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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2] - 내부로부터 온 괴물
2004-02-05

‘바위산’, 실종이 아니라 해방의 영역

물론 정신분석의 관점에서 특히나 흥미로운 부분은 (엄밀히 말해 그 자체로 무성적인) 이 실제적 사물은 본질적으로 성적 차이와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피터 위어의 <행잉록에서의 소풍>(사진)에서 나오는 북부 멜버른의 거대한 화산암은 그러한 실제적 사물의 또 다른 버전인가?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통상의 사회 규약들이 다소 유예되는 금지된 영역인 이 장소에 들어서는 순간, 성적 향유의 외설적 비밀들에 접근할 수 있는가?

<행잉록에서의 소풍>은 1900년 2월14일 밸런타인데이에 멜버른 북부의 상류층 학교인 애플야드의 여학생들이 고대 화산암으로 이루어진 천연 경관인 행잉록으로 소풍을 떠나며 벌어진 기이한 사건에 초점을 맞춘다(이러한 사실 자체가 미스터리의 첫째 요소가 된다. 비록 이 영화가 실제로 일어났던 신비한 실종사건에 기반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는 주장에 대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 실상 아무런 근거도 없이 어떻게 수십년 동안 그러한 일이 실제 일어났었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떠나기 전에 금발의 미란다는 고아 친구인 사라에게 더이상 학교에 있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풍 도중에 네명의 소녀들(미란다, 부유한 상속녀 이르마, 이성적인 매리언, 못생긴 이디스)은 바위산을 탐사하기로 마음먹는다. 지치고, 변덕스러운 이디스는 다른 소녀들과는 달리 가기 싫어 남지만, 무엇엔가 겁을 먹고서는 비명을 지르며 나머지 친구들에게로 뛰어오고, 나머지 세명의 소녀들과 맥크로 선생은 바위산에서 실종된다. 소녀들이 바위산으로 다가서는 것을 보았던 두명의 청년들이 그들을 찾으러 가고, 그 도중 부유한 마이클이라는 청년이 환각에 빠져서는 바위에 자해를 한다. 그는 이르마를 찾아내긴 하지만, 이르마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알코올 중독인 교장 애플야드는 사라의 후견인으로부터 후원금이 오지 않기 때문에 더이상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할 심산으로, 사라에게 고아원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고 말한 뒤, 그녀를 학교 지붕에서 밀어 떨어뜨린다(혹은 사라 스스로 자살을 했을까?). 며칠 뒤, 애플야드 교장 스스로도 행잉록을 오르려다 죽는다.

행잉록의 수수께끼가 흥미로운 이유는 그 이야기가 제시하는 다양한 해석들 때문이다. 우선 그 미스터리를 글자 그대로 해석해보자면, 다섯 가지 가능성이 있다.

-간단하면서도 지당한 설명: 세명의 여학생과 선생은 복잡한 바위 사이에 있는 깊은 골짜기 속에 빠졌거나, 거기에 널려 있는 거미나 뱀에 물려 죽었을 것이다.

-성범죄와 관련되어 있는 설명: 바위 근처에 숨어서 아무것도 모르는 방문객들을 기다리는 사악한 원주민들이 그들을 유괴, 강간하고서는, 바위 근처에서 살해했을 것이다. 혹은 여학생들에게 매력을 느꼈을 젊은 남성 캐릭터들인 마이클과 앨버트가 그들을 유괴, 강간하고서는 그들 중 한명을 살려주었을 것이다.

-성적·병리학적 설명: 성애를 억압당했던 여학생들이 폭력적이며 자기파괴적인 히스테리 폭발로 이끌린 것이다.

-원시종교적이며 초자연적인 설명: 바위산의 정령이 자신의 부름을 알아듣는 여학생들만을 선택하여 데려간 것이다(또 그러한 관능적인 불가사의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는 네 번째 여학생 이디스는 돌려보낸 것이다).

-외계인 유괴설: 여학생들은 다른 시공간대로 들어섰던 것이다(첨언하자면, 원작소설의 작가인 조앤 린제이는 사후인 1987년에 출간된 판본에서 18번째 챕터를 ‘행잉록의 비밀’이라 이름 붙였는데, 여기서 그녀는 이 마지막 두 가지 설명을 조합한다).

