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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지 ‘보이’, 불안을 벗고 확신을 말하다
강명석 2004-02-04

서태지의 7집 앨범 <Issue>와 공연

조금 뜬금없는 얘기 같지만, 서태지의 7집 앨범 <Issue>를 이야기하기 전에 지금은 세상을 떠난 한 일본 록 뮤지션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그의 이름은 히데(Hide)인데, 서태지가 이번 앨범에서 함께 일한 공동 편곡자 이나(I.N.A), 기타리스트 카즈(KAZ), 엔지니어 에릭 웨스트폴(Eric Westfall)이 모두 이 뮤지션과 함께 일했다. 아무튼, 그 히데란 사람이 정상의 인기를 누리고 있을 무렵 그런 말을 했었다. 자신이 어린 시절에는 존경하는 뮤지션이 그냥 해본 소리라도 좋으니, 마치 큰형처럼 자신을 이끌어주길 바랐다고. 하지만 막상 자기가 나이가 들어 그런 위치가 되어보니 누구에게도 그런 ‘믿음직한 큰형’같은 존재는 될 수 없었다고 말이다. 나에게 서태지는 그런 존재였다. 생각해보면 그는 세상이 무너져도 내가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나의 ‘형’이었지만, 내가 그를 믿었던 건 그가 늘 ‘불안’해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는 단 한번도 자신에 대해 확신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그것을 숨기며 ‘메시아’가 되려고 하지도 않았다. 서태지는 경이적인 성공 뒤에 이어졌던 2집의 <너에게>에서 ‘… 니가 날 좋아한다고해도 그건 지금뿐일지도 몰라’라고 했고, 3집 <교실이데아>에서는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라고 말했으며,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의 컴백에 쏠리던 6집의 <오렌지>에서도 ‘불타버려 우린 쓰레기야’라며 자신의 내면을 여과없이 드러냈다. 서태지는 늘 나에게, 그리고 당시 10대와 20대 초반을 보냈던 그의 팬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두렵고 힘들더라도, 갈 수밖에 없다면 그대로 가는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리고 그는 ‘기어코’ 매번 밀리언셀러를 달성했고, 그래서 나는 늘 그의 행보에 조마조마해 하면서도 그를 언제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성공은 단지 인기가수의 성공이 아니라, 바로 나의 불안과 고민도 그렇게 이겨낼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함께했기 때문이다.

서른, 불안보다 확신을

그러나, 그가 30대를 넘긴 지금, 그는 이제 자신의 불안 대신 확신을 이야기할 때가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Issue>는 많지 않은 멜로디에 사운드를 계속 변화시킨다는 점에서는 5집의 <Take2>나 <Take4> 같은 곡을 연상시키고, 디스토션 기타를 중심으로 파워풀한 사운드를 내세운다는 점은 6집에 가깝다. 그러나, 그런 요소를 제외한다면 <Issue>는 지금까지의 서태지가 보여준 음악과 많이 다르다. 비록 5집과 6집이 사운드적 차이를 보여준다 하더라도, 거기에는 정교한 변화를 통한 감정의 폭발, 즉 자신의 내면적인 불안이 분노로 폭발하는 과정이 촘촘히 제시되어 있었다. 5집처럼 마치 집을 짓듯 정교한 사운드를 층층이 쌓아올리는 것이건 혹은 6집처럼 계속 암울하게 억눌러놓은 감정들이 어느 순간 단번에 폭발하는 것이건 그의 음악들은 마치 소용돌이처럼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감정을 확장시키고, 끝내 폭발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의 ‘불타버려 우린 쓰레기야’라는 ‘울트라 같은 펀치’는 사람의 마음을 때릴 수 있었고, <Take2>의 ‘TV’라는 단 두 글자가 곡의 강력한 훅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Issue>는 그런 불안과 분노의 폭발 대신 계속 상승하는 멜로디를 제시하고, 듣는 이에게 그것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한다. 모든 곡의 멜로디는 단순하고, 사운드는 그 멜로디를 각기 다른 사운드로 강조한다. 멜로디는 계속 힘차게 상승하거나 아니면 아예 잔잔하게 흐르면서 극단적인 변화로 사람을 자극한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대신 좀더 겹겹이 쌓여 멜로디를 잇는 보컬들은 경쾌하고 신나는 느낌을 더한다. <heffy end>처럼 사운드의 극단적인 변화로 잔잔함과 폭발의 양극단을 오가며 상승하는 멜로디라인을 끊임없이 강조하거나, <Live Wire>처럼 멜로디의 변화와 반복에 따라 계속 사운드를 일대일 대응하듯 변화시키면서 그 변화 자체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 곡이 그 예다. 특히 마치 록발라드를 연상시키는 멜로디에 겹겹이 쌓은 디스토션 기타로 파장을 만들어내고, 코러스와 드럼으로 불규칙한 리듬을 교차시키는 <로봇>의 후렴구는 이 앨범의 성격을 대변하는 듯하다. 진부하다 싶을 정도로 익숙한 멜로디가 진행되지만, 그 밑에 깔리는 사운드가 그것을 새로운 스타일처럼 느끼도록 만든다.

