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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특별기고 [4] - 결핍 대 소유, 여성 대 어머니의 대립구조
2004-02-05

결핍 대 소유, 여성 대 어머니의 대립구조

자크-알랭 밀레는 여성의 비존재, 구성적 결핍(‘거세’), 다시 말해 주체성의 공백을 가정하는 여성과 거짓 여성을 구분한다. 거짓 여성은 자신의 본래 매력을 믿지 않고, 아이를 기르고, 남편을 섬기고, 집안을 돌보는 등의 사명을 버리며, 유행하는 옷과 메이크업, 타락한 난교파티에 빠져드는 여성이 아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의 여성이다. 거짓 여성은 그녀 주체성의 한가운데에 존재하는 공백으로부터, 그녀의 존재를 특징짓는 ?결핍?으로부터 도피하여 (가정을 지키고, 아이를 지키며 참된 무언가를) ‘소유’했다는 거짓 확신에 빠져드는 여성이다. 이러한 여성은 확고히 고정된 존재이며 자기완결적인 삶을 살고 있으며, (남편이 바쁘게 뛰는 동안, 자신은 고요한 삶을 이끌며, 남편이 언제나 돌아올 수 있는 항구와도 같이 봉사하며) 일상생활에 만족해 있는 듯이 보인다(그러나 여성에게 ?소유?의 가장 기본적인 형식은 물론 아이를 갖는 것이며, 그래서 라캉은 여성과 어머니 사이의 궁극적 대립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즉 존재하지 않는 여성에 비해, 어머니는 명백히 존재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남성 정체성에 심각한 위협을 주는 쪽은 공백을 가리면서 신경증적이 되며, 자신의 결핍(‘거세’)을 과시하는 여성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남성 정체성에 위협이 되는 여성들이란 가부장적 남성 정체성에 위협이 되지 않을 뿐더러 가부장제를 보호하는 방패가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결핍을 부인하는 ‘소유’한, 즉 자기만족적인 거짓 여성들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 역설은 여성이 공백 주위의 허울을 구성하는 비본질적이고, 모순된 존재로 모욕당하고, 환원되면 될수록, 그녀는 확고한 남성의 본질적 자기동일성을 더욱 위협하게 된다는 것이다(오토 바이닝거의 전체 작업은 이러한 역설에 집중하고 있다). 반면, 여성이 확고하고, 자기완결적인 실체가 되면 될수록, 그녀는 더욱 남성 정체성을 확고하게 해준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를 구성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인 이러한 대립은 <노스탤지아>에서 가장 명확히 드러난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살았던 19세기 러시아 작가의 원고를 찾아 여행 중인 주인공 러시아 작가는 성적 만족을 얻기 위해 그를 유혹하는 결핍된 존재이며, 신경증적인 여성인 유지니아와 그가 러시아에 남겨두고 떠나온 부인의 모성적 모습에 대한 기억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매우 남성 중심적이며, 여성/어머니 대립에 기반을 두고 있다. 성적으로 활동적이며, 도발적인(<노스탤지아>의 유지니아처럼 풀어헤친 긴 머리카락과 같은 기호화된 신호로 유혹하는) 여성은 거짓되며 히스테릭한 존재로 거부당하며, 단정하게 빗어 묶은 머리를 하고 있는 모성적 형태와 대조를 이룬다. 타르코프스키에게 있어, 여성을 성적으로 욕망하게 되는 순간, 그녀는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 그녀 존재에 있어 영혼의 정수를 희생하고, 그 때문에 스스로 황폐해지며, 척박한 존재가 되고 만다. 타르코프스키의 세계는 도발적 여성에 대한 구토를 겨우 가리고 있을 뿐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신경증적인 불안에 걸리기 쉬운 이러한 여성보다, 확실하며 안정적인 어머니라는 존재를 택하고 있다. 이 구토는 유지니아가 주인공을 버리고 떠나기 전에 내뿜는 길고 신경증적인 비난에 대한 주인공(과 감독)의 태도에서 확연히 구분된다.

타르코프스키가 정적인 롱숏들(혹은 느린 패닝이나 트래킹 이동만을 할 뿐인 숏들)을 선택한 것은 바로 이러한 배경에서이다. 이러한 숏들은 두 가지 반대 방향으로 작동할 수 있는데, <노스탤지아>에서는 두 가지 모두 잘 드러난다. 그 숏들은 지구의 중력장으로부터 거양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중력장에 완전히 굴복하는 지점에서처럼 갈망하던 영적 조화를 발하며 그 내용과 조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거나(그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긴 숏이 이 영화에 등장하는데, 러시아인 주인공이 불붙여진 초를 들고서 텅 빈 수영장을 걷는 장면이다. 죽은 도미니코가 구원받기 위해 완수해야 한다고 말한 사명으로, 결국 한번 실패한 뒤에 주인공은 수영장의 다른 편 끝에 다다른다. 이때 그는 환희에 충만하여 죽음을 맞이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그 숏들이 유지니아가 주인공에게 퍼붓는 (성적으로 도발적이고 유혹적인 제스처와 경멸적인 관찰이 한데 섞여 있는) 신경증적 폭발을 담은 롱숏과 같이 형식과 내용 사이의 대조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숏에서 유지니아는 지친 주인공이 보여주는 무관심함 뿐만 아니라, 어떤 면에서는 그녀의 이러한 격발에도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을, 길고 정적인 숏 그 자체에 대해서도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는 (여성적이며) 신경증적인 격발들을 피사체에 지나치게 가깝게 다가간 채 핸드헬드 카메라로 잡아내고 있는 카사베츠와 정반대에 위치한다. 이러한 카사베츠의 작업은 격분한 여성들의 얼굴을 형태변화시키며 시점의 안정성을 잃는다.

