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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는 <그린치> <더 캣>를 어떻게 해코지했나

닥터 수스의 여우는 양말을 신고 있고 고양이는 모자를 쓰고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일까? 그건 닥터 수스라는 별명으로 알려진 그림책 작가 시어도어 가이젤이 쓴 동화들의 영어 원제를 검토해보면 분명해진다. 〈Fox in Sock〉 〈The Cat in the Hat>. 둘 다 모두 엄격한 각운을 고려한 제목들이다. 닥터 수스라는 작가가 유명한 가장 큰 이유도 제한된 숫자의 영어단어들을 절묘하게 이용해 운을 맞추는 실력 때문이었다. 아마 그의 작품들이 명성에 비해 국내에 덜 소개된 것도 언어장벽 때문일 것이다. <양말 신은 여우>와 같은 그림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운을 이용한 말장난이기 때문에 번역되면 그 매력을 100% 잃는다. 그나마 제대로 소개된 <바솔러뮤 커빈즈의 모자 500개>는 그래도 말장난보다는 스토리의 힘이 더 강한 작품이다.

닥터 수스라는 작가의 힘이 기본적으로 언어에, 그것도 운을 이용한 말장난에 놓여 있다는 것은 중요하다. 다시 한번 <모자 쓴 고양이>의 원제를 읽어보자. 〈The Cat in the Hat>. 완벽한 리듬으로 반복되는 각운 때문에 입에 착 달라붙는 제목이지만 정작 대단한 의미는 없다. 사실 운이라는 것 자체가 글에 어떤 부조리함을 강요하는 경향이 있다. Cat과 Hat이 각운이 맞는다고 해서 둘이 한자리에 모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닥터 수스의 경우 각운이 먼저다.

‘The Cat in the Hat’이 듣기 좋은 제목이라면 쓰자. 그리고 왜 그 고양이가 모자를 쓰고 있는지, 그 모자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는 나중에 생각해보자. 그 결과 닥터 수스의 작품들엔 독특한 부조리함이 형성된다. 그의 그림들은 종종 아주 어처구니없는 상황들을 묘사하는데, 그게 모두 언어학적인 유희(곧장 말해 말장난)가 그림이라는 시각적 매체에 투영된 결과이다. 만약 닥터 수스가 모자 쓴 고양이가 모자에 케이크를 올려놓고 한손에 써레를 든 채 곡예를 하는 그림을 그린다면 그건 순전히 cake과 rake의 각운이 맞기 때문이지 다른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극장용 장편영화로 뜯어고치기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제기된다. 만약 어떤 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말장난이라면 어떻게 해야 서사가 중요시되는 극장용 장편영화로 이야기를 뜯어고칠 수 있을까?

닥터 수스는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한동안 영화판에서도 일한 적도 있다. 2차대전 당시엔 전쟁 홍보영화에 참여했었고 썼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방영된 적 있는 훌륭한 판타지영화인 〈T박사의 피아노 레슨〉(The 5,000 Fingers of Dr. T.)에서 각본을 맡기도 했다.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양질의 텔레비전 단편영화들로 만들어졌다. 그중 가장 유명한 작품은 척 존스가 감독한 애니메이션인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이다. 존스는 〈The Cat in the Hat〉의 훌륭한 애니메이션 버전을 만든 적도 있다.

그리고 닥터 수스는 영화 장르에 근사한 직계후손을 낳기도 했다. 바로 팀 버튼이다. 닥터 수스처럼 운을 맞춘 시구로 이루어진 팀 버튼의 수많은 작품들은 모두 닥터 수스의 창의적인 변형이다. 물론 그 절정은 <크리스마스의 악몽>이다. <크리스마스의 악몽>이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의 팀 버튼 버전이라는 건 척 봐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한 작품들은 닥터 수스의 비전에서 특별히 벗어난 영화들은 아니었다. 〈T박사의 피아노 레슨〉의 이야기는 처음부터 극장용 장편영화를 위해 쓰여졌다. 그뒤에 나오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은 모두 원작에 충실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영화인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는 감독 척 존스의 개성이 듬뿍 살아 있는 작품이긴 했지만 그 개성은 대부분 시각적 스타일에 집중되었고, 유명한 노래 〈You’re a Mean One〉을 추가하고 문장 몇개를 살짝 바꾼 걸 제외하면 닥터 수스의 원작은 그대로 살아남았다. 팀 버튼은? 아무리 닥터 수스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그는 팀 버튼 영화들을 만들었다.

이 모든 것들은 할리우드가 대규모의 예산을 투자해 만드는 장편 극영화엔 해당되지 않는다. 한 시간 반 이상의 러닝타임을 채우기 위해서는 더 많은 스토리와 동기, 더 풍성한 캐릭터가 필요하다.

