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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입과 망각

운명 앞에 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크게는 긍정적인 자세와 부정적인 자세로 나눌 수 있고 만약 그것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를 구분한다면 다시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운명을 의식하면서 그저 열심히 살아가는 소극적인 방법이고 또 하나는 운명에 반하는 목표를 설정하고 하루하루의 일상을 매진하는 적극적인 방법이다. 전자가 <회전목마>의 은교(장서희)의 자세라면 후자는 <대장금>의 장금(이영애)의 자세이다.

은교에게는 엄마의 자살과 아빠의 재혼, 힘겨운 고학, 그리고 사랑의 상처까지 어느 것 하나 녹록지 않은 삶의 멍에들이다. 바라보고 있으면 가슴이 짠해오고 저렇게까지 고생스럽게 살아가지 않을 수 있는 것을 그녀의 고집스런 기질이 그렇게 만들어가는 것 같아 심지어 원망스럽기까지 하다. 게다가 그녀의 고집과 삶에의 열정이 도대체 무엇을 향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명시해주는 대목이 없다. 그저 어떻게 해서든 가혹한 운명을 벗어나기 위해서 좀더 나은 삶에 대한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을 힘겹게 내디딘다. 그런데 그 내디디는 발자국마다 앞으로 가기는커녕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온다. 어머니의 자살 이후 마음을 잡은 아버지가 은교가 입시를 치르는 날 사고를 당하면서 외롭고 고통스러운 고학 시절로 들어가는 것과 그나마 자신의 바람막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믿었던 우섭(김남진)의 집안이 몰락하면서 우섭마저 의지할 곳이 못 된 것을 보면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제자리를 빙빙 돈다. 운명과 맞서서 은교는 너무나 열심히 살아가고 있지만 운명의 굴레는 자꾸 그녀를 비켜가지 않고 덮쳐온다.

그에 비하면 장금의 태도는 다른 뜻에서 우리의 눈길을 끈다. 부모의 불행한 운명까지 고스란히 물려받은 장금에게 궁으로 들어가서는 수라간의 최고 상궁이 되는 것이 목표였고 궁을 쫓겨나서는 어머니와 한 상궁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이 인생 최대의 목표가 되어버렸다. 표면적으로는 현실적인 야심에 가득 찬 목표들인데도 우리는 그녀가 내디디는 발자국에 매료된다. 아름다운 색감과 맛과 향기를 품어내는 음식을 만드는 그녀의 손끝과 그것에 열중해 있는 모습에서 그녀를 뒤따라다니고 갖가지 약재와 혈맥을 외우는 상기된 그녀의 얼굴에서 우리는 함께 그것에 집중하게 된다. 심지어 의술을 배우면서도 복수심에 불타 있는 그녀를 용서해주어야 할 것만 같은 관대함이 자꾸 스며든다. 왜인가? 혹시 명시화된 목표가 은교와 장금에 대한 정감의 차이를 만드는가?

그러나 은교에게 더 나은 삶을 위한 그녀의 노력을 분명하게 보고 있는 만큼 그녀에게 목표가 없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심지어 운명을 대하는 태도를 만드는 것이 뚜렷한 목표가 있고 없음에 달려 있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왜냐하면 어쩌면 삶은 그 자체로 순수한 의미에서 목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은교에게나 장금에게나 운명은 가혹했고 둘 다 너무도 열심히 그것에 부딪혀가면서 살아가고 있기에 더더욱 그렇게 단정할 수 없다.

내가 보기에 은교에겐 없으나 장금에게 있는 단 한 가지는 바로 목표를 향해 가고 있는 순간에 드러나는 몰입과 자기 망각의 시간이다. 회전목마처럼 빙빙 돌며 언제나 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오는 삶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벗어나려 해도 벗을 수 없는 삶의 굴레를 어찌 은교만이 안고 있겠는가. 발버둥쳐도 돌아오는 그 운명의 사슬 앞에 연약한 여인은 독한 마음을 품고 다시 일어서지만 우리는 그 앞에서 갑갑해진다. 그녀는 너무나 그것에 가까이 있는 것이다.

삶의 굴레란 의식하고 달려들면 달려들수록 더욱더 깊숙이 빠져들어가게 되어 있다. 내딛는 그 한 발자국을 빠져나올 수 있는 것으로 만드는가는 오히려 운명 자체를 의식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장금을 통해서 즐겁게 보고 있는 것은 수라간 최고상궁이 되겠다는 그녀의 목표를 응시하는 것이 아니다. 좀더 나은 맛을 향해서 매진하고자 음식을 다듬고 정성스레 칼질을 하고 양념을 섞어넣는 그녀의 노동 속에서 우리는 인생 목적의 무게를 잊는다. 자기망각의 노동이 있어야만 목표에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그 시간만이 운명 자체를 궁극적으로 벗어나게 해주는 유일한 지점임을 명시해준다. 나는 주말이면 어김없이 은교가 언제나 바람막이가 되는 그 누군가를 찾아나가는 새로운 시작이 아니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운명의 사슬을 잊고 진정한 자기 몰입과 망각을 이루어내는 좀더 현명한 방법을 찾아나가기를 기다려본다. 素霞(소하)/ 고전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