타르코프스키의 오판, 또는 완전한 결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라리스>는 비록 부인되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규범적인 남성 시나리오의 주요 특징들을 보충한다. 여성을 남성의 증상으로 보는 구조는 남성이 그의 타자적 사물, 즉 그의 가장 내밀한 꿈을 읽고 그에게 증상과 그 자신의 메시지로 되돌아오는 탈중심화되었으며 불투명한 타자적 대상과 대면했을 때에만 작동가능한 것이다(그러나 남성 주체는 그 증상, 메시지를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이러한 이유로 융의 방식을 따라 <솔라리스>를 단순히 (남성) 주체의 부인된 내적 충동의 투사나 물질화라는 식으로 읽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만일 이 투사가 일어난다면, 불가해한 타자적 사물이란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진정 수수께끼로 삼아야 할 것은 이 실제적 사물이라는 존재이다. 타르코프스키의 문제는 그 스스로 외적 여행이란 단지 한 개인의 내밀한 심리로 떠나는 여행의 외화인 동시에 (혹은 외화이거나) 투사일 뿐이라는 융식의 해석을 택했다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한 인터뷰에서 “켈빈이 솔라리스에서 행할 임무는 아마도 오직 하나일 것이다. 사랑을 잃은 남자는 더이상 남자가 아니다. 이 ‘솔라리스적’인 전체의 목표는 휴머니티란 사랑이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렘의 원작소설은 이와 매우 대조적으로 행성 솔라리스, 이 ‘사유 존재’(res cogitans)의 비활성적인 외적 현존에 초점을 맞춘다. 소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솔라리스는 우리와 커뮤니케이션이 불가능한, 불가해한 절대적 타자로 남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의 가장 내밀한 부인된 판타지로 되돌아오긴 하나, 이러한 회귀 아래에 놓여진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문제는 완전히 불가해한 것으로 남는다(그것은 어째서 그러한 일을 하는가? 순수한 기계적 반응일 뿐인가? 우리와 악마의 게임을 하자는 것인가? 우리를 도와 (혹은 강제로) 우리가 부인한 진실을 대면하도록 하려는 것인가?). 그러한 점에서 타르코프스키를 할리우드에서 영화화하기 위해 소설을 상업적으로 각색하는 작업과 유사한 위치에 놓는 것은 흥미로운 일일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가장 질 낮은 할리우드 프로듀서들이 하는 바로 그런 일을 했다. 즉 수수께끼 같은 타자성과의 만남을 커플을 만들어내는 틀 안으로 다시 써넣은 것이다.

<솔라리스>의 소설과 영화 사이의 거리는 각기 다른 엔딩장면에서 가장 잘 확인할 수 있다. 소설에서 켈빈은 솔라리스 대양의 신비스러운 표면을 응시하며 우주선에 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영화는 주인공이 내던져진 타자성(솔라리스의 혼돈스러운 표면)과 그가 돌아가길 갈망하는 다차(러시아식 나무집)를 하나의 숏 안에 조합해 넣는, 원형적이며 타르코프스키적인 환상으로 끝맺는다(여기서 다차는 솔라리스, 즉 극단적 타자성의 내부에 위치해 있다. 여기서 가장 내밀한 갈망의 잃어버린 대상을 발견한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퀀스는 모호한 방식으로 촬영되었다. 이 숏 바로 직전에 우주 정거장의 살아남은 동료 가운데 하나가 켈빈에게 집에 돌아갈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물속의 수초를 보여주는 타르코프스키 스타일의 숏이 두어컷 지나가고 나면, 다차 안에서 켈빈과 그의 아버지는 화해한 채 서 있다. 그리고는 점차 우리가 본 그 다차가 실제의 고향 집이 아니라, 여전히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비전이라는 것이 명확해진다. 다차와 다차를 둘러싼 풀밭은 혼돈스러운 솔라리스의 표면 한가운데 홀로 외딴섬으로 나타난다. 즉 솔라리스가 만들어낸 또 하나의 물질화된 비전인 것이다.