이와 별도로 적어도 두 가지의 은유적 설명이 존재한다. 즉 이 이야기는 (낡고 잘 정리된 기숙사에 스며 있는) 경직된 규율의 빅토리아 시대 기숙학교의 분위기와 (거친 바윗덩이들에 스며 있는) 구속받지 않고 왕성히 뻗어가는 삶 사이의 대립에 기초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직된 학교의 분위기는 단지 표면 밑에 숨어 있을 뿐인, 반쯤은 억압되어 있는 여학생들 사이의, 선생에 대한 학생의, 또 학생에 대한 선생의 레즈비언적 갈망 등과 같은 에로티시즘과 공명한다. 이런 식으로 자신의 억압된 갈망을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함으로 눌러놓은 것과 달리 바위는 종종 역겹기까지 한 그 세부 형상들에서 해방된 삶의 힘을 상징한다(야생의 무성한 식물, 새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원죄와 관련되어 있는 파충류, 뱀들이 잠든 여학생들 주위를 기어다니는 것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컷 등을 통해).

그렇다면 이 이야기에서의 실종은 폭발에 이르는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이라는 오랜 주제를 변주하는 것으로 읽어낼 수 있다. 쌀쌀맞은 수학 선생 맥크로는 바위를 두고 용해된 용암이 ‘아래로부터 압력을 받아… 매우 점성있는 상태로 분출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묘사는 지구의 저 밑으로부터 솟아나오는 화산 폭발과 같은 자연현상에 대한 설명이라기보다는 억압된 사춘기 소녀들이 서서히 깨우쳐가는 호르몬에 대한 묘사와도 같은 설명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위는 오랫동안 사회관습으로 통제되어오다 결국은 폭발하는, 해방된 삶의 열정을 나타낸다.

이 실종을 반식민주의적으로 비틀어 읽을 수도 있다. 물론 바위산의 복수라는 식의 성(性)화된 개념은 타자 자체에 대해 말해주기보다는 식민주의자들이 피식민 타자에게 투사했던 환상적인 내용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기는 하나, 바위산의 사악한 유괴 행위는 영국의 식민화에 대한 저항을 상징한다. 이렇게 읽을 때, 바위산은 복수를 펼치며, 학교라는 제도화된 일상을 손상시키는 기본적이며 ‘열정적인 연계’(attachment)의 신호를 발산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권위적인 교장 애플야드는 자제력을 잃고서, 산에 가서는 높은 바위 위에서 뛰어내려 자살한다.

비남근적, 비이성애적 에로티시즘으로

이 영화는 수수께끼를 직접 풀어주지는 않지만, 그 모든 가능성을 가리키는 많은 힌트들을 제시한다(여학생들이 사라졌을 때 보이는 이상한 붉은 구름은 산의 정령이 그녀들을 유괴해갔을 것이라고 가리킨다. 또한 시계는 소풍날 정오에 멈춰서며, 생존자들은 완전히 기억을 잃고, 그들 이마에 똑같은 모양의 상처들은 외계인 유괴와 다른 시간대로 옮겨졌다는 것을 나타내는 일반적인 기호들이다). 그러나 이 영화에 퍼져 있는 분위기는 이미 정해져 있는 운명에 대한 것이다. 즉 일어났던 일은 우연의 연속이 아니라 어떻게든 일어나도록 정해져 있던 것이며, 그것은 마치 산으로 여학생들을 이끈 천사와도 같은 소녀 미란다가 이 운명에 대해 예감이라도 하고 있던 것처럼 묘사된다. 그 운명은 비남근적이며, 비이성애적인 에로티시즘과 동일시된다.

