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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영화(들)의 관객 연놈들은 멋있었다! [1]

영화평론가 정성일,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귀여니 앞에서 사색하다

지난 한해 한국영화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풍성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예리한 눈을 가진 당대의 논객들은 이런 상황을 어떻게 사유하며 곳곳에서 들려오는 풍년가의 틈새에서 무엇을 듣고 있을까. <씨네21>의 김소영, 정성일, 허문영 세 편집위원에게 자유로운 글을 청했고 영화평론가 정성일이 첫 번째 발언을 보내왔다. 우리가 아는 그 ‘정성일’이 <동갑내기 과외하기> <옥탑방 고양이> <그놈은 멋있었다>를 통해 새로운 관객의 도래를 확인하며 자신과의 거리 혹은 소통 불가능성을 진지하게 사유하는 모습은 신선한 충격을 준다. 세번에 걸쳐 이루어질 이 기획을 통해 우리 눈앞에 어떤 지형도가 펼쳐질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게 된다.

영화를 보면서도 잊을 수 없었던 내 사랑의 문제점을 되씹으면서 영화관을 나서는 나는 “이젠 좀 끝났으면!”이 아닌 “난 이해하고 싶어!”란 괴이한 소리를 지른다. _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괄호로 시작하기. (… 어느 날 갑자기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들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살아가야 할 때 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불연속의 블록 안에 들어가서 만리장성 바깥으로 나오는 길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 무한의 길 잃기 살아생전에는 나올 수 없을 것만 같은 복도들과 난간들. 그러니 차라리 창을 열고 뛰어내리자. 그것이 윈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 귀여니 홈페이지의 자문자답: (귀여니의 질문) 지금 행복한가? (귀여니의 답) 불행하다. (나의 덧글) 나도 불행하다.

그러니까 이 글은 그 불행의 공감을 얻기 위한 나의 애원과도 같은 것이다. 생각해보라. 19살 소녀가 불행한 나라에서 함께 살면서 어떻게 46살 남자가 행복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니 이 글은 대책없는 덧 글일 수밖에 없다. 수수께끼에로 뛰어들기, 그래서 귀여니의, 이햇님의, 김유리의, 혹은 (상투적으로 말하자면) 우리 시대의 표현기계가, 영화와 맺는 놀이의 관계, 용법, 감각, 그물코, 질서, 계열, 배열과 배제, 그냥 한마디로 출현과 힘 사이의 영토에로 무작정 뛰어내리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뛰어내리기에 앞서 우선 당부의 말씀. 이 글의 상당 부분의 표현이 일부 독자들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심호흡을 하신 다음 그냥 단 한번에 쉬지 말고 스크롤로 채팅을 긁어 내려가듯이 소리내어 구어체로 읽으실 것. @#$% 이 글도 그렇게 쓰여졌음. 혹여 매우 신중하고 고상하신 독자들께서는 그냥 이 페이지를 건너뛰시기 바람. 그럼에도 읽고 나서 괴로워하는 것은(@@) 내 책임이 아님. (ㅠ_ㅠ) 이 글은 더 이어질 세편의 글 중의 하나임.

소년소녀들의 불행에 공감하기 위하여

첫 번째 테제. (그냥 웃자고 하는 말) 지금 하나의 유령이 한국영화를 떠돌고 있다. 그건 귀여니라는 사이버 유령이다.