이와 동일한 환상적인 숏이 <노스탤지아>에도 들어 있다. 폐허가 된 성단의 잔해 속에 둘러싸인 이탈리아 시골 풍경 한가운데, 주인공이 헤매다니는 바로 그곳에 난데없이 주인공의 꿈에 나타났던 러시아식 다차가 있는 것이다. 여기서도 숏은 다차 앞에서 가로 누워 있는 주인공을 클로즈업으로 잡으며 시작하는데, 이때 주인공은 실제 고향으로 돌아간 듯 보인다. 그러나 카메라가 천천히 뒤로 빠져나오면 이탈리아 시골 한가운데 다차가 있는 세팅이 드러난다. 주인공이 수영장을 가로질러 초를 나르는 자기희생적이며 강박적인 제스처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쓰러져 죽음을 맞이한(혹은 그렇게 믿게 되는) 이후에 이 신이 이어지기 때문에 <노스탤지아>의 마지막 숏을 주인공의 꿈이 아니라, 주인공의 죽음을 상징하는 언캐니한 신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주인공이 떠도는 이탈리아 시골과 그가 갈망했던 대상이 한데 합쳐지는 불가능의 순간은 죽음의 순간이다(이 불가능한 통합은 유지니아가 주인공의 러시아에 두고 온 모성적인 부인을 껴안고서 나타나는 꿈 시퀀스에서 나타나 있다).

접속 불가능한 중핵과의 교신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현상이며 장면이고, 꿈 체험이다. 즉 주체화될 수 없는 비주체적 현상이며, 그 누구의 꿈도 아닌 꿈이고, 그 주체가 존재를 그만두고 나서야 나타나는 꿈인 것이다. 이러한 결말적인 판타지는 대립하고, 양립할 수 없는 시점들이 인공적으로 압축된 것이다(마치 한쪽 눈으로는 새장만을 보게 하고, 다른 한쪽 눈으로는 앵무새만 보게 하고 나서, 두눈의 각도를 잘 조절하고 나서 두눈을 다 뜨면 새장에 갇혀 있는 앵무새를 보게 되는 실험같이 말이다. 난 최근에 이 테스트에서 실패했는데, 그때 간호사에게 내 동기가 더 강했다면 아마도 성공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앵무새와 새장 대신 발기한 페니스와 벌려진 질이 실험의 이미지여서, 두눈을 뜨면 페니스가 질 안에 들어간 것처럼 보이는 실험이었더라면 말이다. 그 가엾은 간호사는 날 몰아냈다. 그리하여 한마디만 더 하자면 라캉은 모든 (하나의 요소가 결국에는 다른 요소와 완벽히 들어맞는) 환상적이며 조화로운 조정은 궁극적으로는 (남성의 성기가 여성의 열린 ‘열쇠를 자물쇠의 구멍에 넣는 것처럼’ 들어맞는) 성공적인 성관계의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나의 겸손했던 제안은 정당화되는 것이다).

타르코프스키는 이 마지막 신뿐만 아니라 새로운 오프닝 또한 추가했다. 소설에서는 켈빈이 솔라리스로 떠나며 시작하는 반면, 영화의 초반 30분은 다차가 있는 타르코프스키적인 러시아 시골을 보여주고 있다. 그 시골에서 켈빈은 산책을 하고, 비에 흠뻑 젖고, 축축한 대지에 몸을 뉜다. 앞서 강조했던 바와 같이, 영화가 환상적인 결말을 내리고 있는 것과 달리 소설은 그 어떤 접촉도 불가능한 타자성과 접했음을 그 어느 때보다 잘 알고 있는 켈빈이 솔라리스의 표면을 홀로 바라보고 있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그렇다면 행성 솔라리스는 엄격히 칸트식으로 말해 물자체, 실체적 대상으로서의 사유(사유하는 본질)가 불가능한 출현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솔라리스에서 중요한 것은 과도하고 절대적인 근접성이 완벽한 타자성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솔라리스는 우리 존재의 객관적으로 주관적인 환상적 중핵을 내보인다는 점에서 곧바로 우리 자신이 되는 타자성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접속 불가능한 중핵에 가까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솔라리스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하는 것은 솔라리스가 우리의 제한된 능력을 무한히 넘어서서는, 우리가 영원히 이해 못할 심술궂은 게임을 하는 지적 존재이기 때문에 이질적이어서가 아니라, 솔라리스는 상징세계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서 거리두어야만 할 존재로 우리를 지나치게 가깝게 이끌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타자성으로 솔라리스는 우리의 가장 내밀한 변덕에 따르는 유령과도 같은 현상을 만들어낸다. 만일 솔라리스의 표면을 조종하는 무대감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 우리 내부의 사유존재인 것이다. 여기서 가장 근본적인 교훈은 대타자(상징적 질서)와 실제적 사물로서의 타자 사이의 대립과 반대 관계이다. 대타자는 가로막혀 있다. 그것은 커뮤니케이션의 틀을 마련해주는 상징적 규칙이라는 가상적 질서일 뿐이다. 반면 솔라리스에서 대타자란 더이상 가로막혀 있지 않으며, 전적으로 가상적이다. 거기에서 상징계는 실제계로 무너져내리고, 언어는 실제적 사물로 존재하기에 이른다.