공감이 아닌 동의와 추종을 바라는가

그래서, 이 앨범은 서태지가 낸 앨범 중 ‘유일’하게 결과가 나오기 전부터 대중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앨범이다. 서태지는 사람들이 그에게서 기대하는 사운드의 완성도와 대중에게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잘 계산된 프로그램을 함께 담아 대중과 함께 불안을 뚫고 가기보다는 대중이 자신이 강조하는 어법에 맞추길 요구한다. 이전과는 달리 ‘또 난 역시 곰이고 중심은 돈이고/ 단지 넌 소비자라는 이름의 타깃일 뿐이고’라며 직접적으로 음반산업을 공격하는 <f.m business>의 가사나 <Victim>에 앞서 여성을 비하하는 한 남성의 목소리를 담아 여성인권에 대한 노래인 <Victim>의 의도를 설명하는 <Nothing> 등도 그렇다. 이전의 서태지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대중에게 내보이고, 그것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무엇인가는 대중에게 맡겼다면, <Issue>는 공감의 문제라기보다는 선택의 문제이다. 그가 음악을 만드는 방법론에 동의하느냐 하지 않느냐. 잔잔함 뒤의 폭발이라는 흐름 속에서 이번 앨범의 사운드적 변화가 그것들을 잘 소화하고 있는 <heffy end>나 마치 6집의 <오렌지>를 업그레이드시킨 것처럼 랩과 그루브한 리듬으로 긴장감 있게 곡을 진행시킨 뒤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사운드를 폭발시켜나가는 <f.m business>는 이전의 서태지의 음악들과 맞닿아 있어 그의 음악을 좋아했다면 쉽게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곡들은 그가 강조하는 사운드의 다양한 변화가 주는 자극이나 특정 부분만 떼어놔도 상관없을듯한 멜로디의 반복강조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느낌을 가질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적어도 아직은 그 점에 동의하기 힘들다. 철두철미하게 냉정하면서도 자신의 약한, 혹은 분노한 모습을 드러내길 주저하지 않았던 그의 이중적인 모습이야말로 내가 느끼는 그의 매력이었다. 그러나 그는 이제 ‘형’이 아닌 ‘어른’이 되어 나에게 자신이 만들어낸 사운드를 정확히 듣고, 자신이 의도한 대로 멜로디를 듣고 느끼라고 요구하는 듯하다. 그가 노리는 것은 일관된 감정의 흐름이라기보다는 계속 반복적으로 전달되는 익숙한 멜로디의 자극과 자신이 만든 화려한 사운드의 변화에 대한 강조이다. 그렇기에 감정의 마무리가 잘 제시되지 않은 채 계속해서 비슷한 과정이 반복, 각 사운드의 화려함과 산만함이 동시에 느껴지고, 앨범 전체에 일정한 하나의 흐름이 이어진다. 그러나 과연 그 흐름이 어떤 감정을 드러내기 위해서인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경쾌하고 신나게 들을 수는 있지만, 바로 그 단편적인 느낌들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의 내면적인 감정과 어떻게 연결되어 나와 소통하느냐에 대해서는 아직 모호하게만 느껴진다.

그것은 그가 콘(Korn)과 피어팩토리(Fear Factory)와 함께한 공연 <Live Wire>에서도 비슷하게 느껴진다. 처음부터 끝까지 특별한 이벤트나 무대효과 없이 자기 음악만을 밀고 나가며 관객을 ‘지치거나 미치게’ 만들었던 두 해외 밴드와 달리, 서태지는 적어도 공연장 안에서만큼은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팬들의 기쁨과 즐거움을 자신의 뜻대로 만들어내겠다는 듯했다. 그는 <victim>에서는 <nothing>의 내레이션을 그대로 삽인한 뒤, 남녀 댄서로 하여금 ‘남성이 여성을 짓밟는’ 행위를 하도록 해 노래의 메시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전달하려 했고, <필승>을 부를 때는 이례적으로 팬을 불러올려 함께 노래를 부르며 팬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으며, <인터넷 전쟁>의 테크노 버전에서는 조명을 클럽의 그것처럼 바꾸고, 댄서를 등장시켜 춤을 유도하기도 했다. 그래서 서태지의 공연에는 ‘이벤트’가 존재했지만, 그만큼 공연을 보는 사람이 ‘자기 멋대로’ 공연을 즐길 수 있는, 자기 맘대로 음악을 해석하고 놀 수 있는 여지는 이전보다 줄어든 듯했다.

성숙은 불안을 잊는 것인가

물론, 이것은 서태지의 ‘성숙’일지도 모른다. 늘 젊은 날의 불안만을 안고 살아갈 수 없는 것처럼 서태지도 자신이 확실하다고 믿는 것,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것을 자신있게 내세우게 된 것일 수도 있다. 그가 그의 길을 자신있게 걷듯, 그와 함께 불안과 고민을 공유했던 사람들 역시 자신이 믿는 방향으로 걸을 것이고, 그런 과정 속에서 서태지에게서 ‘시대의 아이콘’이 아닌 ‘대중적인 록음악’을 들려주는 뮤지션의 모습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신의 편안함만큼이나, 나를, 혹은 우리를 미치게 했던 서태지의 불안과 고민의 에너지 역시 소중하다. 물론, 그때로 돌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언제까지나 그때를 잊거나 외면하지는 말았으면 한다. 서태지씨, 나의 10대를 지켜주세요.

강명석/ <서태지와 아이들 그리고 아무도 없는가> 저자 lennonej@freecha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