처음에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한겨레>에서 함께 영화에 관해서 (매주 화요일) 글을 쓰고 있는 세 사람이 모여서 지난 한해 한국영화에 대해 돌아보면서 이야기해보자고 하였다. (복종하지 말고 논하라!) 나는 이걸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허걱. 깡이 이빠이데쓰네!!”) 그냥 무심코 재미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앗싸!) 언제나 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걸 정색을 하고 이야기하건(과잉 진술의 사례들), 아니면 차를 마시면서 하건(과소 진술의 일상사), 혹은 가위 바위 보를 하며 술잔을 돌리면서 하건(과장 진술의 파티) 거기 무슨 차이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야기를 시작하자마자 그건 내 착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국영화를 끌어안는 방식이 다른 것만큼이나 그것을 쳐다보는 자리도 다르다는 사실을 그날 알게 되었다(<한겨레> 2003년 12월19일치, “소통 넓어진 호러-사극, 금기와의 대면 기념적, 그런데 ‘현재’는 어딨지?” 인터넷 사이트에는 신문보다 좀더 긴 좌담이 실려 있다. 하지만 거기에는 말하여졌으나 실리지 않은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 나는 김소영의 견해에 대해서 많은 부분 동의하고 있으며(특히 한국영화들의 트라우마의 협상을 놓고 벌이는 유희와 거짓 타협들을 주목하는 견해), 그만큼의 폭만큼 허문영의 생각이 나에게 새로운 문제의식을 준 것은 사실이다(양식미를 끌어안으면서 장르적으로 선회하고 있는 웰 메이드에로의 ‘낭만적’ 도착증). 하지만 거의 마지막 순간 김소영과 허문영이 (그리고 여기에 더해서 진행하던 임범과 열심히 타이핑을 하던 김은형이) 불현듯 나를 지금 미친 거 아냐, 라는 표정으로 본 순간을 나는 잘 기억한다(이햇님이라면 ‘당근’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이 미친 넘이 겁 대가리를 상실했나!?”). 어쩌면 그럴 각오를 하고 그 말을 꺼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건 내가 <동갑내기 과외하기>를 ‘긍정적으로, 창조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고 말할 때였다. 그 순간의 침묵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조용함 속에서 그 무거움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은 나를 ‘귀엽게’ 여기지 않았다. 사실 죽을 각오를 하고 꺼낸 말에 대해서 반격하는 대신 무시할 때 그건 나를 두번 죽이는 순간이었다. 아아, 그건 재수 털리는 순간이었다.

(좌담을 정리하면서 사라진 말인데) 솔직히 말하면 <동갑내기 과외하기>는 나도(!) 환상적으로 지루했다(더 솔직히 말하면 정말 미안한 말인데 <동갑내기 과외하기>의 감독 이름을 아직도 외우지 못한다). 그건 그 전 해에 본 <엽기적인 그녀>를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하지만 그 영화를 연출한 곽재용은 그 전부터 잘 알고 있다). 나는 이런 영화를 보면서 김소영과 허문영이 나를 볼 때의 시선과 똑같은 말을 스스로 중얼거렸(었)다. 이 사람들 미친 거 아냐? 여전히 나의 관심은 허우샤오시엔과 마뇰 드 올리베이라, 임권택의 신작이다. 혹은 왕가위와 구로사와 기요시, 지아장커와 가와세 나오미, 그리고 아핏차풍 위라세타쿤, 또는 홍상수와 김기덕의 새로운 영화가 (귀여니의 말투를 빌려서) ‘빨리 보고 싶어서 돼져버리겠다!!’ 그러나 그건 나의 관심이며, 이 영화들을 보면서 열광했던 이들에게 나의 명단은 알 바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함께 우리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들과 우리 사이에 서 있을 서로의 서로에 대한 빗금을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는 단지 세대간의 차이로만 환원할 수 없는 그 무언가가 거기 버티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좀더 나의 진술을 허락한다면 그런 거절할 수 없는 인상은 <동갑내기 과외하기>와 거의 동시에 도착한 <옥탑방 고양이> 때문이었다. 그걸 텔레비전 앞에서 멍청히 바라보면서 정말 거의 모든 신들이 저게 말이 되나, 라는 심정으로 보았다. 그런데도 끝까지 보았다. 그런 다음에 귀여니의 소설을 그해 여름에 읽게 되었다(<그놈은 멋있었다>). 나는 귀여니의 소설을 문학적으로 평가할 만한 자리에 있지 못하다. 하지만 적어도 김윤식 선생께서 귀여니의 소설을 찾아 읽으셨을 것 같지는 않다(그런 다음 이런저런 인터넷 하이틴 소설을 읽었고, 일부는 다운받았다). 일부에서는 국내판 하이틴 로맨스 소설의 인터넷 버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다른 일부에서는 ‘그 아이들만의 리그’라고도 한다. 그러나 그 소설은 애매하지만 나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년 소녀들을 심사숙고하게 만드는 매혹이 있었으며, 그와 동시에 무시해버리고 싶은 기괴한 불쾌감을 동반하는 그 어떤 잉여의 처리에 대한 난처함을 안겨주었다. 나는 이걸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내 앞에 던져진 것, 하여튼 피할 수 없는 것. 나에게는 거추장스럽지만, 그것에 대해서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것에 대해서 외면하면 안 된다. 나는 항상 그렇게 생각한다. 우리가 현실 속에서 대면하고 있는 그 어떤 상징적 사건에 대해서, 그 사건이 떠안고 있는 메시지에 대해서 무시하면 그것은 즉각적으로 실재의 모습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이미 벌어진 사건은 그것을 못 본 척하려는 사회에게 그것을 욕망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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