<그린치>

론 하워드의 <그린치>는 이런 문제점을 그럭저럭 해결한 작품이었다. <그린치>는 그래도 각색해볼 만한 책이었다. 이 그림책에서 핵심은 말장난이 아니라 그린치라는 독특한 심술쟁이 캐릭터이다. 어쩔 수 없는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한계 때문인지 끝에 가서 이 캐릭터도 개심하게 되지만 그 직전까지 그린치가 후 마을 사람들의 크리스마스를 망치려고 짜는 음모는 어린 독자들에게 거의 사디스틱한 쾌감을 제공해주었다. 론 하워드의 영화는 이미 기본적으로 존재하는 스토리에 좀더 깊은 동기를 추구하고 캐릭터들을 조금 더 입체적으로 만드는 쪽을 택했다. <그린치> 그림책의 평면 삽화를 3차원 컴퓨터그래픽으로 옮겼다고 할까. 하워드는 그린치가 왜 그렇게 심술궂게 후 마을 사람들을 대하고 왜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싫어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거의 <프랑켄슈타인>식 탄생담을 덧붙였다. 이 영화에서 그린치는 단순한 심술쟁이가 아니고 후 마을 사람들도 생각없이 착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그린치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외모 때문에 따돌림받고 멸시당한 타자이며 후 마을 사람들은 그린치의 난동 속에서 역시 크리스마스의 교훈을 깨달아야 할 속되고 경박한 사람들이다. 영화화되면서 원작의 간결한 아름다움은 사라졌고 전체적으로 지나치게 번지르르한 영화가 되었지만 하워드의 영화는 거의 완벽하게 논리가 선 이야기와 그럴싸하게 확장된 교훈을 갖추고 있었다.

스토리·동기·캐릭터 ‘부어라 부어라’

그렇다면 2003년 겨울 시즌에 개봉된 <더 캣>(The Cat in the Hat)은 어떨까? 일단 <모자 쓴 고양이>는

<그린치>보다 훨씬 인기있는 작품이고 모자 쓴 고양이도 그린치보다 더 사랑받는 캐릭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엔 쓸 만한 스토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비오는 날 엄마가 나가 있는 동안 집을 지키고 있는 두 남매에게 갑자기 모자 쓴 고양이가 찾아와 온갖 소동을 일으키다가 엄마가 오기 직전에 모든 소동을 마무리짓고 등장할 때처럼 갑자기 사라진다는 게 전부니까. 그리고 고양이가 그 중간에 일으키는 소동은 전형적인 닥터 수스식 말장난의 연속이다. 한마디로 정상적인 극장용 영화에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그린치>가 기존의 이야기를 확장했다면 <더 캣>은 부수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영화는 원작의 순수한 진공 속에 캐릭터와 교훈을 채우고 한 시간이 넘는 이야기를 정당화시킨다.

우선 고양이는 그냥 심심한 아이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그에게는 목적이 있다. 주인공인 콘래드(원작의 이름없는 화자)와 샐리는 문제가 있는 아이들이다. 콘래드는 엄마 말을 듣지 않는 말썽꾸러기이고 샐리는 사교성없고 규칙에 집착하는 강박증 환자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양이는 이 아이들의 성격을 개조하려고 한다. 영화가 끝나고 모든 소란이 진정될 무렵엔 콘래드와 샐리는 마치 칵테일 셰이커에 섞여 서로의 성격을 물려받은 것처럼 ‘정상적인’ 아이가 된다.

영화의 첫 번째 실수이다. 닥터 수스가 교훈과 상관없는 이야기만 썼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린치는 어떻게 크리스마스를 훔쳤는가>는 고전적인 교훈담이다. 심지어 그는 인종차별과 냉전시대의 군비 경쟁을 꼬집는 그림책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강압적으로 사회부적응인 아이들의 성격을 뜯어고치는 이야기를 당연하게 쓸 만큼 무심한 사람은 아니었다. 영화에 묘사되는 아이들의 성격개조 과정은 동기만 따진다면 불쾌하고, 결과만 본다면 강압적이며, 스토리 전개면에서 본다면 논리가 부족하고 전개가 갑작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진다. 결정적으로 이 어정쩡한 교훈은 순수한 즐거움으로 가득 찬 원작의 매력을 무지막지할 정도로 감소시킨다.

영화는 엄마를 극단적으로 결벽증이 심한 사장 밑에서 일하는 부동산 중개업자인 싱글맘으로 고치고, 사장을 위한 파티를 연다는 데드라인과 겉과 속이 다른 음흉한 이웃집 남자가 엄마랑 결혼하고 아들을 군사학교에 보내려고 한다는 설정을 추가해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려고도 한다. 미안하지만 이것도 성공하지는 못했다. 이건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도 뭣한데, 이건 그냥 형편없이 쓰여진 나쁜 각본 이상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지적해야 할 건, 닥터 수스의 그림책 원작이 21세기의 어린이영화로 어떻게 전환되었느냐는 것이다. 아까 <모자 쓴 고양이>의 비주얼은 철저하게 언어학적 유희에 바탕을 둔 난센스라고 이야기했다. 보 웰치의 영화는 이 모든 것들을 그냥 포기해버린다. 심지어 마이크 마이어스의 고양이는 도입부에 “나는 운 맞추는 덴 전혀 실력이 없어!”라고 외치며 닥터 수스식 말장난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영화는 대신 이 빈자리를 디지털 특수효과를 가득 동원한 스펙터클로 채운다. 하지만 스토리가 기둥이 되어주지 못하고 원작의 핵심이었던 언어학적 유희가 사라지자 영화의 스펙터클은 말 그대로 껍질 역할밖에 하지 못한다. 영화는 우리가 <배트맨2>와 <가위손>의 프로덕션디자이너가 만든 첫 감독작에서 기대할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지만 러닝타임 5분을 넘기면 그 화사한 아름다움은 약발이 닳아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정답은 없다. 아마 <모자 쓴 고양이>를 원작으로 삼아 기가 막힌 한 시간 반짜리 영화를 만드는 방법이 어딘가에 숨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 방법은 <더 캣>의 작가들이 써먹은 것과 같은 안이한 할리우드식 각색으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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