다. 그렇기에 단식투쟁은 아무나, 아무 곳에서나 하는 것이 아니다.

한나라당 최병렬 대표가 단식을 했을 때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도 덩달아 밥맛을 잃었다. 재벌이 구멍가게 말아먹는 일이야 지난 수십년간 너무 많이 보아온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한국에서 가장 강력하다는 의회권력을 장악한 정당의 대표가 가장 힘없는 자들이 최후의 무기로 쓰는 단식투쟁마저 빼앗아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감옥 같은 고립된 상황에서 도저히 밖으로 자신들의 요구나 주장을 알릴 길이 없을 때 목숨을 걸고 하게 되는 것이 단식투쟁이다. 그런데 기자들이 늘 북적이는 정당에서 기자들 잔뜩 불러놓고 단식을 하는 모습은 영 어울리지 않는다.

1983년 김영삼씨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저항으로 단식을 했을 때, 언론은 이를 한줄도 보도하지 않았다. ‘최근의 정세흐름’이니 ‘정치현안’이니 하는 모호한 말이 며칠 실리더니, 급기야는 “어느 재야인사의 식사문제”가 정치면을 도배하게 되었다. 김영삼은 자신의 단식을 이렇게 황당한 기사로 둔갑시킨 <조선일보>의 당시 편집국장이었던 최병렬을 찾아가 단식의 선배로서 “굶으면 확실히 죽는다”라는 엄청난 진리를 설파했다. 그렇다, 굶으면 죽는다. 일제 강점기 평양 고무직공 파업의 주역인 여성노동자 강주룡이 그랬고, 광주항쟁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이던 박관현도 옥중에서 단식 끝에 숨을 거두었다. 강주룡 등 평양 여공들의 단식은 처음에 겨우(!) 70여 시간 단식을 했음에도 당시의 신문들에 대서특필되었지만, 박관현이 50여일의 단식 끝에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같은 해에 있었던 김영삼의 단식과는 달리 철저히 파묻혔다. 1981년 보비 샌즈 등 아일랜드의 혁명전사 10명은 영국을 상대로 한 옥중 단식 끝에 숨을 거두었다. 단식투쟁 중인 수인들의 어머니들이 개입하여 막을 내린 이 장엄한 비극의 절절한 이야기는 <어느 어머니의 아들>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되어 있다. 사회보호법은 청송보호감호소에 수감 중이던 강아무개씨가 단식투쟁 끝에 사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다.

강주룡은 겨우(!) 9시간 을밀대 지붕 위에 올라간 ‘체공투쟁’ 덕에 당시의 신문에 대서특필되었으나, 한진중공업 노조 김주익 위원장은 120여일에 걸친 고공투쟁이 철저히 무시된 끝에 목을 맬 수밖에 없었다. 똑같이 단식을 해도 노동자들이나 평화운동가들은 수십일을 굶어도 신문에 한줄 나기 어려운 반면, 힘있는 자들은 쌀뜨물 옆에 두고 의사들 대기시켜놓고 몇끼만 굶어도 큰 뉴스가 된다. 이런데 세상이 평등하다고? 힘있는 자들이여, 당신들 밥맛없을 때 단식투정하는 것까지야 말릴 수 없겠지만, 부디 <어느 어머니의 아들>이라도 동네 비디오 가게에서 1천원 주고 빌려다보고 투정을 하시라.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어떤 상황에서 단식투쟁에 들어가고, 어떻게 죽어가는지를 알아둔다면 더 밥맛이 없어져 당신들의 투정이 더욱 큰 성과를 거둘지니!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평화박물관건립추진위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