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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극이 옛 고지 탈환의 도전장으로 내놓은 <순류역류>
2001-05-30

성형수술했지만, 그래도 서극이네

싸움질하는 영화장르의 귀재로 연출이면 연출, 제작이면 제작, 안 걸치는 데가 없는 홍콩영화계의 거물 서극을 가리켜 흔히들 홍콩의 스티븐 스필버그라고 한다. 오우삼을 발굴하고 주윤발을 세상에 선보였으며 이소룡을 재조명하고 킹후를 해고한 서극은, 아닌 게 아니라 제작자로서 만만찮은 이력의 소유자다. 그러나 감독으로서는, 스필버그보다 브라이언 드 팔마쪽에 가깝지 싶다. 감각적인 폭력의 제단에 줄거리의 일관성쯤이야 언제든 제물로 바칠 채비가 돼 있는데다, 뽀시시한 스테이지 세트 촬영에 중독증세를 보이며, 앞뒤 안 맞는 얘기들을 수다스럽게 늘어놓는다는 점에서.

드 팔마가 그렇듯, 서극의 갈지자 걸음도 때로는 도발적이리만치 심하다. <미녀 삼총사>의 원조격 영화로, 전자에 비할 수 없이 탁월한 <도마단>(1986)은 지금까지도 걸작으로 남아 있다. 2차원적인 이 여성액션코미디영화가 성공한 부분적인 이유는, 그저 외곬으로 한 우물을 판 데 있을 것이다. 그에 비해 <순류역류>는(35편이나 되는 그의 작품 중에서 뉴욕에서 시사회가 열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닌가 싶은데) 좀더 관심의 폭이 넓다. 서극이 할리우드에서 시시껄렁한 장 클로드 반담 영화 두편을 만든 뒤에 홍콩으로 돌아가서 내놓은 이 영화는, 옛 명성을 회복하겠다는 도전장으로 보인다.

재미있게 볼 만한 <순류역류>는 휘황찬란한 도심의 야경을 표현주의적으로 담아내고, 철학적인 내레이션을 까는가 하면, 남미풍의 환상까지 동원하는 등 왕가위의 패러디로 영화를 시작해서, 한때 서극의 제자였던 오우삼이 홍콩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영화 <첩혈속집>의 피날레를 노골적으로 비웃으면서 끝난다. 그리고 동시다발적인 서브플롯과 연출된 총격전(공은 많이 들였지만 논리적이기보다는 표현주의에 훨씬 더 치우친) 속에서 펼쳐지는, 거의 줄거리를 따라잡기 힘든 청부폭력배의 내러티브가 그 중간을 채운다.

이 영화의 명목상 주인공인 스물한살짜리 바텐더 타일러(홍콩 팝계의 우상인 사정봉이 김빠진 연기를 펼친다)는 레즈비언 사복경찰인 조(모델 서자기)와 집에서 하룻밤을 보낸다. 그 아홉달 뒤 슈퍼마켓에서 그녀를 만난 타일러는 그녀가 임신한 것을 보고, 본인이 전혀 원치 않는데도 불구하고 책임감을 느낀다. 우연찮게 삼합패 보스 미스터 홍의 생일파티 기습공격을 함께 막아내면서, 타일러는 남미에서 오랫동안 용병으로 일하다가 돌아온 나이가 형뻘인 폭력배 잭(대만 슈퍼스타 로커 오백)과 친해지게 되고, 보디가드 자리도 얻게 된다. 그런데 미스터 홍은 우연찮게도 잭의 임신한 아내 후이(가수 노교음)의 의절한 아버지다. 이해가 가는지?

그러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생뚱맞게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주로 브라질에서 건너온 중국 조폭들인 잭의 왕년의 동료들이 스스로 ‘바퀴벌레 도시’라고 경멸하는 이 동네로 오면서 사태가 조금 복잡해진다. 모종의 이유로, 그들은 미스터 홍을 제거하려고 든다. 그러나 <순류역류>가 라이벌 갱단까지 등장하는 본격 갱영화로 변신할 즈음, 내러티브의 논리는 거대한 쇼핑몰에서의 몇번에 걸친 난폭한 추격전과 고층빌딩 주차장에서 벌어지는 범퍼카 놀음이 일으키는 먼지 속에서 실종된 지 오래이다. 그중에서도 압권은 잭이 살고 있는, 다 쓰러져가는 새장 같은 거대한 아파트 단지에 대한 거의 군사적인 공격장면.

잭은 갱단의 돈을 가로챘던 모양인데(타일러가 누명을 쓰긴 하지만), 브라질에서 온 갱단은 그가 다시 조직에 합류하기를 원한다. 잭이 창문을 깨고 아파트 외벽을 타고 탈출하는 와중에도 저격수들은 여전히 아파트 주변만 감시하는데, 통풍구와 계단통에서 벌어지는 일종의 공중곡예 같은 이 장면은 떼돈 들여 <스파이더맨> 만드는 제작자들조차 혀를 내두를 만하다. 서극이 이 공중발레장면을 유유자적 즐기다가 건물을 디지털로 폭파시켜버리기까지는, 20분쯤 걸린다.

<순류역류>는 비디오게임 그 자체다. “새로운 목표물, 새로운 정보”가 대사의 핵심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타일러는 돈을 찾기 위해 기차역에서 후이를 뒤쫓는데, 이런 타일러의 뒤를 경찰 특별기동대가 또 바싹 뒤쫓고 있다. 경찰 사수들은 임신한 후이가 진통을 시작했는데도 동굴 같은 기차대합실에 뛰어든다. 총격전 가운데서 후이가 아이를 낳는다면 말 다했지.

매혹적인 젊은이들과 중국 팝, 그리고 앞뒤 안 맞는 내러티브로 가득 찬 농담조의 이 영화는 서극판 네오-뉴웨이브다. 감독은 영화의 거죽은 매끈하게 성형수술했지만 그의 날선 개성은 조금도 죽지 않았고, 옛날 서극의 모습이 틈만 나면 튀어나온다. 그렇다고 기대했던 것만큼 그렇게 서정적이거나 특이하거나 진심으로 낭만적이지는 않다. 물론 밉살스런 고객을 후진운전으로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보디가드를 훑어내리는 그의 카메라기법을 포함해서, 입 벌리고 볼 만한 장면도 한두 가지가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200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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