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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이유
2001-05-30

DJUNA의 오!컬트...<유령과 뮤어 부인>

막 아마존에서 버나드 허먼이 직접 지휘한 <유령과 뮤어 부인>의 CD가 도착했습니다. 제가 원래 가지고 있는 엘머 번스타인의 녹음보다는 음질이 떨어지지만(어쩔 수 있나요. 60년 전 영화인 걸요) 그래도 오리지널의 향취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이 글을 치면서 듣고 있는데, 허먼 특유의 물결치는 로맨티시즘이 오른쪽 귀로 들어가 왼쪽 귀에서 파도처럼 빠져나가는 걸 온몸으로 느끼고 있자니 기분이 참 좋아집니다.

어떤 영화를 좋아하게 되는 데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습니다. 개인적인 경험 때문일 수도 있고, 배우 때문일 수도 있고, 원작소설 때문일 수도 있으며, 감독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유령과 뮤어 부인>의 경우, 이 다소 감상적인 할리우드 판타지로 저를 인도한 것은 버나드 허먼의 음악이었습니다. 대학로의 모 음반가게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구석에 박혀 있던 CD를 발견하고 좋아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군요. 그동안 몇몇 허먼 팬들로부터 허먼의 최고 걸작이라는 소리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으니까요.

같은 CD를 한 30번쯤 반복해서 보고 있자니 슬슬 영화가 보고 싶더군요. 그러다보니 <유령과 뮤어 부인>은 제가 해외에서 주문한 첫 번째 비디오테이프 중 하나가 되었답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원작이 어떤지 궁금해져서 R. A. 딕의 원작도 사들였고요. 원작을 나누어 쓰고 있는 70년대 시트콤만 보면 제 <유령과 뮤어 부인> 컬렉션은 거의 채워집니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었습니다. 제가 이 영화에서 뮤어 부인을 연기한 클래식 할리우드 배우 진 티어니에 관심을 쏟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으니까요. 물론 전 이 사람을 <로라>를 통해 알고 있었지만, 홍보사진을 덧칠한 가짜 초상화가 아닌 진짜 배우로 인식하게 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영화를 시작으로 티어니의 영화들을 하나씩 모으기 시작했고 그게 다른 클래식할리우드영화들로 슬쩍슬쩍 옮겨갔으니 <유령과 뮤어 부인>은 제 최근 취향에도 꽤 막강한 힘을 휘두른 셈이죠. 생각해보면 제가 최근 들어 귀신들린 집 영화에 몰두하게 된 것도 이 영화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도대체 무슨 내용의 영화이기에? 그렇게 엄청나게 대단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해변으로 이사간 영국 과부가 집에 깃든 선장 유령과 플라토닉한 연애를 한다는 영화거든요. 그래도 잘 만든 영화이기는 합니다. 살짝 감상적이지만 영리하고 위트가 넘치는 작품이지요. 당시 정점에 달했던 할리우드 스튜디오시대의 장인들이 본때를 보여준 영화이기도 하고요. 물론 그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버나드 허먼이겠지만요.

생각해보면 그렇게 오래 전에 본 영화도 아니지만 벌써 <유령과 뮤어 부인>은 추억의 영화가 되어버렸습니다. 어쩌다 그렇게 되었느냐고요? 영화의 감상적인 분위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아마 연쇄반응의 책임이 더 클 겁니다. 도미노게임을 하듯 이 영화를 발판으로 새 영화들을 탐색해 갔으니 그 경로를 거꾸로 밟아 올라가다보면 이 작품이 아주 과거의 작품으로 보여지는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하지요. 적어도 저에게 이 영화는 어렸을 때 더빙 버전으로 보았던 히치콕 영화들만큼이나 추억의 영화입니다.

djuna01@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