바위산과 그 바위산에 운명적으로 이끌리는 소녀들을 성애에 이끌린 것처럼 그리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뒤에 반쯤 죽은 채 발견되는 유일한 생존자인 이르마는 발견되었을 때 옷을 모두 입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옷을 벗길 때 빅토리아 시대 억압의 상징인 코르셋을 입고 있지 않다는 것이 드러난다. 쌀쌀맞은 수학 선생 맥크로 역시 바위산에서 사라지는데, 사라지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마치 홀린 듯이 바위산을 향해 스커트도 입지 않은 채 속옷만을 걸치고 걸어가고 있었다), 이 이야기는 그녀들이 강간당하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다(살아남은 이르마를 진찰하던 의사는 그녀의 처녀막이 ‘손상되지 않았다’라고 재확인한다).

바위산이 상징하는 것은 남근과 관계하는 일반적인 성적 경험보다는 리비도적이며, 해방된 삶의 경험이며, 어쩌면 라캉이 여성적 희열(jouissance feminine)이라고 불렀던 것까지를 상징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그 점에서 이 영화와 역시 거대한 바위 동굴에서 분석 불가능한 성적 수수께끼가 일어나는 <인도로 가는 길> 사이의 차이가 존재한다. <인도로 가는 길>이 식민주의자가 맞이하는 교착상태를 훨씬 복잡하게 묘사하고는 있지만, 이 영화에서 성적으로 욕구불만인 여주인공이 일반적인 이성애적 경험을 갈망하고 있다는 것은 확연히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유일한 섹스신이 학교에서 가장 덜 세련되었고, 따라서 가장 덜 억압된 하인인 톰과 미니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 까닭에 표준적인 설명을 해보자면, 바위가 내뿜는 과잉되고, 숨막힐 듯하며 운명적인 관능성은 오직 빅토리아 시대의 억압이라는 마법에 걸려 있는 사람에게만 영향을 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억압으로 인해 건강한 성적 만족이 가로막히고, 그렇기 때문에 퇴폐적으로 영적이며, 도착적인 방식으로 성화(性化)되었다는) 이러한 설명을 돌려 생각하여, 이성애 자체가 좀더 근본적인 동성간의 ‘정열적인 연계’에 기반하고 있다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빅토리아 시대가 억압하고 있는 이성애라는 것이 훨씬 더 억압된 것의 귀환에 의해 지탱되는 동시에 그 귀환을 가능하게 한다면 어떻겠는가.

프로이트는 이성애적 충동은 그 충동의 에너지가 훨씬 더 근본적인 남근기 이전의 충동을 재가동시키지 않아야만 유지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즉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 행하는 억압은 역설적으로 리비도적 역행에 의존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순수한 형태의 리비도적 역행성을 얻게 된다. (남근적) 성욕을 억압하는 것 자체가 이미 성애화되어 있는 것이며, 그러한 억압은 남근기 이전에 대한 고착(pre-phallic perversity)의 형태를 동원한다. 여기서 엘리자베스 코위가 <가라, 항해자여>(Now, Voyager)에서 베티 데이비스가 그녀의 연인에게 건네는 마지막 대사를 분석한 것을 함께 생각할 수 있다. 베티 데이비스는 어째서 그 이상의 성적 접촉을 포기해야만 하는지 설명한다(‘별들을 가질 수 있는데, 왜 달에 닿으려 하지요?’). 즉 우리가 이성애적 섹스를 거부한다면, 난 레즈비언적 ‘원시적 연계’라는 더욱 강도 높은 쾌락을 얻을 수 있는데, 어째서 이성애적 섹스를 선택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이다.

이러한 측면이 선생들 가운데 가장 덜 성화되었으며, 불감증의 모델과도 같은 가엾은 맥크로 선생이 세명의 소녀들과 함께 사라지고, (18번째 챕터에서) 다시금 신비스러우며 외설적일 정도로 성화된 ‘클라운-우먼’으로 등장하는 유일한 캐릭터가 되는 이유가 된다. 이제 이러한 추론을 끝까지 밀어붙인다면, 교장 선생이라는 인물도 재해석해야 하지 않겠는가? 만일 애플야드 교장이 그저 바위산의 반대편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바위산 자체라면 어떻겠는가? 그녀가 암벽의 경사면에서 자살하는 것이 바위의 원시적 열정에 대한 패배를 나타낸다기보다는 그들의 궁극적인 동일성을 나타낸다면 어떻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